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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藍田), 남옥(藍玉), 남수(藍水) : 남포(藍浦)
2023년 04월 22일
○ 오늘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보령시(保寧市)’에 포함(包含)되어 있는 조그만 면(面)으로 그 형태(形態)를 유지(維持)하고 있는 ‘남포면(藍浦面)’【이전(以前)엔 남포현(藍浦縣)】의 지명(地名)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 역시(亦是) 특이(特異)한 경우(境遇)인데,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은, “남전(藍田), 남옥(藍玉), 남수(藍水)”와 관계(關係)가 깊은 지명(地名)일 것 같은데, 이러한 “남전(藍田), 남옥(藍玉), 남수(藍水)” 등을 빼고는 이곳을 ‘남포(藍浦)’로 지명(地名)을 취(取)한 연유(緣由)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전회(前回)에 게재(揭載), 설명(說明)한 “보령(保寧)”과 같은 경우(境遇)로,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지명(地名)이다. 지명(地名)의 근원(根源)이나 전고(典故) 등이 전혀 알려지지 않다는 것이다.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은, 『남수(藍水)와 남전(藍田)과 남옥(藍玉)의 세 가지가 어우러지는 곳에 곧 “남전(藍田)”이자,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으로 탄생(誕生)된 것이다』라고 보아야 옳다. 이게 지명(地名)의 근원(根源)이요, 전고(典故)다.
“람전(藍田)·람수(藍水)·람옥(藍玉)” 등은 모두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옛 장안(長安)】남부(南部)에 있는 ‘람전현(藍田縣)’과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다.
➨ 즉(卽) ‘람전현(藍田縣)’에서 생산(生産)되는 ‘옥(玉)’은 사대명옥(四大名玉) 중의 하나인 ‘람옥(藍玉)’의 산출지(産出地)이고, ‘람수(藍水)’는 람전현(藍田縣)을 흐르는 물로 수많은 계곡(谿谷)을 거쳐 흘러 남색(藍)의 물이 흐른다고 하여 시인(詩人)들에게 유명세(有名稅)를 탄 곳이다. 이러한 ‘땅’을 가리켜 ‘람전(藍田)’이라고 했고, 지명(地名)이 만들어지고, ‘람전현(藍田縣)’이 생긴 것이다.
남포(藍浦)는 그럼 뭔가? 어떤 연유(緣由)로 ‘남포(藍浦)=람포(藍浦)’라는 지명(地名)이 만들어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지리지(地理志)와 함께 기록(記錄)을 따라가 보자.
※ 충청남도(忠淸南道) 행정구역도 [출처 : 충청남도] - 남포(藍浦)는, 보령시(保寧市) 남(南)쪽 땅이자, 서천군(舒川郡)의 북(北)쪽 땅으로 아주 협소(狹小)하며, 아주 작은 땅으로, 이곳은 “서(西)쪽 한 면(面)만이 바다에 임하며, 나머지 삼면(三面)은 모두 육지(陸地)로 접해 있는 땅이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남포현(藍浦縣)
◇ 建置沿革 : 《本百濟寺浦縣。新羅改今名,爲西林郡領縣。高麗顯宗九年,移屬嘉林縣,後置監務。辛禑時,因倭寇,人物四散。恭讓王二年,始置鎭城,招集流亡。本朝太祖六年,置兵馬使兼判縣事。世祖十二年,革鎭,例爲縣監。: 본래 백제의 사포현(沙浦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가림현(嘉林縣)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신우(辛禑) 때에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으므로 공양왕(恭讓王) 2년에 진성(鎭城)을 설치하고, 유리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안집(安集)시켰다. 본조 태조 6년에 병마사 겸 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더니, 세조 12년에 진(鎭)은 혁파하고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남포(藍浦)”라는 이름으로 고쳤는데 왜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이 생긴 것인가?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설명(說明)조차 없다. 그저 그렇게 알아라 하는 것이다.
◇ 姓氏 : 本縣 : 임(任)ㆍ백(白)ㆍ이(李)ㆍ유(庾)ㆍ현(玄)ㆍ문(門). : 특이(特異)한 성씨(姓氏)가 바로 문씨(門氏)다. 유씨(庾氏)도 흔한 성(姓)은 아니다.
➊ 족보자료(族譜資料)에 의하면 : 《‘문(門)’씨(氏)는 ‘인천(仁川), 송림(松林), 인동(仁同)’ 등 여러 본관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데, 1930년 국세조사 통계부터는 집계되지 않아 이 문서에서는 '문'이란 음을 가진 성을 ‘文’ 하나로 본다. 2015년 통계에서 7명의 ‘門’ 씨가 있다고 나타나나 이는 그 전(前)과는 상관없는 귀화(歸化) 성씨(姓氏)인 것으로 추측된다.》하였다.
