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溫故知新) 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사용된 맥락과 진정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먼저 이 말은 공자가 한 말로서, 그것은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위정11)라는 간단한 문장 가운데 들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온고지신이란 말은 교사됨(爲師)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교사(또는 스승)와 온고지신이 상호관련이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럼 그것이 어떻게 상관되는가? 또 공자의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위정11은 논어 위정편 11장을 가리킨다. 이후의 표현 방식 또한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이 문장은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로 풀이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고지신이 있어야 한다. 또는 '온고지신이 안되면 스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온고지신은 스승의 자질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교사의 자질이 교육의 수준을 가늠한다. 그리고 교육 현실은 항상 자질이 훌륭한 교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진술은 너무도 당연한( 또는 새삼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은 공자가 한 말의 원래 뜻과 다르다. 그와 같은 오류는『논어』에 대한 이른바 권위 있는 주석의 영향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불충분한 교사관에도 기인한다고 하겠다. 과연 누군가 온고지신한다면 그는 교사가 되기에 충분한가? 도대체 온고지신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한 본래의 취지는 무엇인가? 논어의 이 구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사의 길에서 우리는 교사의 참된 자질에 대하여 바른 이해와 전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본 고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차례로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인류의 스승으로 길을 걸은 공자의 교육적 삶을 살펴보고, 온고지신과 교사됨에 있어서 공자가 한 말 뜻이 무엇인지 알아 볼 것이다. 끝으로 그것이 교사 자질의 향상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Ⅱ. 공자의 교육적 삶
공자는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이다. 노 나라 동쪽은 낮은 산과 언덕이고 서쪽은 평원이며,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가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다. 노 나라 동북쪽에 웅거한 태산(泰山 또는 太山)은 아주 높고 험하며 그 생김새도 다채롭다. 맹자(진심장 상24)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여기서 태산은 성인의 도(聖人之道)가 위대함에 비유된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 나라가 작다고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가 참으로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공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노 나라 문화이다. 노 나라는 주(周) 왕조의 명성 높은 정치가 주공(周公)의 봉지였다. 그곳은 주 나라의 천자(周天子)와 동등한 규격과 수량의 예기와 악기 및 기타 문물을 얻어 낙읍 동쪽에서 유일하게 인문이 풍성한 지역을 이루었다. 빛나는 문화는 청소년기 공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문장을 즐기고 그것에 도취하도록 하였다(임계유, 1993: 153-4)
『사기(史記)』와『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공자가 태어난 것은 노 나라 양공 22년(B. C. 551) 양력 9월 28일이다. 출생 년도에 관해서 이견도 있다.『공양전(公羊傳)』과 『곡양전(穀梁傳)』에는 양공 21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사기』의 기록을 따른다(박영진, 1999: 23). 공자의 선조는 송(宋) 나라 귀족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노 나라로 와서 살게 되었다. 공자는 부친 숙량흘(叔梁紇)과 모친 안징재(安徵在)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은 부인 시씨(施氏)와의 아홉 딸을 두었고, 첩을 얻어 아들을 하나 얻었지만 발이 불구였다. 숙량홀은 생전에 성한 아들을 갖고 싶어서 공자의 모친 안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이는 모친이 이구산(尼丘山)에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 낳기를 기도 드린 바 있었고 공자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가계는 훌륭했지만, 공자가 태어났을 당시의 집안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었다. 세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더욱 어렵게 살았다.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그는 비교적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자는 아이 때 언제나 제기(祭器)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소꿉놀이를 하였다."(『사기』공자세가)는 일화도 있다. 공자가 가지고 놀았던 제기는 노 나라의 대부 신분이었던 부친이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차주환, 2000: 55).
또한 공자는 잡다한 일을 하며 생계를 도모했다. 뒷날 "나는 어려서 빈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알게 되었다"(자한6)라고 말 한 바 있다. 창고의 출납(委吏), 가축의 관리(乘田) 등 번거롭고 고달픈 하급 관리로서 하는 일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했다(『사기』공자세가). 19세에 송나라 출신 '견관'의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여 다음해에 아들 이(鯉)를 낳았다. 공자의 아들은 아버지 보다 앞서(공자 69세) 죽었지만, 맹자의 스승이자『중용』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자사(子思)를 낳았다. 공자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인 공야장(公冶長)을 사위로 삼았다. 공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봉양하면서 이복형의 가족을 돌보며 살았다. 그는 24세 때 모친상을 당했고, 66세 때 상처(喪妻)를 했다(정후수, 2000: 7).
