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BM의 딥블루(Deep Blue)는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겼다. 알파고는 이세돌과 치른 다섯 경기에서 네 번 이기고 한 번 졌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계에 지거나 뒤처지는 것은 필연적일까. 그 점을 걱정해야 할까. 음악은 인간이 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해방구일까.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꾼다’는 것이 백남준의 방식이었다.
인공지능 말고도 인간을 압도했던 기계는 많다.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가 우리보다 빠르다고 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보며 날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비행기와 자동차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는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불안감이 없어졌을 수 있다.
사실 자동차 기술은 우리의 달리기 능력을 분석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다. 자동차 기술자들에게는 치타의 달리기 능력조차 큰 의미가 없다. 자동차는 육상에서 이동하는 비생명적 개념, 즉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구현한 기계다.
비행기도 독수리의 날기 능력과 무관하다. 그러니 애초에 자동차와 비행기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은 우리와 다르고, 우리를 이기려고 개발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도와주려고 개발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동차와 경주해 이길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해볼 수는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뒤쫓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자동차가 달리는 길을 따라 달리지 않는다. 구시가지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지붕을 건너뛰며 자동차가 우회할 때 직진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자동차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달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이겼다!
인간이 자동차보다 느리다는 관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자동차와 인간이 참여하는 경주의 한 방식을 전제할 때만 옳다. 끝이 보이는 직선 코스에서 자동차와 인간이 같이 출발해 목적지까지 누가 더 빨리 도착하는가를 겨루는 게임. 게임 방식을 바꾸어보자. 위에서 소개했던 할리우드 영화의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이 이길 수 있다. 생각을 좀 더 해보면 인간이 자동차를 이기는 경기 방식들이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이길 수 있을까
바둑은 어떨까. 다른 규칙들은 모두 동일하고 단지 더 커져 집이 많아진 정사각형 바둑판 네 면에 기사 네 명이 참여하는 경기를 상상해보자.
인간 세 명과 알파고의 수를 대신 두는 또 다른 한 명이 참여한다. 세 명은 대 알파고 연합전선을 펼친다. 두 명이 알파고가 집 짓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한다. 알파고의 공격으로부터 엄호를 받는 다른 한 명이 집을 많이 지어 최종 승자가 된다. 알파고를 방해한 두 기사는 3위와 4위를 한다. 운이 좋으면 2위와 3위, 혹은 4위를 할 수도 있다. 이들은 1등을 한 이가 받은 상금을 분배받는다. 애초에 알파고를 방해하기로 작정한 이들이 알파고의 대응에 따라 경기 도중에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협동하고 연대해 절대 강자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협동과 연대가 실행될 수 있도록 게임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바둑 경기가 항상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한국 양궁이 강해서 세계양궁협회는 국제 양궁 경기 방식을 계속 바꾼다. 이 경우엔 우리 한국 대표팀이 계속 승리하긴 한다. 선사시대 조상들도 경기 규칙을 바꿔 매머드를 사냥했다. 1대1의 경기에서 1대다(多)의 경기로 말이다. 오늘날 정글에서도 사자가 치명적인 몽둥이 같은 긴 다리를 휘두르는 기린을 혼자 공격하지 않는다. 떼거리로 공격해 죽인다. 정치판에서 2등과 3등이 연대해 1등을 이기는 건 너무 흔한 일 아닌가.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의 역사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백남준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독일로 가 공부를 계속했다. 그가 일본과 독일에서 했던 공부는 다름 아닌 작곡이었다. 그렇게 작곡을 공부해 작곡가로서 음악작품 몇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독일에 다름슈타트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실험적인 현대음악의 메카가 된다. 당대 가장 유명하고 인정받는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이곳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에서 강의를 했다. 백남준은 이곳에서 최신 현대음악의 흐름을 꿰뚫는 경험을 한다.
백남준이 이곳에서의 경험과 이후 그가 다녔던 독일 음악대학의 졸업장에 만족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귀국해 서울의 명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65세에 정년퇴직하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어 타계하기 전까지 적지 않은 연금으로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가능성은 아마도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고.