➋ 한국족보정보(韓國族譜情報)에 의하면 : 본관(本貫)은 ‘송림(松林) 인동(仁同) 인천(仁川)’이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문씨(門氏)’는 존재하지 않는다.
➌ 청장관전서 제57권 / 앙엽기 4(盎葉記四) / 신라(新羅)ㆍ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고려(高麗)의 기이한 성(姓) : 문씨(門氏) 《씨족서(氏族書)》에 “문사명(門思明)은 인천(仁川) 사람으로 정종(靖宗) 때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다.” 하였다.
곧 ‘문씨(門氏)’는 본래(本來) ‘인천(仁川), 송림(松林), 인동(仁同)’ 등의 본관(本貫)이 있었다는 말은, 많은 문씨(門氏) 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證據)이나 실제(實際)로는 없다는 뜻이다. “이건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씨(門氏)의 본관(本貫)이었다는 “인천(仁川), 송림(松林), 인동(仁同)” 등지(等地) 역시(亦是) “반도(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서력(西曆 : AD) 1,530년(중종 25)에 만들어진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京畿 仁川都護府 : [郡名 : 미추홀(彌趨忽)·매소홀(買召忽)·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 궁실(宮室) 객관(客館) : 姜希孟 陞號記, (中略), 僕以不能辭,則洪請曰:‘仁之門氏,子之先也,其審於仁也必矣。: 내가 능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홍후가 청하기를, ‘인천의 문씨(門氏)는 그대의 선세(先世)이니 인천에 대하여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이다. 毋固辭焉。希孟謹按仁川卽古彌鄒忽國也。在高句麗爲買召忽縣。굳이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희맹(希孟)은 삼가 상고하건대, 인천은 곧 예전 미추홀국(彌鄒忽國)이다. 고구려 때에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다. 至高麗肅宗朝,以皇妣仁睿太后李氏內鄕陞爲慶源郡;仁宗以皇妣順德王后李氏內鄕改今名,爲知州事;고려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는 황비(皇妣)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의 친정 고을이기 때문에 승격하여 경원군(慶源郡)을 만들었고, 인종(仁宗) 때에는 황비(皇妣)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친정 고을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지주사(知州事)를 만들었다. 恭讓二年,崇七代鄕,陞爲慶源府。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고 높이어 승격하여 경원부(慶源府)를 만들었다. 入我朝,土之望族曰門、李。: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 고을의 명망 있는 문족(門族)으로서 문씨(門氏)ㆍ이씨(李氏)를 말한다. 중략(中略).】
【’강희맹(姜希孟)‘은, 15세기(世紀)의 문신(文臣)으로 24세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뒤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거쳤던 대신(大臣)으로 한때 유명세(有名稅)를 떨쳤던 인물(人物)이라고 전(傳)해진다.】
➤ 인천(仁川)의 사족(士族), ’문씨(門氏)‘는 왜 흔적(痕迹)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땅이 그 땅이 아님에 당연(當然)한 얘기다”
이때만 해도 ‘남포(藍浦)’라는 조그만 ‘현(縣)’ 땅에 여러 성씨(姓氏)와 문씨(門氏)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문씨(門氏)’들의 후손(後孫)과 후예(後裔)들은 흔적(痕迹)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 땅은, 반도(半島) 땅이 아닌데, 어떻게 그 성씨(姓氏)들의 후손(後孫)들이 대(代)를 이었겠는가? 글을 쓰고, 질문(質問)하는 필자(筆子)가 바보가 된 느낌이다.
◇ 題詠 : ➊ 《李安愚詩:北顧雲生壑,南臨浪拍天。好風時自至,快意坐籌邊。: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 “북녘을 돌아보니 구름이 깊은 구렁[계곡, 골짜기]에서 생겨 나오고, 남(南)쪽으로 굽어보니 바다 물결이 하늘과 접했구나. 좋은 바람 때마침 스스로 이르니, 마음도 쾌하여 변방의 일을 주획(籌劃)하는 누각에 앉아 있네.” 하였다.》 ➋ 《徐居正詩:古郡濒南海,山河地理雄。島煙能作雨,江樹易生風。水染葡萄碧,霞蒸菡萏紅。白沙黃竹路,身在畫圖中。: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 “옛 고을 남해(南海) 가에 자리 잡으니, 안팎의 산과 물이 웅장도 하다. 섬에서 떠오르는 연기는 능히 비를 짓게 하고, 강가에 선 나무에는 바람도 쉬 생긴다. 물은 포도로 물들어 푸르렀으며, 안개는 연꽃을 찌어 붉었나. 흰 모래 위 누른 대나무 숲길에, 이 몸 완연히 한 폭 그림 가운데 있구나.” 하였다.》
➊ [南臨浪拍天 : 남(南)쪽으로 굽어보니 바다 물결이 하늘과 접했구나.] : 남(南)쪽이 아니라 서(西)쪽이어야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남포(藍浦) 땅은 서(西)쪽으로 서해(西海)에 임하기 때문이다. 남(南)쪽은 서천군(舒川郡) 땅이다. 땅(地)이 해(海)가 될 수 있을까?