가난한 가운데 공자 또한 주 나라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강한 학구열을 가졌다. 뒷날 공자가 말하기로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위정4)고 했다. 학문 성취를 지향한 결의가 15세가 되어서 확고 부동해진 것이다. 공자가 뜻을 둔 학문은 대체로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차주환: 58-60). 첫째로 심성의 도야로서 고매한 인격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도덕적 수련을 의미한다. 둘째로 육예(六藝: 詩·書·禮·樂·射·數)가 공자의 학문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셋째로 공자의 학문은 고대의 전적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공부가 중심이었다. 넷째로 공자의 학문은 천하 만대를 위한 이상적인 정치제도를 확립하는데 중심을 두었다. 보다 간단하게 이기동(1994: 22)은 공자의 학문 목적을 개인적, 정치적 두 측면에서 요약한 바 있다. 즉 개인적으로는 인의예지에 바탕한 개인 윤리를 확충해서 이상적인 인간형인 군자에 이르는 길을 깨우쳐 주고자 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요·순·우·탕·문왕·무왕의 도를 이어받아 도덕을 기초로 꽃피운 문물 제도를 되살려 조화롭고 질서 있는 세상을 재현하고자 했다.
'공자에 있어 인간이란 배움의 존재이다. 그는 학문을 통해 도덕적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남에게 인정받거나 출세하기 위한 배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도덕적 향상을 위한 공부야말로 진정한 공부이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상에 대한 경륜도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박희병, 1998: 12)
공자에게는 사제관계를 가졌던 스승이 일정하게 없었다. 계찰, 담자, 정자산, 노담, 장흥 같은 인물을 만나거나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배우기를 계속했다. 제자가 말하기를 "저의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든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 어찌 일정한 스승을 가지고 계셨겠습니까?"(자장22) 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라도 배웠다. 사람들의 선한 점은 따르고 선하지 않은 점을 보면 자신을 바로 잡았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술이21)는 생각으로 학문과 인격의 향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점차 명성이 높아갔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노공(魯公)이 잉어 한 마리를 공자에게 보낸 적이 있다. 아들 이름을 리(鯉)라고 부른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공자는 20대 초부터 그의 명망을 사모하여 그를 문하에 모여든 제자를 거느렸다. 27세 때 노나라를 방문한 담자를 찾아 중국고대 관제에 대해 묻고 배웠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충직하고 용맹했던 자로가 공자를 수행했다(차주환: 76)
서른 살에 이르러 공자의 학문은 단단한 토대를 갖춘다. 스스로 말하기를 "30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위정4). 30대 초반 주 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으며, 그곳의 대부로 있던 장홍에게 악(樂)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바 있다(차주환: 89). 주나라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되어 노 나라에는 큰 변란이 일어나, 공자는 치국 평천하의 희망을 품고 혼란한 고국을 등지고 제 나라로 떠났다.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모인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위의 책: 95). 제 나라의 군주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자식을 자식다워야 한다"(안연11)라고 말했다. 경공은 공자를 좋아하였으나 나라를 바로 잡아 나가려 하지 않고 사치와 방탕의 생활을 계속했다. 공자는 일년 정도 제 나라에 머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36세). 그 후 10년 남짓 공자의 행적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노 나라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적을 연구 정리하는 일을 했으리라 믿어진다(차주환: 103)
공자가 제 나라에서 노 나라로 돌아왔을 당시 계평자(季平子)가 무도하게 군주 소공을 몰아내고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어서 계씨의 가신 양호(陽虎)와 공산불뉴가 손을 잡고 계씨 집안을 뒤집어버리고 실권을 장악하려는 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 모두 공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위의 책: 105).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공자는 더욱 분발하여 학문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 무렵 공자에게 벼슬에 오르는 자그마한 기회가 주어졌다. 노 나라 정공이 공자에게 군주의 직할 아래 있는 소읍인 중도의 읍재(中都宰)를 맡겼다. 51세 되던 때이다. 전해지기로는 중도에서 일년간의 행정 치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민심이 순해졌고 다른 고을들이 본받을 정도로 사회의 질서와 안정이 잡혔다. 공자의 능력을 신뢰한 정공은 그를 사공(司空)에 임용했다. 지금의 건설부와 농수산부의 직책 일부를 겸한 직무였다. 