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장33절을 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하고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유자라고 우겨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하고 대답하십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자체가 죄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속에 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자유자가 아니라 피동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벌벌 떨든지 아니면
복을 받고 싶어서 욕심을 내든지 이 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어두움에 묶여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벌벌 떨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조금 자유롭고 자신이 있으면 사물의 복을 받으려고
고함을 치는 이 두 가지 현상 밖에 없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듣고 보니 꼭 지금의 교회에 대한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종의 특징은 자신이 뭔가에 잡혀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과 관념이 자신도 모르게 그리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게 잡혀있는 거란 말인데 특히 사람에게 의존적입니다.
사람을 자꾸 의지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자꾸 사람을 배경으로 세웁니다.
요즘 전도할 때에 어느 교회인데 우리 목사님 참 대단하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위기에 몰려도 사람을 배경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래 뵈어도 유다지파야 왕족이야 정통유대인이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도 사람을 의지한다거나 사람을 자신의 배경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바울이 만부득이 나도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이며 가말리엘
문하생이고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너무
박해를 해 대니까 나도 너희만큼 괜찮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 따위의 것을 다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까? 배설물과 같이...
이 말을 하려고 자기 배경을 말한 것일 뿐 나도 자랑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행22:3, 빌3:4-6)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기서나 자존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다가 갈 인간들이 둘 셋씩 모아서 당을 지어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운동을 하려는 못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언어가 틀리지만 모여서 엮어 연합이 되어 세력으로 권세를 부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셨을 뿐 뿔(권세)을 주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능력은 항상 주님께 속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서로 인정해 주자,
서로의 영광을 서로서로 취하자 이것하자고 뭉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몰라주든 심지어 자식이 나를 몰라주든,
형제가 나를 몰라주든, 부모가 나를 몰라주든, 교단의 목사들이 몰라주든지,
말든지 나 스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다 몰라 줘도 주님만이 날 알아주신다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다음 요8장35절 또 보십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종은 항상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집에 거합니다. 영원히 거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바로 거기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아들은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 바로 진리를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는 성령님과 같이 오셔야만 됩니다.
성령이 내주하셔야만 말씀이 인격화 되어 드디어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살아 있는 말씀도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만이
우리의 심령에 배어들고 서서히 체화(요1:14)가 되어 존재가 되고 삶이 됩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을 곳이 없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도 장로교, 오순절교,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안에 있을 곳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사람들을 보면 그 속에 무엇이든 가득 차 있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만삭이 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해산을 해야 되는데 아무리
여관을 찾고 방을 찾아도 집집마다 빈방 없음의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눅2:7)
7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은 전도할 때 사용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늘 하는 말이 ‘빈방 없음, 빈방 없음’이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밖에 나가면
당장 해야 할 일, 가야 할 곳과 말하고 싶은 것들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심방을 가보면 이런 가정이 있습니다. 그 집에 평강이 임하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진정한 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자마자 바로 '목사님 언제 한국에 오셨어요?' 하고 묻습니다.
그게 궁금해 기도 중에 엉뚱한 생각만 마음에 가득해서 주의 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 봅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를 모시고 받아 들일만한 빈방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 빈방이 없습니다. 빨리 예배를 끝내고
난 다음에 백화점에 가야 되고, 예배 끝난 다음엔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속히 보러가야 되고... 도대체 빈방이 없습니다.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가보면 부교역자들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립니다.
그들은 교회 일과 교인들 관리하느라 도무지 빈방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망하고 지금도 미전도 종족이 된 이유가 뭔가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빈방을 만들어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66장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의 보좌삼고 땅을 나의 발등상으로 삼는
내가 내 말씀으로 모든 만물을 지은 나를 위하여 너희들이 내 처소를
만들겠느냐 내 쉴 만한 곳으로 너희들이 만들겠느냐 너희들이 만든 곳에
내가 거하겠느냐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으로 통회하며 나의 말에 벌벌 떠는
자를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1-2)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집짓는 일에 너무 분주합니다.
마르다처럼 너무 분주해서 빈방이 없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빈방이 없어요.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는 빈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을 위해 항상 빈방을 좀 만들어야 합니다(마5:3)
순간순간마다 우리 안에 주님을 위해 빈방을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고정관념과 습관 또 믿음의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빈방이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목사만 되면 으레 자기는 가르치는 사람인 줄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속에는 주님을 위한 빈방이 없는 걸 봅니다.
요8장4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일서 5장에서도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로
난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임재성과 지체성과 선교성이라 말하는 겁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말씀을 들을 줄 모릅니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곳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우리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혼을 살리는 목자가 아니라면 전도를
안 하는 것이 그 영혼을 위해서 더 이롭습니다. 그 교회에 와서 영혼이
살아날 가능이 없으면 전도를 안 하는 것이 죄를 덜 짓는 방법입니다.
이건 교회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의 양심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범하는 살인, 간음, 도적질이라든가 어떤 윤리나
도덕적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으로 인해 시간이나 물질의 허비가 많고 분쟁이 많은 것은
마땅히 자신이 책임져야 될 일이지만, 사람이 망하는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굴비 엮듯이 엮어서 몰살시키는 행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이 진저리 치도록 미운 이유는 에덴부터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로 수많은 영혼을 학살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자입니다.
유대인들의 행위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모범수들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일단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만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아주 특수 악질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은 평생 모범적으로 사역을 했노라 하는 분들이 스러져
중병을 앓거나 거동이 불편해서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홀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는 본인의 구원에 문제가
있고 그 어설픈 말씀으로 평생 많은 영혼을 실족하게 한 죄 때문입니다.
저는 1988년부터 99년까지 11년만 교회 담임을 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대로 그 때의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설익은 풋과일과 같은 저 같은 사람이 온전한 복음의 진리를 전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들이 어찌 하고 있는지 미안한 마음에 때론 등에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합니다. 젖먹이를 두고 떠난
어미의 마음으로 스쳐간 시간들을 뒤돌아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