『경향잡지』 1949년 11월호 제43권 제11호 통권 1016호(166〜169쪽)
최도마 신부 전기(八)
2. 귀국도상에(속)
그 이튿날 우리일행은 불란서군함의 조난하였다는 급보를 제일 먼저 받고 구원하러 달려온 영국배를 타고 중국에로 돌아가게 되었나이다. 한국을 떠나기전에 불란서함장은 한국대신들에게 서신을 전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자유를 요청하는동시에, 중국도광(道光)천자의 성교회 광양을 허락하신 조서등본 한 장을 첨부하였나이다.
나는 고군도에 홀로 머물러있고저하여, 여러번 불란서 장교에게 간청하였으나, 그는 나를 외로이 이 지대에 남기는 것이 대단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의 소청을 끝끝내 거절하고 말았나이다. 나는 그러면 떠나나이다. 나는 과거 많은 고초와 싸운 끝에, 고국을 찾아들어온 줄로 믿었더니, 나는 나의 사랑하는 포됴지를 눈물을 뿌리며 따나옵나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상해로 돌아오지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입국의 희망이 없다고 낙심치안나이다. 우리는 항상 천주의 인자를 믿고, 그의 전능과 기묘한 섭리를 믿나이다. 실로 나는 전적으로 주의 영광을위하여 노력할 각오하에, 일신을 주의손에 맡겼사오니, 나는 항상항상 희망을품고 지내나이다.
천주여! 우리의 근심을 굽어보사 애련이 여기소서. 우리죄를 사핵지마르시고 예수성심과 영화로우신 동정마리아를 보사 모든성인의 부르집어 전달함을 들어허락하소서.」
불란서군인들이 고군도를 떠난이후로 한국내는 자못 시끄러웠다. 一八四八년 九월 「다블류」신부께서 본국에 보내신 서간문에 여실이 드러난다.(7)
1. 향간에는 일년간 불란서군함에대한 이야기뿐이오, 이야기는 과장에 과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2. 조정에서는 불란서군인들이 또다시 침입할까 대단 염려중에 있었으며, 발될 위기에 처하여있었고, 부분적으로 외교인들의 교인습격이 있었다. 한국정부는 중국의 속국이니만큼, 중국천자를 통하여 불란서함장의 서간에대한 회답을 전하였다. 그내용인즉 아래와 같다.(8)
1. 一八三九년에 외국인 셋을 한국에서 처벌한 것은 사실이나, 한복을 입고 국어를 사용하매 그 국적을 몰렀었으며,
2. 이들은 난파선으로 들어온 외국인이 절대 아니오, 살인강도보다는 더 행악이 심하였으니, 국법에의하여 처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사실이 이러하매, 한국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부란서는 섭섭히 생각하여 항의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불란서함장은 고군도에서 조난시에 남기고간 군기를 찾으려 다시 올 생각을하고 있었으며, 기어코 한국내에서 천주교의 포교자유를 얻어주려고 노력할 결심을 가젔었다.
최도마부제의 일행은 포교자유는 별문제하고 고군도에 불란서군함이 다시온다면 입국의 희망이 있다고생각하여 상해에서 一년간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一八四八년 불란서함장은 본국에 사거니 돌발하여 귀국하고 고군도내왕계획을 포기하게되었다.
한국내에서 「페레올」주교께서는 불란서배가 고군도에 다시 오리라고 짐작하섰기 때문에, 교우들을 시켜 목선을 타고 고군도 근방을 헤매게하였으나, 一八四八년이 다 지나도로고 헛수고만 하였고, 이렇게 최부제일행의 입국할 희망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이다.(9)
금은 불속에서, 덕은 역경에서 시련되고야, 바야흐로 참다워지는 것이다.
「메스뜨르」신부와 최도마부제에게 역경은 그들의 덕을 여실이 드러내고도 남음이있다. 그들은 온갖 불리한 환경을 초월한 듯, 또다시 입국을 계획하고 상해에서「마까오」로 향하여, 교회경리부의 후원을 얻어 중국목선을 타고 황해의 거친 파도와 싸운다.(10)
배는 적고 파도는 산같이 일어서매, 돗을 잃고 누차파선할 위기에 직면하였었다. 이는 복자 김안드레아신부님의 상해내왕과 같은 모험이다.
