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 해설 / 송승환
체조하는 사람
이수명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땅을 파고 체조가 서 있다. 마른 풀을 헤치고 다른 풀을 따라 웃는다. 사투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대기의 층과 층 사이에 체조가 서 있다.
나는 체조를 따라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까
나는 체조를 떠나지 않고 나는 구령이 터져 나온다. 체조는 심심하다. 체조가 나에게 휘어져 들어올 때 나는 체조를 이긴다. 체조는 나를 이긴다.
아래층과 위층이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 나는 참 시끄럽다. 내가 체조를 감추든가 체조가 나를 감추든가 해야 했다.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시집 『마치』 2014. 4 ................................................................................................................................................................................................................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은 내가 육체를 통해 구축하려는 체조와 내가 무너뜨려야 할 육체의 체조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체조는 주어진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정한 순서로 움직이는 몸의 동작을 반복하고 외우면서 확립하는 육체의 형식이다. “나에게 체조가 있다”는 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몸의 동작을 반복하고 외우면서 확립한 육체의 형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는 것은 일정한 육체의 형식으로 확립된 체조가 육체에 새겨져서 내 의지보다 먼저 육체의 동작을 기억하고 불러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체조의 형식과 내 의지와 무관하게 육체가 관성적으로 불러오는 체조의 형식. 시인이 확립하려는 시세계와 이미 확립된 시세계에서 관성적으로 씌어지는 시.
하나의 형식으로 완성된 체조는 육체의 특정 부위를 강화시키는 효과와 익숙함이 있지만 육체의 모든 부위를 강화시켜주지 않는다. 그 체조의 형식은 내가 확립한 것이므로 언제나 수행해야 할 의무가 없고 완전한 형식도 아니다. 체조는 본래 무정형의 형식이므로 체조의 형식은 없다. 체조의 형식은 그 ‘없음’에서 발생한다. 음악이 침묵 속에서 솟아올라 플루트를 통해 고유한 음색으로 현현하고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무정형의 체조는 내 육체를 통해 하나의 형식을 드러내고 동작의 멈춤과 함께 사라진다. 무(無)의 체조와 내 육체의 체조와 수없이 많은 체조의 형식.
시인에게 하나의 시 세계 확립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시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하나의 형식으로 현현하고 고유한 시 세계로 확립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확립된 시의 형식으로 고착되어 관성적으로 씌어지는 시쓰기가 될 때 그 시세계는 무너뜨리고 무너져야 한다. 시인이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시세계는 구축과 해체가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체조의 구축만이 있을 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고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의 구축만이 있을 때 화석화된 시의 형식만 있고 시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체조는 “무너지느라고” 서 있고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시는 무너지느라고 씌어져왔다. 지금 쓰는 시는 모두 무너뜨리고 다시 써야 할 시이다. 한 편의 시와 하나의 시세계는 시인의 언어라는 육체를 통해 구축한 시의 한 형식일 뿐이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이듯이 시는 시인에게 투명한 무(無)의 형식으로 있는 시를 가리켜 보인다.
송승환(시인, 문학평론가), 「육체의 형식과 시의 형식」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