➋ [古郡濒南海,山河地理雄。: 옛 고을 남해(南海) 가에 자리 잡으니, 안팎의 산과 물이 웅장도 하다] : 남포(藍浦)는 서(西)쪽으로 서해(西海)에 맞닿는 땅으로 이곳을 지칭하여 “남해(南海)”라고 한다면? “동(東)쪽에서 해(太陽)가 떠오르고, 서(西)쪽으로 지는 것도 모르는 자(者)다” 더불어 좁디 좁은 남포(藍浦) 땅을 가리켜 “산과 물이 웅장하다”고 한다면 : 도대체 ‘남포(藍浦)’라는 곳은 어디에 있는 남포(藍浦)를 말하는 것일까?
이 모두는 한반도(韓半島) 충청도(忠淸道) 서해(西海)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용(引用)이 잘못되었던가? 아니면 한반도(韓半島) 충청도(忠淸道) 땅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2)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東國輿地志 : 1656년 유형원(柳馨遠)】
◇ 形勝 : 《西南際大海,東北阻衆山。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동북쪽으로는 뭇 산들에 막혀 있다. 地褊濱海。땅이 바닷가에 좁게 자리 잡고 있다. 地連滄海,山高玉馬。本朝高得宗詩。 땅이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고, 옥마산(玉馬山)이 높게 솟아 있다. 본조 고득종(高得宗)의 시》
위의 글 (1)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똑같은 이야기다. 서(西)쪽과 남(南)쪽이든, 서남(西南)쪽이든 “남포(藍浦)”는 서(西)쪽 한 면(面)만이 바다에 임해 있을 뿐이다. 북(北)쪽은 보령(保寧) 땅이요, 남(南)쪽은 서천군(舒川郡)과 접해 있기 때문이다.
또 옥마산(玉馬山)은, 말 그대로 성주산(聖住山)의 한 줄기로 조그만 높이의 산(山)일 뿐인데, “높이 솟아 있다”니 할 말을 잊게 한다. 현장답사(現場踏査)를 해 보면 기막힌 이야기다. 성주산(聖住山) 자체(自體)도 겨우 7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며, 옥마(玉馬)는 그 줄기일 뿐이다.
◇ 土産 : 鐵,出深田里。: 철(鐵), 심전리(深田里)에서 난다.
남포(藍浦)의 심전리(深田里)에서 철(鐵)이 생산(生産)된다는 말은, 철광산(鐵鑛山)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거 충청도(忠淸道) 남포(藍浦) 이야기가 맞는 건가? 다른 세상(世上)에 온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다.
‘국가광물자원지리정보망’을 조회(照會)해보면 : 남포(藍浦)에는 ‘규석과 규사’ 광산(鑛山)만이 기록(記錄)되어 있을 뿐이다. 뭔 철(鐵)이 산출(産出)되었다는 것일까?
(3) 여재촬요(輿載撮要) 忠淸道 藍浦縣【1894年】
形勝 : 靑煙徹海, 玉馬撑天。 地連滄海。
題詠 : 《李安愚詩: “北顧雲生壑, 南臨浪拍天。 好風時自至, 快意坐籌邊。”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 “북녘을 돌아보니 구름이 깊은 구렁에서 생겨나오고, 남(南)쪽으로 굽어보니 바다 물결이 하늘과 접했구나. 좋은 바람 때마침 스스로 이르니, 마음도 쾌하여 변방의 일을 주획(籌劃)하는 누각에 앉아 있네.” 하였다.》 ○ 李承召詩: “萬古孤城在, 山河表裏雄。 嵐深恒作雨, 海近苦多風。 鹽竈燒煙白, 漁村返照紅。 行穿竹林去, 蒼雪糂途中。”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 만고토록 외로운 성 빙 둘러 있고, 산하 모습 표리 이뤄 웅장도 하네, 산엔 이내 깊어 항상 비를 뿌리고, 바다 아주 가까워서 바람이 많네. 소금가마 불 때느라 흰 연기 피고, 어촌 마을 석양 비쳐 붉게 빛나네, 대나무 숲속을 뚫고 길 가노라니, 푸른빛 눈 길 가운데 흩날리누나》하였다.