사공에 취임해서 직책을 잘 수행했음은 물론이고 약화된 군주의 명분과 실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정공은 다시 공자를 대사구(大司寇)에 임명했다. 나라의 옥송(獄訟)과 형벌을 주관하는 장관으로서 공자는 소신에 따라 어김없이 직책을 수행해 나갔다(위의 책: 110). 공자가 국정에 참여하여 노 나라의 기강이 확립되고 안정된 사회가 되어가자, 그의 정치 혁신에 위기를 느낀 인접국 제 나라는 노 정공과 계환자가 공자를 소외시키도록 만드는 술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결국 공자는 벼슬자리를 내놓고 54세 겨울 고국을 떠났다. 이때부터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임금을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차례의 곤욕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13년 간의 주유(周遊)는 이미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상가로서 명망이 높았다. 뛰어난 학문과 심오한 사상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처지였으므로 찾아간 곳마다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이기동, 1994: 26).
노 나라는 오래 전부터 공자를 떠나게 한 데 대해 뉘우치고 명분을 세워 공자를 맞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실력자들 사이에 나돌았다. 계강자는 폐백을 갖춰 공자를 맞아들였다. 애공 11년겨울 14년 만에 그는 68세의 나이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노 나라에서 공자는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 자신도 벼슬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했으나 공자는 노 나라에서 국가 원로의 예우를 받으며 군주와 중신들의 자문에 응했다. 67세 되던 해, 외아들 리(字는 伯魚)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사망했고, 다음 해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顔淵)이 죽고 말았다. 만년의 공자는 전적 정리 사업과 제자 교육에 더 한층 힘을 기울였다(차주환: 150).
공자는 노 애공 16년(B. C. 479년) 4월 73세로 세상을 떠나서 노성(魯城)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공자묘가 있는 사수는 현재 산동시 곡부시에 위치하는 데, 오늘날 이곳을 공림(孔林)이라 부른다(이기동, 1994: 27). 그의 덕을 사모하여 그 주변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백여 가구나 되었다. 제자들 모두 삼 년 동안 심상(心喪)을 입고 헤어졌다.『사기』(공자세가)에 이르기를 제자의 수가 3천명이 넘었으며 그 중에 육예에 통달한 자만해도 72명이나 되었다(차주환: 182).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교육적 삶을 회고하여 성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한 바 있다. 후세에 와서 흔히 15, 30, 40, 50, 60, 70대를 각각 지학(志學), 이입(而立), 불혹(不惑), 지명(知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라 부르는 것은 공자의 표현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열다섯 살 때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학문과 처세에 있어서 혼자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고, 마흔 살에는 판단에 혼란이 생기는 일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는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을 금방 알 수 있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위정4).
Ⅲ. 온고지신의 참된 의미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으시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시다. 바라보면 앞에 계시더니, 어느덧 뒤에 계시도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글(文)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해 주시니, 그만 두려 해도 그만 둘 수가 없다. 이미 나의 능력을 다하였는데도 다시 앞에 우뚝 서 계시는 것 같으니, 비록 따르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따라야 할지 모르겠구나."(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然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未由也已: 자한10).
이 말은 제자 안회(顔回: 자는 自淵이며 흔히 顔淵이라고 부른다)가 공자의 인품과 덕망에 감탄하면서, 스승의 도가 다가 갈 수도 파악할 수도 없을 만큼 높고 무궁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 끊임없이 학문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고 했다. 글로써 지식을 넓혀주고 예로써 행동을 단속해 주는 분으로 보았다. 이는 '박문약례(博文約禮)'로 표현된다. 문화와 전통을 수록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성취하고 그 정수를 파악하여 제도와 규범의 현실에 맞게 요약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도리를 바르게 실천하려면 박문약례가 요청된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공자의 말이다.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요약하여 실천한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옹야25 또는 안연15).
