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는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118만 파운드(약 23억 6천만 원)에 팔렸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스웨덴의 음악재단이 소장하고 있던 이 악보가 경매에 부처지게 된 것은 음악 진흥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였다. 당시 소더비 측은 한 개인 입찰자가 전화를 통해 118만 파운드를 불러 악보를 매입했다면서, 한두 장 일부가 아닌 현악 4중주곡 전체(31쪽)를 담은 자필 악보가 경매에 나온 것은 십여 년만에 처음이라고 전했다. 악보에는 베토벤이 일부를 지우고 수정을 가한 대목들이 포함돼 있어 작품 완성을 위한 베토벤의 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곡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2번 E플랫장조]였다. 현악 4중주 11번 ‘세리오소’(1810)는 확실히 베토벤의 중기 현악 4중주에서 벗어나 양식상 커다란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 베토벤에게 현악 4중주는 없었다. 발표만 안한 것이 아니라 작곡에도 손을 놓고 있었다. 베토벤이 다시 현악 4중주 장르로 돌아온 것은 50세 초반. 대작 [함머클라비어]를 비롯한 피아노 소나타 작곡이 모두 끝나고 실내악 주요 작품도 모두 나온 뒤인 1823년 [교향곡 9번]과 [장엄 미사]를 작곡하던 시대였다. 이후 Op.127, Op.130, Op.131, Op.132, Op.135 등 다섯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게 됐는데, 우리가 베토벤 만년 예술의 심오함을 이야기할 때 그 증거로 대는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0년 간의 긴 침묵을 깨고 발표한 현악 4중주 그렇다면 베토벤이 10년의 긴 침묵을 마치고 다시 움직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갈리친 후작이 작곡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음악애호가이자 귀족이었던 갈리친 후작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4중주단을 조직해 자신이 직접 첼로를 맡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연주가이기도 했다. 1824년 말경 베토벤은 갈리친 후작으로부터 현악 4중주 두세 작품을 써달라는 의뢰를 1825년까지 그는 작곡 순서대로 12번 Op.127, 15번 Op.132, 13번 Op.130 등 세 곡을 작곡했다. 그 중 한 곡은 적어도 1822년쯤 대략 구상을 끝냈던 것으로 보인다. 1822년 6월 베토벤의 서신 중에 ‘가까운 시일 내에 현악 4중주를 출판할 것 같다’는 말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향곡 9번]의 마무리에 바빴던 베토벤은 1824년 우선 이 [합창 교향곡]의 초연을 마치고 나서야 현악4중주 작곡에 착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마침 그 때 갈리친 후작으로부터 의뢰가 들어왔다. 후작을 위한 첫 번째 4중주 작품인 12번 Eb장조는 1825년 2월 완성되어 3월 6일, 슈판치히 4중주단에 의해 초연됐다. 베토벤의 후기 양식은 더 깊고 원숙해진 음악성, 형이상학적 사색을 반영한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현악4중주 12번]은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관문과도 같은 작품이다. 구석구석 깊은 사색과 환상으로 가득차 있다. 구조적으로 딱딱하게 구획된 중기 4중주와는 달리 부드러운 선율이 성부 사이에서 번갈아가며 노래하고 진행되는, 형식의 진화와 차원 높은 고매함이 엿보인다. 고전의 틀을 녹이는 낭만성, 죽음에 대해 초탈해진 만년의 인생에 대한 사색은 이 현악4중주라는 형식에서 있어서 괄목상대할 진보였다. 그 아득한 예술성은 이후 어떤 작품도 근접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을 비롯한 후기 현악4중주의 명곡들은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이 새로운 창작의 세계를 개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동안 베토벤에게 쌓이고 쌓인 성숙한 음악적 콘셉트가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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