또《徐居正詩: “古郡濱南海, 山河地理雄。 島煙能作雨, 江樹易生風。 水染葡萄碧, 霞蒸菡萏紅。 白沙黃竹路, 身在畫圖中。”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 “옛 고을 남해(南海) 가에 자리 잡으니, 안팎의 산과 물이 웅장도 하다. 섬에서 떠오르는 연기는 능히 비를 짓게 하고, 강가에 선 나무에는 바람도 쉬 생긴다. 물은 포도로 물들어 푸르렀으며, 안개는 연꽃을 찌어 붉었나. 흰모래 위 누른 대나무 숲길에, 이 몸 완연히 한 폭 그림 가운데 있구나.” 하였다.》
19세기(世紀) 말(末)에도 남포(藍浦)는, 남해(南海) 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남포(藍浦)에 있는 성(城)은, 만년(萬年)토록 오래된 고성(古城)이었다는 것을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萬古孤城在, 山河表裏雄。 : 만고토록 외로운 성 빙 둘러 있고, 산하 모습 표리 이뤄 웅장도 하네〉하였다. 남포성(藍浦城)은, 나라에서 아주 중요(重要)한 요새(要塞)로 수백(數百), 수천(數千) 년을 이어온 아주 오래된 외로운 고성(古城)이었으며, 산(山)과 강(江)의 안팎(表裏)이 웅장(雄壯), 뛰어났다는 뜻이다.
참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다. 여러 번 그곳을 답사(踏査)해 봐도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역병(疫病)의 출현(出現)으로 인한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바닷가에 ‘캠핑장’으로 마니아(mania)들에게 조금 알려져 있을 뿐인 이곳 땅이다.
옛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남포(藍浦)’와 오늘날의 충청도(忠淸道) ‘남포(藍浦)’와는 전혀 다른 땅임을 쉽게 알 수 있다.
(4) 계곡(谿谷)집 제29권 / 오언율(五言律) 148수 / 남포의 객관에서 지은 시에 차운하다[藍浦客館韻]【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
《大鹵連湖浦,群山擁縣門,鹽煙霾白日,戍角起黃昏,秔稻供秋稅,醎腥入晚飧,征途饒飮啄,隨處認君恩 : 호서의 포구에 연달은 거대한 염전, 동헌 문을 에워싼 푸르른 산봉우리, 소금 굽는 연기로 한낮에도 어둑어둑, 황혼 녘 군막(軍幕)의 뿔피리 소리 애잔하네. 논벼들 무럭무럭 세금 너끈히 바치겠고, 저녁 밥상에 오른 맛깔진 젓갈, 나그네 길 이렇듯 먹거리 풍성하니, 어디나 임금의 은혜 있는 줄 알으렷다》하였다.
➨ 《大 鹵 連 湖 浦 : 호서(湖西)의 포구에 연 달은 거대한 염전, 鹽 煙 霾 白 日 : 소금 굽는 연기로 한낮에도 어둑어둑》할 정도라면 이곳 남포(藍浦)에 엄청나게 큰 염전(鹽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과연 그런가?
특히 조선사(朝鮮史)에서 “호(湖)” 자(字)만 나오면 그 땅이 바로 “호서(湖西)”를 지칭(指稱)한다. 그만큼 “호(湖)”가 상징(象徵)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반도(半島) 땅에서는 “호(湖)”라고 불릴 수 있는 큰 호수(湖水)가 없다는 것이 문제(問題)다. 문제(問題)가 될 일은 없다. 다만 어리석은 후손(後孫)들의 무지무식(無知無識)한 헛발질일 뿐이다. 이러한 것을 “꿈도 야무지다”라고 표현(表現)해 볼 수 있으려나!!!
또 토산물(土産物) 편을 보면 : 그 어느 구석에도 “거대(巨大)한 염전(鹽田)과 소금이 나온다는 기록(記錄)이 없다.” 해괴(駭怪)한 일이다.
일반적(一般的)인 옛 염전(鹽田)은, 불을 피워 증발시키는 과정으로 소금을 만들었기 때문에 연기가 날 수밖에 없으나, 위에서 표현하는 것은 바닷가의 염전(鹽田)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염(鹽)은 “로(鹵)”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 의미(意味)는,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자(字)다.』 즉(卽) 육지(陸地)에서 산출(産出)되는 소금을 뜻하는 말이다.