이 글에서 고찰할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박문약례'의 일면 또는 그 접근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온고지신의 뜻을 살펴 보자. '온고지신'이란 공자가 스승 됨(爲師)에 관련하여 언급한 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논어』에 한번 나와 있을 뿐이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위정11).
그런데 이 말은 대부분의 경우 교사의 자질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 예는 대단히 많은데, 몇 가지만 들어 본다. "故를 溫하여 新을 知하면 可히 써 師가 됨직하다"(이원생).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김종무). "옛 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됨직하니라"(미야자키 이치사다). "옛 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내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정후수). "이미 배운 것은 충분히 익히고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워서 알게 되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박기봉). "옛 것을 잊지 않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홍승직). "이미 배운 것을 익숙하도록 복습하여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남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차주환). "옛 것을 온양하며 새 것을 만들어 낼 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김용옥).
이러한 해석은 주자(朱子) 등의 논어 주석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랜 논어의 주석서는 위(魏) 나라 하안(何晏) 등이 쓴『논어집해(論語集解)』이다. 이 책은 양나라 황간(皇侃)이 쓴『논어의소(論語義疏)』를 통하여 후세에 전해졌다. 송나라 때 황제의 칙명을 받고 형병(邢昺) 등이 하안의 주석을 다시 풀이하여『논어주소(論語注疏)』를 썼다. 논어 해설에서 가장 권위를 지녀 온 주자의『논어집주(論語集注)』는 형병의 주석서를 바탕으로 고인들의 여러 해설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다(이기동, 1994: 15-16) . 그밖에도 논어 연구서는 뒤이어 수십 종 나왔다. 다음은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에 대하여 주자가 내린 풀이다.
온은 찾고 연구하는 것, 고(故)는 옛날에 들은 것, 신(新)은 지금 얻은 것이다. 때때로 옛날에 들은 것을 익혀서 매양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있으면 배운 것이 바로 나에게 있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응답할 때에 어떤 질문이든지 막히지 않으므로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억하고 묻기만 하는 학문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어 아는 것에 한계가 있다(정후수, 2000: 59).
주자에 따르면, '온고지신'이란 '예전에 들은 바(舊所聞)를 익혀서 매일 마음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今所得)'이다. 그리하여 어떤 질문이나 막힘 없이 응답할 수 있게 됨으로써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남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온고지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온고지신이 없다면 스승으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주자는 앞서 말한 하안과 형병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하안은 '옛 것을 연구하고 또한 새 것을 아는 것으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尋釋故者又知新者 可以爲人師)라고 하였다. 형병은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즉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곧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知新則可爲人師)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다산(茶山)은『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하안, 형병, 주자의 주석을 거부하였다. 비판적인 검토와 함께 주자의 견해를 보충하고 하안과 형병의 견해를 반박했다. 먼저 주자가 '고(故)란 옛날에 들은 것이며 신(新)이란 이제 깨달은 바이다'란 말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기를:
(공자 말씀에서) '可以爲師'란 말은 스승의 직책은 자못 해볼만한 일임을 가리킨다. 이미 식어버린 전에 배운 것을 이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됨으로써 '온고지신'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나에게 유익한 일이 아닌가! 사람으로서 스승이 됨직하다(可以爲師 謂師之爲職 頗可爲也 舊學旣冷 今以敎人之故 得溫故而知新 非益我之事乎 人可以爲師矣: 정약용, 1985: 58).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스승이 되면 溫故而知新하게 됨으로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기의 이익(益我之事)이 된다. 그러므로 스승 노릇은 힘들어도 충분히 할만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온고지신이야말로 스승 됨의 이익(爲師之利)이라는 다산의 견해는 주자 등의 견해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을호(1989: 199)는 다산과 주자의 학설은 동기와 결과의 전도이며 수미가 엇갈린 것이라 평한 바 있다. 이를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자
溫故知新〔원인〕 ⇒ 爲師〔결과〕
