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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또 늘찬양
금하지 말라 (2)
막 10:13-16,2022.10.09.늘찬양교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청각장애인, 눈먼 자, 문둥병자 등을 고치신 이후 많은 병자가 자신의 병을 치료받고자 그 외에도 말씀의 은혜를 갈망하여 예수님의 뒤를 쫓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 그런데 이날은 유난히도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에 놀란 제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싸 챈 부모들을 향해 “지금 예수님께서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피곤하게 하느냐?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라!”며 꾸짖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에는 예수님이 피곤치 않도록 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충성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막 10:14)며 심한 꾸지람과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같은 근거는 “노하시어”라는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어떠한 생각 어떠한 행동이 잘못되어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과 책망을 받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에 담긴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Ⅰ. 제자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
1. 잘못된 믿음, 잘못된 가치체계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안아주고 이야기하고 복을 빌어주고 하는 것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고 시간만 빼앗아가는 작은 일이라고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에게 쏟는 일보다 더 크고 중한 일들이 산재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아이들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이 어른들의 우선순위에 밀린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에는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편향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장터에 나가면 약 장사가 원숭이나 뱀을 끌고 와서 묘기를 부리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 어린 저는 볼만한 구경거리이다. 생각하고 무리에 끼어서 구경할라치면 어김없이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합니다. 그 핵심은 애들은 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돈 때문에 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막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성과만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일들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들의 위상도 높아지는 등 가시적인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데 어린이들을 안아주고 복을 빌어줘 받자 그 효과는 30년 뒤에나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제자들 속에는 성과 위주의 가치체계가 꾸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율법을 통해 그동안 쌓았던 업적과 행위 등이 자신의 우월감이고 존재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받은 것이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4-9)며 자신들이 쌓았던 가시적인 가치체계를 인정하지 않자! 앞에 있는 본문 말씀처럼 주일 문제, 이혼문제 등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구역예배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평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다 보면 아이들이 종종 참석하게 되는데 부모님 곁에서 조용히 앉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훈련하기보다는 아이들을 한 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질 못하게 합니다. 어른들 예배나 식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미래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려서부터 말씀을 아이들 속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영혼의 가치는 나이가 많고 적은 것과는 무관합니다. 어린이의 영혼도 어른들과 똑같은 하나의 영혼이지 반쪽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린 영혼의 구원을 가로막는 행동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까?
9월 30일이 손녀 채윤이의 9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손녀 생일 선물로 전달해줄 상품권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주면서 “승윤이 데리고 갈 때 가서 줄게!” 했더니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품권의 금액이 만원이었습니다. 너무 약소한 것 같아서 오천원권 2장도 함께 보냈습니다. 하지만 손녀는 금액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기뻐서 잠옷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13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싶은 마음, 예수님의 손으로 만져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믿음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나아가고자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교리와 율법에 찌든 그런 쩍쩍의 신앙인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믿음, 순종하며 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15절)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마음입니다. 순수한 마음, 겸손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 거기서 나오는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천국은 이런자의 것입니다.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
본문이 말하고자 핵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조금 전 손녀에게 상품권을 주면서 “채윤아! 이다음에 커서 할아버지에게 갚아야 한다. 이거 다 빚이야 꼭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면 아이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아이들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아이는 그냥 받고 좋아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는 사람도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하고 만족해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자들처럼,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처럼 가시화된 결과물을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천국을 들어갈 수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더 남기려고 고진감래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른들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특징은 순수함과 거짓 없음과 바름의 모습도 있지만, 실수를 잘합니다. 종종 엉뚱한 사고도 칩니다. 아이들이 실수와 사고를 저지르지 않으면 벌써 애어른이 된 것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천국의 비밀은 어린아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어도, 또 어떤 큰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이 만져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 하나 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주님 사모하는 마음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자! 나는 어린이라 힘도 없다. 능력도 없다. 날마다 주님과 천국을 사모하며 늘 찬양함 속에 살아가자!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의 비밀이고 능력입니다.
Ⅱ.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보다 영적으로 어린 디모데에게 복음을 들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모범을 보여주어 위대한 복음의 전도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 배운 말씀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꾸 손녀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김채윤이는 6살이 되는 해부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게 했습니다. 열심히 외우는 동영상도 찍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동생 김승윤이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아내가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주경학자 렌스키는 말하기를 “아이들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성경을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정욕과 영혼을 황폐케 하는 악한 영들이 침투하여 그들을 정복해 버리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복음이 편협되지 않도록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서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행복이고 기쁨이고 축복인지를 아이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들은 보고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천국의 비밀을 분명히 알고 전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함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빌리 선데이는 말하기를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를 하되 아기에게 젖을 물릴 때도 기도하며 먹여야 하고 자녀들이 잠잘 때도 그 방에 들어가 자녀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부모의 사랑을 먹고 훗날 하나님이 쓰시는 영향력 있는 아이로 잘 자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며느리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저희가 키웠습니다. 그렇다 보니 말씀과 기도로 키우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런데도 식사 기도를 빼먹고 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기도는 습관입니다. 그만큼 생활화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컬럼니스트 '반 부렌'('Van Buren')의 「부모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오! 하나님, 저로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저에게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실수를 할 때 비웃지 않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저 자신의 만족이나 권위를 내세우려고 그들을 나무라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옵소서.
매 순간 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정직함이 옳음을 알려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 저의 입술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저를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존경받고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이웃 나라 일본과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는가를 책을 통해 알아보았더니 일본의 부모들은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고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남과 나누어 가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먼저 남을 배려하는 일이 몸에 배어 있고 미국 사람들은 자원봉사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빨리 빨립니다. “빨리 공부해라. 빨리 학교 안 가고 뭐 하느냐?. 뭘 꾸물대고 있느냐?. 빨리해야지.” 등등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금하지 말아라!” 두 번째 설교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비밀, 소유하는 비밀, 누리는 비밀은 “평생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순수하게, 거짓 없이 욕심 없이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 그것이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축복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자녀에게 “너는 항상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를 신앙의 푯대로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