『‘鹵’자는 ‘소금’이나 ‘소금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鹵’자는 ‘소금밭’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鹵’자는 바다에 있는 염전(鹽田)이 아닌 서(西)쪽에 있던 소금밭을 그린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것도 알자. 즉 ‘내륙(內陸)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포(藍浦)”에는 거대(巨大)한 “소금” 광산(鑛山)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포현(藍浦縣)에 대규모(大規模) 염전(鹽田)도 없었고, 더더구나 ‘소금’광산(鑛山)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이게 바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의 한계(限界)다.
(5) 문곡(文谷)집 4권 / 시(詩) 9월 9일〔九日〕【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二年瘴海作重陽,正似坡翁滯越鄕,藍水把萸非舊會,楚江餐菊又新香,無人解送東籬酒,獨雁驚呼北地霜, 縱使登高徒極目,浮雲何處認西方 : 두 해나 장독 가득한 바닷가에서 중양절을 만났으니, 정녕 소동파가 월 땅에 유배된 일 같구려. 남수(藍水)에서 산수유 꽂는다고 옛 모임 아니지만, 남(南)쪽 강가에서 국화 먹으니 또한 새 향기라. 동쪽 울타리로 술 보내 줄 사람 없고, 북녘에 서리 왔다 놀라 우는 기러기만 있으니, 설령 산에 올라 부질없이 멀리 바라보아도, 뜬구름에 어느 곳이 한양인 줄 알겠는가. 》하였으니,
『남포(藍浦) 땅 역시 아열대기후대(亞熱帶氣候帶)에 있는 땅으로 ‘보령(保寧)’과 함께 중조(中朝)의 죄인(罪人)들의 유배(流配)지로 활용(活用)된 땅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大東野乘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중도부처류(中途付處類)〉 : 《이증길(李增吉) 남포(藍浦)로 정배. ㆍ이봉길(李奉吉) 기린도(麒麟島)로 정배. ㆍ박자전(朴自全) 사량도(蛇梁島)로 정배. ㆍ박승종의 아들. ○ 정급(鄭) 면천(沔川)으로 정배. ○ 유경갑(劉敬甲) 이천(伊川)으로 정배. 이상 사람들은 혹은 흉참한 상소를 하였고 혹은 역적의 심복이 된 죄.》라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5년(1628) 즉 계해년 3월】
(7)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규보(李奎報) : 의종 22년(1168)-고종 28년(1241)】제36권 / 묘지(墓誌)ㆍ뇌서(誄書) / 경산부부사 예부원외랑(京山府副使禮部員外郞) 백공(白公)의 묘지명(墓誌銘) : 《君諱賁華。字無咎。淸州藍浦郡人也。: 군의 휘는 분화(賁華)요, 자는 무구(無咎)인데 ‘청주(淸州) 남포군(藍浦郡)’ 사람이다.》라고 하여,
남포군(藍浦郡)이 청주(淸州)에 속한 군(郡)이었다고 하였는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8)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 하권 웅진도독부고(熊津都督府考) : 《지금의 남포(藍浦)는 백제의 마산(馬山)이다. 마(馬)와 마(麻)는 음이 같으니, 아마 이것인 듯하다.》고 하였는데, 마(馬)와 마(麻)가 음이 같은 것과 남포(藍浦)와 뭔 상관(相關)?
(9) 삼탄집(三灘集)【李承召, 1422~1484)】제4권 / 시(詩) 남포로 가는 도중에 읊다〔藍浦途中〕 : 《萬古孤城在,山河表裏雄,嵐深恒作雨,海近苦多風,鹽竈燒煙白,漁村【返】照紅,行穿竹林去,蒼雪糝途中 : 만고토록 외로운 성 빙 둘러 있고, 산하 모습 표리 이뤄 웅장도 하네, 산엔 이내 깊어 항상 비를 뿌리고, 바다 아주 가까워서 바람이 많네. 소금가마 불 때느라 흰 연기 피고, 어촌 마을 석양 비쳐 붉게 빛나네, 대나무 숲속을 뚫고 길 가노라니, 푸른빛 눈길 가운데 흩날리누나》하였다.
《萬 古 孤 城 在 : 만고(萬古) 토록 외로운 성(城) 빙 둘러 있고》하였음에 비춰보면 : 이곳의 『‘남포(藍浦) 성(城)’은 수천(數千) 년 오랜 옛적부터 변방(邊方)을 지키는 외로운 성(城)이었다.』는 말이다. 허나 ‘남포(藍浦)의 성(城)’이라는 것은, 유치원(幼稚園) 아이들의 장난감 수준(水準)만도 못한 것이다. 무엇이 “만고(萬古)의 외로운 성(城)이었다는 말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어디의 어떤 “산하(山河) 모습의 안과 밖 이뤄 웅장도 하다[山 河 表 裏 雄]”는 것일까? 결국(結局) 『남포(藍浦)는 산(山)과 하(河)가 유명한 땅의 이름이었다.』는 뜻이다. 이건 오늘날의 “남포(藍浦)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確認)할 수 있다.