다산
爲師〔동기〕 ⇒ 溫故知新〔결과〕
그런데 주자의 설을 받아들인 김용옥(2001: 139)은 다산의 주장이 정당함을 일축한 바 있다. 그는 '다산의 해설은 매우 재미있지만, 자기의 체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했을 뿐 근본적으로 이 언명의 핵심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로 김용옥의 생각이 도리어 옳지 못하다. 다산은 스승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진솔하게 말한 것은 물론이고 공자가 말한 취지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다산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고, 그가 세운 학설은 탁견이다. 다산은 특히 형병이『논어주소』에서 '溫故知新則可爲人師'라 하여 '온고지신(溫故知新) = 위사(爲師)'로 파악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다음과 이유로 논박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스승의 길(師道)은 매우 광범한 것으로 단지 온고지신하는 한가지 일만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형병의 소(邢疏)에 삽입된 '則'이란 글자는 원래의 의미가 아니다. 이전에 배운 것들이 이미 식어버렸지만 늘 사람을 가르치는 까닭에 온고지신을 얻게 된다. 공자께서는 이를 이롭게 생각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다"(又按師道 甚廣不可但以溫故一事許之爲師 邢疏揷一 則字其義非也 舊學旣冷 每以誨人之故 得溫故而知新 孔子利此 而爲言夜: 정약용, 1985: 58).
공자가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 말한 것은 스승의 길에서 획득되는 온고지신을 이롭게( 또는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공자는,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식어버린 '옛 지식이 다시 데워지고 또 새로운 것도 알게 만드는 것'(溫故知新)을 좋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가르침 그 자체보다 자기개발에 더욱 더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다. 스승이 됨으로써 공자 자신의 교육적 성장에 있어 매우 유리했음은 분명한 한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은 '온고지신하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온고지신을 얻을 수 있기에 스승이 되는 것도 해볼 만하다'로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다산의 지적은 타당하다. 지금까지 검토한 주자와 다산의 견해차를 대조해 본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주자
온고지신하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다산
온고지신을 얻을 수 있기에 스승이 됨직하다.
다산이 그렇게 보듯이, 공자는 참으로 그 누구보다도 배움의 즐거움을 누렸다. 아는 것을 단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줄 알았다(옹야18). 그는 배우는 즐거움으로 식사조차 잊고 늙어 가는 근심도 모를 정도였다(술이18). 자기보다도 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으리라 자부하기도 한 인물이었다(공야장27). 공자는 자기수양(爲己之學)을 입신양명(爲人之學) 보다 근본적인 일로 앞세웠다(헌문14). 이런 관점에서 다산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위의 인용문에서 '스승의 길(師道)은 매우 광범한 것으로 단지 온고지신하는 한가지 일만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지적을 주목해야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다산의 말뜻을 충분히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그의 지적은 분명히 사실이다. 왜냐하면 해박한 지식(지성)은 사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에 있어서 도덕성 또는 실천성이야말로 지성(과 더불어 또는 지성)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는 덕행을 근본으로 삼고 글 배우는 일을 지엽적인 것으로 본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제자들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공손하고 신중히 행동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여러 사람을 아끼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실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第 謹而信 汎愛衆 而親人 行有餘力 則以學文: 학이6).
이러한 공자의 사상에 토대를 둔 다산의 지적은 앞에서 '박문약례'의 정신과 통한다. 스승의 길(사도)은 '박문'과 '약례'가 함께 요청된다는 점에서 온고지신하는 '박문' 하나로 충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Ⅳ. 온고지신의 교사
교사의 길에 있어 온고지신에 대한 공자의 생각은 우리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시사한다. 교직의 즐거움으로서 온고지신, 교양인으로서 교사, 교사의 윤리적 지성 등이 그것이다. 온고지신의 교육적 함의를 이러한 세 측면에서 각각 검토해 본다.
첫째로, 교사는 자기 자신의 지적 성장의 과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공자에 있어 온고지신이란 학문의 즐거움과 다르지 않다. 온고지신이란 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또는 자질)이 아니다. 공자의 경우 가르치는 일(교직)은 온고지신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 것이다. 교직이 좋은 이유는 교육활동 밖에 구체적으로 말해 교사가 됨으로써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성취 등에 있지 않다. 교육활동 안에 교사됨 또는 사도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직의 내재적 가치이다.
