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날은 매서운 추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추위는 거센 바람과 함께 찾아왔는데 내가 사는 산속은 큰 파도가 밀려들듯이 바람소리로 웅웅거렸고 간간이 눈발이 휘날리기도 했습니다. 한 해의 막바지가 되면 마음도 썰렁해지는데 매서운 추위와 함께 바람마저 휘몰아치니 산골 어디에도 평화로움은 찾을 수가 없었기에 어수선하고 뒤숭숭하기만 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성난 사자처럼 때로는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이런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맑은 새소리가 귀청을 간지럽히며 새벽부터 잠을 깨우기도 하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는데 산 중턱을 휘감은 안개구름이 신비로워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거든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때면 산속이 온통 연초록의 꽃들이 만발한 듯 황홀경에 젖기도 하고 단풍으로 물든 가을 산에 오후의 햇살이 화사하게 퍼지면 산빛이 너무 그윽해서 혼자서만 본다는 것이 안타까울 때도 있거든요. 겨울이라도 흰 눈이 펑펑 내려서 산속이 설국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천국이려니 하는 착각에 젖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풍경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감흥에 젖기도 하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와 어울려서 때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연출하는 그림과 음악은 누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누구나 저절로 느낄 수 있기에 가슴이 촉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대학 동창들의 밴드 모임이 요란하게 울려대기에 핸드폰을 들여다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떤 동창이 올린 글이 있었는데 조금 짠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자신의 결혼식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친한 친구라 한참을 애타게 기다렸는데도 친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예식이 시작되려는 그때, 친구의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나타나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축의금 만 원과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습니다. 리어카로 과일 행상을 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살아가다 보니 친구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또 행상에 나서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축의금 만 원은 전날 종일 추위에 떨면서 올렸던 수익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독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동창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그중에 "말러 4번 메조가 떠오른다"는 글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쁜 날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나기도 하고 슬픔을 못 이겨서 눈물을 쏟으며 천진난만했던 동심의 한때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그 동창이 느끼는 기분이 궁금해졌습니다. 말러 교향곡 4번은 구스타프 말러가 1899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한 교향곡이었습니다. 네 번째 악장에서 소프라노의 독창이 등장하는데 말러는 그의 악보에 이런 글을 적어놓았습니다. "행복한 어린아이가 노래하듯 부를 것, 그러나 절대로 우스꽝스럽게 어린아이 흉내를 내지 말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러의 교향곡에서 '에디트 마티스'의 소프라노 독창을 듣고 천사의 목소리 같았고 대지에서 소리 없이 돋아나는 어떤 기운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또 눈을 감고 들으면 풀과 나뭇잎이 살랑이는 초원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왈츠 리듬에 몸을 맡기고 너울너울 춤을 추는 소녀가 보인다고도 했습니다.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서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말러의 교향곡을 몇 번 들어봤습니다. '에디트 마티스'의 소프라노 독창이 감미롭기는 했지만 소름이 돋기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가곡이나 가요의 열창은 귀에 거슬리지 않아서 가슴 깊이까지 그대로 전달이 되는데, 이탈리아 여자의 소프라노 독창이라 말 뜻을 알 수 없으니 조금은 막연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내게는 가곡이나 가요가 제격인가 봅니다.
산속에는 수많은 새들이 울어대지만 새소리는 계절마다 다르게 들려옵니다. 따스한 봄날은 수많은 새들이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합창을 하고, 가을에는 다소 뜸하게 간간이 들려옵니다. 내 가슴에 더 깊이 와닫는 새소리는 단풍으로 물든 어느 가을날의 해거름에 들었던 적막 가운데 들려왔던 청아했던 새소리였습니다.
귀로 듣는 음악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그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어느 여류 화가는 서양미술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우리나라 전통의 그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양의 그림을 그만두고 한국 불교의 탱화며 전통의 그림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고 개인전도 개최하면서 독보적인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이라는 딱딱한 학문을 공부했던 대학 동창 중에 틈틈이 그림을 그려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동창이 얼마 전에 자신의 그림을 사진 찍어서 밴드에 올렸더군요. 담벼락을 타고 오른 붉은 줄장미와 잘 익은 포도송이가 탐스러운 그림 두 점이었는데 모두 수채화였습니다. 보기에도 거칠지 않았고 구도도 좋았습니다. 머지 않아서 개인전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데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먹고산다는 일상적인 활동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왔다니 보기에도 참 멋있지 않습니까?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리는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는 날씨지만 어젯밤에는 휘영청 달이 밝았습니다. 아직은 타원형으로 상현달에 가까웠지만 머지않아서 둥글고 환한 보름달로 떠오를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면 이 깊은 산속에서, 이렇게 매서운 한파 속에서 휘영청 보름달이 밝을 것입니다. 얼마나 환상적이고 가슴 찡한 일입니까? 올해의 마지막 보름달을, "월백설백 천지백"의 멋진 풍경을 가슴 가득히 담아 두어야겠습니다.