(12) 용재집(容齋集)【이행(李荇) : 성종 9년(1478)-중종 29년(1534)】 제10권 / [산문(散文)]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춘추관사 증시(贈諡) 정숙공(貞肅公) 묘갈명 병서(幷序) : 《자녀는 모두 8명이다. 아들의 맏이 줄(茁)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모종의 사안(事案)에 연좌되어 남포(藍浦)로 귀양 갔고, 중략(中略).》
(13) 태조실록(太祖實錄) 7년 무인(1398) 8월 26일(기사) / 조사의ㆍ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 :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중략(中略)》
태종 1년 신사(1401) 2월 9일(무술) / 영안군이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한 변남룡 부자를 기시(棄市)하다 : 《유지는 남포진(藍浦鎭)에, 유도는 이산진(伊山鎭)에 귀양보내고, 각각 장(仗) 1백 대를 때렸다.》
태종 8년 무자(1408) 8월 18일(계사) / 병조의 천거를 받았으나 탈락하자 황희에게 분경한 박유손을 귀양보내다 : 《전 판사(判事) 박유손(朴有孫)을 남포(藍浦)로 귀양보냈다.》
➨ 위의 글 ‘(5)+(12)+(13)’을 보면 : “만세(萬歲) 보령(保寧)” 편에서도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보령(保寧)이나 남포(藍浦) 등지(等地)는 도성(都城)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장기(瘴氣)의 풍토병(風土病)이 있던 곳에 중조(中朝)의 죄인(罪人)들을 유배(流配) 보내는데 이용(利用)했던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요(豐饒)로운, 살기 좋은 땅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는 어리석은 군주(君主)가 있을까? 단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에게는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14) 백담집(栢潭集)【구봉령(具鳳齡, 1526~1586)】4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 남포 동헌에서 다시 차운하다〔藍浦東軒復次韻〕
《遶郭喬松一面靑,小樓開眼思冥冥,雲掀北牖千層岫,雪蹴南空萬里溟 : 성곽 두른 높은 소나무 한 면이 푸른데, 작은 누에서 눈 뜨니 생각이 아득하네. 구름 걷힌 북쪽 창엔 일천 겹의 산이고, 눈 걷힌 남쪽 하늘엔 만 리가 바다라네. 중략(中略).》하였는데,
남포(藍浦)라는 땅은, 아주 협소(狹小)한 땅으로, 이곳 어디에서 보아도 서(西)쪽 한 면(面)은 바다에 닿고 ‘동(東)·남(南)쪽·북(北)’쪽 삼면(三面)은 모두 육지(陸地)와 접하고 있는 땅이다. “남(南)쪽을 바라보면 만리(萬里)가 모두 바다라네”라는 말은,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본래(本來)의 남포(藍浦) 땅 이야기다. 즉 충청도(忠淸道) 남포(藍浦)라는 지명(地名)은 대륙(大陸)으로부터 차용(借用)된 지명(地名)임을 스스로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15) 無名子集【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詩稿 册三 / 詩 / 賦得藍田【藍浦一名藍田,有藍田驛。又名玉山,有玉馬山。: 남포(藍浦)는 일명(一名) 남전(藍田)이며, 남전역(藍田驛)이 있다. 또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은 옥마산이 있다. 윤기(尹愭)는, 남포현감(藍浦縣監 종6품 : 57세가 되던 1797년)을 지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 왜 ‘남포(藍浦)’를 ‘남전(藍田)’이라고 했으며, ‘남전(藍田)’은 ‘남포(藍浦)’를 말하는 것인가? 그 전고(典故)가 뭔가? 옥산(玉山)이란 옥(玉)이 산출(産出)되는 산(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옥마산(玉馬山)이 될 수 있나? 도대체 이 지방(地方)의 어떤 특징(特徵)이나 특색(特色)을 취(取)해 만든 것이 남전(藍田)이며 옥산(玉山)인가? 해괴(駭怪)한 일이다.
(16)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 / 남포(藍浦)
《西南地盡海爲關,淼淼滄波几案間,五野角聲江月冷,一簾花影戌樓閑 : 남포(藍浦)는 서남(西南)쪽 땅끝의 바다 관문,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가 책상 앞까지 이르고, 새벽녘 호각소리에 달빛도 싸늘한데, 주렴에 걸린 꽃 그림자가 한가로이 망루를 지킨다. 帆檣不斷淸淵浦,嵐靄常浮玉馬山,對景遣懷聊復爾,從敎雙鬂入詩班 : 돛단배는 끊임없이 청연포에 드나들고, 푸른 산안개는 항상 옥마산에 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고 회포 풀기를 반복하니, 이 늙은이로 하여금 시인의 반열에 들게 한다.》
“서남(西南)쪽 땅끝 바다의 관문(關門)”이라는 말은 “서남(西南)쪽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서해(西海) 바닷가에 있는 고을은 모두 다 해당(該當)되는 말이다.” ‘관문(關門)’이란 ‘국경(國境)이나 요새(要塞)에 세운 성문(城門)’을 말하는 것이다.