오늘날 사도는 위기에 처해 있다. 가정에서 학교와 사회에서 교육이 붕괴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교육과 교직의 수단적 또는 외재적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가정의 교육적 기능이 점점 취약해져 가고, 학교의 교사들도 이런저런 이유에서 교직이 만족스럽지 않다. 교직에는 여러 가지의 매력과 반매력이 존재한다(곽영우, 1997: 39-46). 또한 교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이유도 사람마다 다르다.
교육은 단지 지적 성취의 보람만을 추구하는 활동은 아니다. 그러나 Peters(1997: 42)가 논증한대로 인지적 측면은 교육의 개념적 기준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지식과 이해 그리고 모종의 지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온고지신의 길에서 지적 성장이라는 보람을 누렸던 공자는 '불혹'과 '지천명'과 '이순'과 '종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禮記』(학기편). 이 말은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즉 스승과 제자는 한쪽(스승)은 가르치기만 하고 다른 한쪽(제자)은 배우기만 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 역시 배움으로써 성장한다는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의 중심은 배움에 있다. 제대로 확실히 배우기 위해서는 가르쳐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부모와 교사들은 한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교학상장'이란 '남을 가르치는 것이거나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이거나 모두 나를 성장시켜 준다'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배우고 나서야 자기가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 보고 나서 자기에게 한계가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알게 되면 반성하고 노력하기에 결국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됨의 길에서 공자가 배움에 대해 말 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몇 개만 살펴보자.
① 묵묵히 마음으로 알고, 배움을 싫증내지 않고, 남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는 것. 이들 가운데 무엇이 나에게 있겠는가(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술이2).
② 배우는데 아무리 해도 따라가지 못하는 듯이 하고, 오히려 배운 것을 잃을까 걱정해야 한다(學如不及 猶恐失之: 태백17).
③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1).
문장 ①은 비록 겸손하게 완곡하게 말했지만 공자가 배움과 가르침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②는 공자가 배움에 있어 어떤 자세를 가졌는지를 알려 준다. ③은 배움의 기쁨을 감탄한 말이다. 여기서 보듯이 공자는 남을 가르치는 것보다 스스로 배우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아는 것' 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을 진정으로 즐거워했다. 그 자신의 이해와 안목이 넓어지는 교육적 성장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바로 이러한 자기 성장의 조건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스승의 직책이야말로 반드시 해 볼만한 일이라 한 것이다.
둘째로, 교사는 교양인이다. 온고지신에는 교양의 정신이 담겨있다. 교양 있는 교사는 조화와 균형을 소중히 여긴다. 온고지신은 옛것(고전 또는 전통문화)과 새것(신지식) 모두를 앎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활동이다. 교사는 옛것을 익히고(溫故) 새로운 것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킬 줄 알고(知新)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옛것은 새것을 이루는 바탕임을 잘 안다. 옛것만 많이 알아도 부족하고 오늘의 것만을 많이 알아도 소용없다. 왕충(王充)이『논형』(사단편)에서 부연한 해설은 흥미롭다. 그는 '옛일만 알고 오늘을 모르는 것'을 육지에서 빠져 죽는 것(陸沈)에 그리고 '오늘만 알고 옛일을 모르는 것'을 대낮에도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했다(김용옥, 2000: 141).
그런데 옛것과 새것의 균형을 얻고자 하는 교사라면 연암(燕巖)의 말을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문장 작성의 원칙을 논한 글에서 그는 온고지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그의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이념은 옛것과 새것의 변증법적 지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옛것의 단순한 모방과 보존도 잘못이며 새것을 만들겠다고 상도(常道)를 벗어나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연암은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융통성이 있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고전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초정집(楚亭集)의 서문에 실려있다.