그날은 새벽에도 산속이 훤하게 밝았습니다. 커튼 사이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니 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온통 산이 하얗게 변해있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고 상큼하게 다가왔습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마당으로 나왔더니 보슬보슬한 함박눈이 3센티쯤 쌓여있었습니다.
그길로 아침 산책을 나섰는데 개울가에는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이 눈 속에 우뚝 서있었습니다. 홍수로 흙이 쓸려나가고 뿌리가 드러난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가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열악하고 어려운 처지와 환경을 이겨낼수록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비관하지 말고 더 용기를 내라고 말입니다.
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꿋꿋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지요? 서쪽 하늘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던 눈썹 같은 초승달도 둥글고 환한 보름달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성장하고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사는 게 별거냐고 말들을 쉽게 하지만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으며 음악가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림과 음악의 작품완성을 위해 오늘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한 폭의 작품처럼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아세요? 초승달이 아니라 보름달에 가까울수록 달은 더 찬란하고 밝은 법입니다. 우리도 삶을 통해 자기완성에 가까울 수 있도록 열정을 쏟고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일 행상을 하는 젊은이도 그렇게 아등바등 자기완성으로 가고 있었으며 그림을 그리는 대학 동창도 그렇게 자기완성으로 가고 있을 것입니다. 나 또한 흔들리지 않을 가치관과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산속에서 살고 있었을 텐데, 그 길이 바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길이라 믿었겠지요.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도, 권력을 손에 쥔 정치인도 돈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재벌도 열정을 쏟으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데 바로 그 길이 자기완성으로 가는 길이라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눈이 내린 산속의 오솔길을 걸어서 편의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눈이 내린지 하루가 지났지만 쌓인 눈은 그대로였습니다. 한겨울의 추위에 계곡물은 곳곳이 얼어붙었고 산도 눈으로 단장했습니다. 그런 풍경은 더없이 깨끗하고 신선했습니다. 아무런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해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좋은 그림도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겠지요? 그저 듣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과 감동이 느껴지는 그림과 음악이 완성에 보다 가까운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을 것입니다. 한 집의 가장이라면 그 가정에 기쁨과 행복을 주어야 하고 또 정치가나 기업인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어야 자기완성에 가까운 것으로 그것이 올바른 삶의 길일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주춧돌이 있어야 하듯이 자기완성의 길에도 반듯이 동반되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일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에 문제가 없고 도덕적으로도 건전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 열정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는 자신의 삶이 완성에 가까울게 틀림 없을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그림이나 음악으로 작품을 완성시켜서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정치인이나 기업가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함으로 우뚝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이 거대하고 불변의 법칙.
여기에는 예술가이든 일반인이든 예외가 없었습니다. 초승달이 상현달이 되고 마침내 둥글고 환한 보름달로 떠오르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것이 궁극적이고 올바른 길이겠지요. 열정과 정성을 쏟다 보면 마침내 거칠지 않게 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이 되지 않겠어요?
사람들은 사는 게 별거냐고 말들을 하지만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은 결코 별거 아닌 것이 아닙니다.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기에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잎이 나서 꽃이 피고 그 열매가 맺기에도 봄과 여름을 지나며 폭풍우를 겪기도 하고 따뜻한 햇살도 필요합니다. 하물며 어설픈 한 인간이 태어나서 미완성이 완성에 이르는 길이 쉬울 리가 있겠어요?
나는 오늘도 자신에게 돌아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도대체 나는 내 인생 어디쯤 와 있을까 하고요.
월아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한해가 끝자락에 왔네요
추위도 장난이 아닌데
오늘도 활기찬 시간들 되시길요 ^^
@월아 서울에는 언제 오시나요?ㅎㅎ 추위 조심하시고 건강하셔요^^
@홍콩 조만간에 산행참석 한번 해야지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