최도마의 일행은 황해도 백영도(白翎島)부근에 이르렀다. 이곳에 오면 상봉을 약속한 한국교우들을 만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날길이 없다. 체포되었는가 혹은 경계가 욱심한 연고이였던가, 여하튼 기대하였던이들의 마음은 초조하기 가이없다. 며칠 더 기다리려하였으나, 비겁한 중국 선주는 불응한다. 최도마일행의 곤난한 입장과 서글피 떠나는 그들의 심정은 오직 상상에 맡길일이다. 일행은 주은ꥶᅩ 만난의 고개를 넘고 넘어 상해에 돌아왔다.
一八四八년은 저물고, 一八四九년 사입일봉재때도 지나, 부활의 대축일을 기뻐하게되었다. 一八四九년 사백주일(양력 四월 十五일)이날은 우리한국가톨릭이 잊어안될 기념일이다. 이날에 최도마부제는 상해에서
「마레스카」주교각하의 집전하에 탁덕슴품을 받으신 것이다.(11)(필자 註. 도마신부 친족들은 도마신부의 승품일을 一八四九년 四월 十일이라고 전한다)
오! 최도마신부님 이는 한국인으로서 제 二차 승품되신 탁덕이시다 이렇게 상해는 우리한국과 두 번째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이번승품식에는 동포로서 한명도 참석지 못하였다. 신ㅍ무성사의 은혜를 받은후 우리일꾼은 더욱 용감하여졌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누까十․二)고 탄식하신 스승의 말씀은, 특히 한국을 두고 하신말씀인 듯 새삼스러이 느낀다.
최도마 신부님은 그승품이후 며칠이 지난다음에 파리외방전교회에계신 「레그레좌」신부께 다음같은 글을 쓰셨다.(12)
「귀향중에 있음과같은 땅에서 신부님께 편지를 올림은 나의 원의가 아직 이루어지지못함을 호소함이로소이다. 우리가 헛된거름을 거듭하였다는 말씀을 들으실때마다, 신부님 마음이 섭섭하실것이오, 나도 이같은 소식을 항상 전하여드리게되오니 서롭기 가이없나이다. 그러나 천주성의에 합하게하는일의에 무슨 더할일이 있사오리까?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아니하였으나, 다시 더할일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지안나이다. 우리의 열망하고 노력하옵는바는, 어느 인간을 위하여서도 아니오, 우리자신을 위하여서도 아니며, 우리 마음속을 보시고 우리 봉사를 받으실필요을 느끼시지 않으시는 천주를 위하는바이오며, 우리가 그 독생성자 오주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과 많은 인내로써 좋은 결실을 맺게코저하신 천주를 위함이로소이다. 우리가 당한바는 인자하신 천주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적은 것을 한것이로소이다. 죄인 하나의 회개를 위하거나, 어느 특별한 은혜를 얻기위하여 十」년, 二十년, 三, 四十년간 장구하고 지독한 극기행사와 아울러 큰 희생을 드리며 열열한 기도를 주대전에 바친 성인들이 그 얼마이오리까? 이러한 표양을 보면 내자신을 지배하는 그 정신이 어떠한것인지 나 깨닫지 못하겠나이다.
천주 나의 구하는바를 허락지않으심은, 내가 그 성우를 등한시한탓인듯도하고, 나의 죄과는 크며 인력을 과도히 믿은탓인듯도 하옵나이다. 그리하여 나자신이 주의 인자를 촉범한 듯 하도소이다. 오- 지선하신 천주여, 만일 나자신이 네의노의 원인이라 하오면, 나를 깊고 깊은 바다소에 던저바리시되, 다른 믿는자들만은애련이여기소서. 네거룩하신뜻이 나위에, 나안에, 나로써, 나와함께 이루여지이다.」
최도마신부께서는 입국의 기회를 엿보시러 一八四九년 五월 요동에로 가섰다. 요동에 七개월간 체류하시며, 당시 만주교구 부주교로 계시던 「베르뇌」각하의 지도하에서, 성무의 경험을 쌓으시게되었다. 즉 병자를 방문하시고 주일과 첨례에 설교도하시며,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시고 몇몇 교우촌을 순회하셨다.(13)
「메스뜨르」신부께서도 초도마신부와함께 입국하시려고 一八四九년 十一월 三일 요동에로 오섰다.(14)
그때에 모든환경을 비최여보아, 입국의 희망은 전보다 더욱 적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힘에 미치는데까지는 우리가 다하고, 못할 것은 오직 주의 안배에 매끼며 기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할바를 다하는때에, 천주 우리노력에 비례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