'문장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일부 논자는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드디어 세상에는 본뜨고 모방하면서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 그렇다면 새로운 문체를 만든다면 옳은 것인가. 드디어 세상에는 괴탄하고 음란하여 편벽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 아아! 옛 것을 본받는 사람은 묵은 틀에 빠지는 것이 탈이고, 새 문체를 만드는 사람은 상도(常道)에 어긋남이 걱정이다. 진실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능히 변화시킬 줄 알고, 새 문체를 만들면서도 고전에 근거를 둔다면 지금 사람의 글도 고인의 글과 같을 것이다.'(박지원, 1997: 73-74).
공자의 학문적 태도는 흔히 복고적일 뿐이라 단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는 새것보다 옛것에 더 치중한다는 비난조의 지적이다. 김경일(1999: 33)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공자의 온고지신이란 것은 미래를 향한 발목을 묵는 '뒤돌아보기 문화'로 매도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하여 재빨리 그것을 알아내기에 힘쓰는 사람이다"(술이19), "배운 것을 전하고 새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술이1)라는 공자의 말은 복고주의적인 태도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김용옥은 우리의 삶에서 온고지신이 인용되는 맥락이 새로운 것보다 옛것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옛 것에 대한 존중,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통에 대한 길은 존중을 말할 때 꼭 이 말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온습(溫習)함으로써 역사로부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지혜를 발견하라는 맥락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온고지신"이라는 말은 대체로 유교의 복고주의에 대한 완곡한 정당화의 수단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김용옥, 2000: 139-140).
그러나 김용옥은 공자가 추구한 삶과 비전에 비추어 볼 때 그 중심이 옛(故)에 있지 않고 도리어 새로움(新)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홍우(2000: 393-400)가 의미를 분석한 바로는, 공자에게 '옛것'은 현재의 삶을 판단할 때 판단 기준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과거 즉 '논리적 과거'이다. 그것은 이미 흘러간 '시간상의 과거'가 아니다. 그리고 공자가 옛것을 좋아 한 까닭은 사욕의 무절제한 추구에 대한 제동장치로서 옛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옛것에 대한 공자의 태도에도 융통성은 있었다. 그는 옛것도 부당한 것이면 버리고, 오늘의 것이라도 옳은 것이라면 취하고자 했다(자한3). 더욱이 온고지신을 스승 됨의 보람으로 여겼던 공자를 두고 미래를 향한 발목을 잡는 복고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옛것과 새것의 앎에 대한 그의 의욕과 균형이 보인다. 이는 폭넓은 안목을 갖고자 함은 교양인으로서 스승의 마땅한 자세가 아닌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현실 위에 교양은 설자리가 없다. 한 가지만 잘하면 성공하는 시대다. 지금은 폭넓은 안목과 균형 있는 지식을 추구하는 교양과 교양교육은 인기가 없다. 대학은 직업교육이 교양교육을 몰아내고 있다. 현 정부가 21세기형 한국인의 모범으로 실용적인 인간형인 '신지식인'을 강조된다. 돈벌이가 되는 지식이 아닌 인문학, 예술, 기초과학 등 교양으로서 학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3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현행 제 7차 교육과정은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특히 고교 2,3학년의 학생들에게 교과목 선택권을 부여하고 있다(소경희, 2001: 58-63). 학교와 학생들이 학문과 지식의 균형 있는 학습을 도외시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이런 가운데 일부 교수들까지도 교양교육은 쓸모 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전공과목을 늘이고 교양과목 시간을 줄이기를 원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취직이 잘되는 학과와 학교가 좋은 곳이다. 직업훈련과 달리 교양교육은 전문가, 기능인, 기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교양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를 이해하고 관련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득렬(2001: 37)은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복권시켜야 하는 이유와 제도적 조건 마련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교양교육과 직업훈련은 병행되던가 교양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양교육은 세속적인 것들과 다소 거리를 두는 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직업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연한 축복 받은 인생의 기간이다. 이 기간을 보내는 젊은이들에게 그 누구도 돈을 벌거나 직업을 갖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가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기간을 주는 것은 훌륭한 인간과 시민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학 재학 중에 독서, 토론, 예술의 창조와 감상 등이 생활화되지 않았을 때 취업 후에 이러한 습관을 획득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교양교육의 바탕 위에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교육제도와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셋째로, 교사는 도덕적으로 탁월해야 한다. 지성은 교사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온고지신 은 교사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스승의 길(師道)은 매우 광범하므로 온고지신하는 한가지 일만으로 충족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온고지신은 사도의 일면에 불과하다. 스승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구별되어야 한다. 공자가 '스승'(師)을 직접 말을 한 것은 많지 않다.『논어』에는 세 차례 사용된 데 불과하다. 다음과 같이 다른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① 온고지신을 얻을 수 있으니 스승(師)이 되는 것도 해볼 만하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위정11).