청년 백남준은 그런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술가로서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동양인도 가지지 못했던 탁월한 인지능력을 가졌던 그조차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실험적 현대음악계였다. 수많은 천재로 이미 가득 찬 수백 년 전통의 유럽 음악계에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일찌감치 오르지 못한 변방의 음악가들은 새로운 길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음악계에도 혁신가, 즉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있고,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있는데, 백남준은 음악계에서 혁신가가 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음악계를 떠난다. 그렇다고 미술계나 연극계로 간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예술 영역을 창시한다. 비디오 아트. 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유럽과 북미 예술가들과 미학자들에게 분명한 인정을 받는다. 그런 정도의 인정을 받은 한국인 예술가는 지금까지 없다.
규칙을 바꿔 성공한 백남준과 존 케이지
백남준은 어떻게 그처럼 창의적인 생각을 했을까. 선배가 있었다. 백남준만큼이나, 아니 백남준보다 더 대책이 없던 혁명가 존 케이지를 비롯한 당대의 괴짜 예술가들이다. 오늘날 현대 미국 작곡가로 알려진 케이지는 처음엔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했다. 명문인 이 대학을 케이지는 곧 중퇴한다. 애초 그의 꿈이었던 작가가 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케이지는 훗날 대학 중퇴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백 명이 넘는 동급생이 도서관에서 똑같은 책의 복사본을 읽고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갔다. 책 더미 속으로 들어가 Z로 시작하는 이름의 저자들이 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이러한 사실이 학교 교육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나의 신념을 강화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학교를 떠났다.”
케이지는 작곡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정립한 혁신가다. 기존 개념이 요구하는 지식들을 학습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대표적인 것이 화성학이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음악대학 혹은 음악과의 작곡전공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가르치는 것이 화성학이다. 그런 화성학 학습을 케이지는 거부했다. 이것에 관해 케이지가 한 말을 들어보자.
“내가 (현대 작곡가로 유명한) 쇤베르크와 2년간 공부한 후 그가 나에게 말했다. ‘작곡을 하려면 당신은 화성학 혹은 화음에 대한 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곧바로 그것에 대해 내가 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심각한 걸림돌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그 걸림돌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럴 경우 나는 온 힘을 다해 내 머리로 그 벽을 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케이지에 비하면 아카데믹한 공부를 제대로 했다. 케이지는 정말이지 음악계, 특히 작곡계의 이단아였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는 전통적 강자들이 따르는 지식의 학습을 거부하며, 그런 지식이 전혀, 혹은 거의 필요 없는 새로운 개념 세계를 개척했다. 불확정성의 작곡 혹은 우연성 음악이 그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케이지는 또한 백남준에게 영향을 줄 만한 행위예술을 했다. 무대 위에서 이상한(!) 짓거리들을 하며 예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내용도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오늘날 케이지는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인물로 분명히 기억되고 있다. 음악대학에서의 석사, 박사 학위는 물론이고 학사 졸업장도 없는 이가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여러 작품의 작곡 의뢰를 받아 많은 작품을 작곡해 돈도 꽤 벌었고, 이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연주되고 있다. 성공한 인생이다.
모든 곳에 필요한 창의적 개념
▎화성학을 거부한 작곡계 이단아였지만
‘불확정성의 작곡’이란 새로운 개념으로 성공한 존 케이지.
백남준과 케이지가 평지돌출한 인물만은 아니다. 이들은 서양 음악사가 기억하고 있는 숱한 혁명가 중 두 사람일 뿐이다. 혁명가들은 음악에서도 새로운 개념에 기초해 새로운 길을 갔다.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낸 이들이 퍼스트 무버다. 패스트 팔로어도 있긴 하다.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작곡하는 인공지능이 세상에 등장했는데, 그 기계들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들이야말로 전형적인 패스트 팔로어였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참여한 음악 분야야말로 새로운 개념들의 각축장이자 무덤이기 때문이다.
백남준과 같은 실험적 현대음악가들만이 아니다. 대중음악계도 따지고 보면 창조적 개념들의 난장판이다. 혜성같이 새로 등장해 사랑받는 대중 음악가들은 사실 신개념을 제시한 이들이다. 비틀즈가 그랬고 마이클 잭슨이 그랬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랬고 BTS도 그런 친구들이다.
인공지능 컴퓨터 및 자동차를 이기는 길과 인간과 인간의 대결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길에서는 결국 같은 것이 요구된다. 개념적 의미에서의 창의성. 인간이 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해방구로 음악을 생각하는 것은 퇴행적일 뿐이다. 인간과 기계 모두 창의적 개념에 따라 행동하고 작동한다. 창의적 개념들을 창조할 동력인 창의성을 알아야 한다. 그게 뭘까?
김진호 안동대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