남포(藍浦)는 어느 나라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어, 이곳이 요새(要塞)라는 말일까?
(20) 高麗史 地理志 : 《楊廣道本高勾麗百濟之地.[漢江以北高勾麗以南百濟.] 成宗十四年分境內爲十道以楊州廣州等州縣屬關內道忠州淸州等州縣爲忠原道‘公州運州等州縣爲河南道’睿宗元年合爲楊廣忠淸州道明宗元年分爲二道忠肅王元年定爲楊廣道恭愍王五年爲忠淸道領京一牧三府二郡二十七縣七十八》이라고 하였는데,
➨ 위에서 보면 : ‘공주(公州), 운주(運州)’ 등의 주현(州縣)은 하남도(河南道)[公州運州等州縣爲河南道]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운주(運州)는 홍주(洪州)를 말하며, 오늘날의 홍성(洪城)을 말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어떤 하(河)의 남(南)쪽에 있어 ‘하남도(河南道)’인가?” 이게 가장 핵심적(核心的)인 이야기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또는 한국사(韓國史)’는 뜬구름을 손으로 잡으려 하는 ‘초딩’들 모습과 똑같다. 도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남포지역(藍浦之役)이란?
(21) 高麗史 卷一百十七 列傳 卷第三十 정몽주 : 정몽주가 공양왕에게 건의하여 5죄에 연루된 사람들의 처벌을 논하지 말도록 하다 : 《湊曰, “安德, 藍浦之役, 專軍覆沒, 其還也, : “왕안덕은 남포지역(藍浦之役)에서 군대가 완전히 패하였는데 돌아오면서”》하였고,
高麗史 列傳 姦臣 邊安烈 조를 보면 : 《王安德托名將帥, 每致敗北, 藍浦之役, 全軍覆沒, 大損國威, 在軍法所當誅. : 왕안덕은 장수로 이름을 걸어놓고도 매양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남포지역(藍浦之役)에서는 전군(全軍)이 궤멸(潰滅)되어 나라의 위신(威信)을 크게 손상(損傷)시켰으니 군법(軍法)으로 마땅히 참수(斬首)해야 합니다.》하였다.
『남포지역(藍浦之役)』 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따르면 : “왜구(倭寇)의 대대적(大大的) 침략(侵掠)을 물리치는 과정(過程)에서 ‘왕안덕(王安德)’이 거느린 고려(高麗) 군(軍)이 전몰(戰歿)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기록(記錄)에 따르면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과 우왕(禑王) 때에 이르러 왜구(倭寇)의 난동(亂動)이 극에 이를 시기(時期)이다.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참고(參考)해보면 :
㈠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은 470여 건에 이르며, 침입한 곳은 200여 곳이 넘는데, 특히 ‘영남(嶺南), 호남(湖南), 충청(忠淸), 황해(黃海)’ 등을 가리지 않았는데, 충청(忠淸) 쪽은 서해안(西海岸)과 내륙(內陸)을 가리지 않았는데, 남포(藍浦), 보령(保寧), 서천(舒川), 서산(瑞山), 면천(沔川) 등을 포함하여 내륙(內陸)지방으로 진출(進出)하여 온양(溫陽), 천안(天安), 목천(木川), 청양(靑陽), 공주(公州), 연산(燕山), 금산(錦山), 계룡산(鷄龍山) 등지에 진을 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㈡ 그 규모(規模)를 보면 : 소규모(小規模)일 때는 20여 척이요, 대규모(大規模)일 때는 500척이 넘는 엄청난 규모(規模)였다고 전해진다. 즉(卽) 한 척(隻)에 10명이 승선(乘船)했다고 하더라도 수백(數百)에서 오천(五千) 또는 일만(一萬)에 이르는 규모(規模)라고 추측(推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 우왕(禑王) 7년[1382] 11월 : 보령현(保寧縣)에 왜(倭)가 침입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 우왕(禑王) 6년[1380] : 왜구침입으로 인하여 남포현(藍浦縣) 백성(百姓)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양왕 2년(1390)에 비로소 진성(鎭城)을 두고 유망민(流亡民)을 불러 모았다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남포현(藍浦縣)은 왜구(倭寇)에 의해 엄청난 피해(被害)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도 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무려(無慮) 10년 동안이나 남포현(藍浦縣)은 불모지(不毛地)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는데, 곧 왜구(倭寇)의 침탈(侵奪)로 현민(縣民)들이 모조리 도주(逃走)해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주고 있다.