②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스승(師)이 있다. 그들의 선한 점을 골라서 그것에 따르고, 선하지 않은 점을 골라서 내 자신을 바로잡는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술이21).
③ 인(仁)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스승(師)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 위령공35).
앞에서 검토한 ①은 스승의 보람이 지성적 만족과 성장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②와 ③은 스승의 의미와 역할은 도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들을 상호 관련시켜 생각하면 온고지신만으로는 사도(師道)가 허용될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에는 지성적인 면과 (그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측면은 사실상 교사의 길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있어 지적 이론 보다 윤리적 실천이 더 강조된다. 이는 앞서 논의한 바 있다. 온고지신의 의미와 방향에서 덕(인륜)의 이해와 실천이 중심을 차지한다. 공자의 배움은 도덕적 성장을 지향한 것이다.
스승은 그 자신이 군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또한 군자를 길러내는 사람이다. '군자'(君子)란 말은 공자교단에서 담론의 중심을 차지한다.『논어』에는 인(仁) 다음으로 많이 거론되어 있다. 무려 105번이다. 원래 군자란 말 그대로 군왕의 아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적 도덕적으로 탁월한 인물로 재구성했다. 제자들 앞에서 그 자신은 군자로서의 덕이 부족하다고 겸손하였다(술이32). 공자는 다양한 맥락에서 군자의 특성과 역할 등을 말했다. 몇 개의 문장을 통해 스승으로서 군자의 자질을 알아본다.
① 군자는 …… 자기 수양을 공경스럽게 해야 한다. ……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 자기를 수양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君子 …… 修己以敬 …… 修己而安人 …… 修己而安百姓: 헌문45).
② 군자는 배불리 먹기를 바라지 않고,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하지만 말은 조심스럽고,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 잡는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학이14).
③ 군자의 도(道)는 세 가지인데, 내가 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제자 자공이 말하기로 선생님께서 자신을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子貢曰 夫子自道也: 헌문30).
④ 군자가 인(仁)을 버리면 어찌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 긴급한 상황에도 반드시 그것을 유지하고 곤경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유지한다(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 ……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이인5).
이러한 공자의 말에서 확인되는 바는 다음과 같다. ① 군자의 기본 과업은 자기교육(修己)과 타인교육(安人 또는 安百姓)이다. ② 배움을 좋아함은 도덕적 성장 의지와 다르지 않다. ③ 군자의 개념에는 인자(仁者), 지자(知者), 용자(勇者)가 포함된다. ④ 군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도덕적 탁월성(仁)이다. 위에서 보듯이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군자(또는 교사)의 자질은 온고지신의 지성만으로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온고지신의 지성은 도덕적 실천을 지향하는 지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의 온고지신의 교사관은 건전성과 한계가 있다. 먼저 건전하다고 함은 배움의 즐거움을 교사됨의 기본 가치로 본 것, 옛것과 새것을 폭넓게 알고자 하는 교사로서의 교양 정신, 교사의 인격적 완성에 대한 믿음 등을 말한다. 그리고 한계가 있다고 말한 까닭은 직업교육의 전문성과 생산성 경시, 스승의 권위주의, 학문적 자유와 지적 상상력의 억압 등이 초래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들을 군자로 길러내어 세상을 바로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 분이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의 큰 뜻을 맘껏 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인류의 여느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숭고한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기 않았다. 앞서 지적한 한계들은 학문와 제자들을 참으로 사랑한 공자의 지적 도덕적 탁월한 성취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공자의 뜻과 무관한 형식적 예교주의(禮敎主義) 또는 한국 유학의 후진성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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