㈢ 남포현(藍浦縣)의 경우(境遇)를 보면 : 다른 여타 서해안(西海岸)이나 내륙지방(內陸地方)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특이(特異)함을 보여주는데, ‘백성(百姓)들이 다 흩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정도(程度)의 왜구(倭寇) 침입(侵入)이었다고 본다면 : 주변의 보령(保寧)이나 서천(舒川) 등지 역시 같은 피해(被害)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正常的)인데, 피해(被害)를 봤다는 기록(記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남포지역(藍浦之役)’이 등장(登場)할 차례가 된다.
㈣ “남포지역(藍浦之役)”이란? 남포(藍浦)에 대규모(大規模) 왜구(倭寇)가 진을 치고 있어,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왕안덕(王安德)과 고려군(高麗軍)을 출정(出征)시켰으나, 『왕안덕(王安德)이 광주 절제사 최운해, 양광도(楊廣道) 도절제사 이승원과 함께 90리를 추격(追擊)하여 도둔곶(都屯串)에서 싸워 대패(大敗)하여 왕안덕(王安德)은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나 사졸(士卒)의 죽은 자가 40명이나 되었다』고 전하면서 전몰(戰歿)했다고 전한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본기 및 열전(列傳) 정몽주(鄭夢周), 변안열(邊安烈), 왕안덕(王安德)등 참고(參考)】
“남포지역(藍浦之役)”으로 표현되는 이 사건(事件)은 즉(卽) 대규모(大規模) 왜구(倭寇) 침입(侵入)으로 조정(朝廷)에서 보낸 출정군(出征軍)이 전몰(戰歿)했다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사건(事件)에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남포(藍浦) 외(外)의 다른 지역에 대한 언급(言及)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남포(藍浦)’는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땅이다. ‘남포(藍浦)에 왜구(倭寇)가 닻을 내렸다’ 면, ‘보령과 서천(舒川)’ 등의 주변(周邊) 역시(亦是) 침략(侵掠)을 당해야 정상적(正常的)인 이야기가 전개(展開)될 수 있다. 즉(卽)“ 남포(藍浦) 땅은 아주 협소(狹小)한 땅이기 때문이다”
“남포(藍浦)의 남(南)쪽에는 서천군(舒川郡)이 있고, 이곳은 전라도(全羅道)와 경계(境界)를 이루는 금강(錦江) 하구(河口)가 있는 곳으로 이곳으로부터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내륙(內陸) 땅인 부여(夫餘), 공주(公州)까지 일사천리(一瀉千里)다. 왜구(倭寇)들이 그렇게 멍청했던 무리들이었을까?”
서력(西曆)‘ 660년에도 수십만(數十萬) 당군(唐軍)이 함선(艦船)을 타고 금강(錦江) 하구(河口)로부터 “부여(夫餘)”까지 기어 올라가 백제(百濟)를 초토화(焦土化)시켰다는 일화(逸話)가 있잖은가! 왜구(倭寇)들 역시(亦是) ’금강(錦江) 하구(河口)’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부여(扶餘), 공주(公州)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주변 모두를 노략(擄掠)질 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다. 이런 쉬운 길을 놔두고 무지무식(無知無識)하게 웅천(熊川)에 정박(碇泊)하고 내륙(內陸)으로 진격(進擊)을 하겠냐? 이러한 이야기는 현대(現代) 학계(學界)에서 추측하는 코메디극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따르면 : 당시의 남포현(藍浦縣)은 오늘날과 같은 좁은 땅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땅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변 보령(保寧)이나 서천(舒川) 등을 노략(擄掠)질 하지 않더라도 충분(充分)하게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땅이었으니, 견디지 못한 남포현(藍浦縣) 백성(百姓)들이 다른 곳으로 도주(逃走)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좁은 땅의 ‘남포현(藍浦縣)’이었다면 : 주변(周邊)의 보령현(保寧縣)이나 서천군(舒川郡), 부여(夫餘), 청양(靑陽) 등지의 백성(百姓)들 역시(亦是) 모조리 도주(逃走)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어떻게 남포현(藍浦縣) 백성(柏成)들만 피해를 받을 수 있겠냐? 14세기의 왜구(倭寇)들이 “남포현(藍浦縣)과 피맺힌 원한(怨恨)이 가득해 목표물(目標物)인 ‘남포현(藍浦縣)을 정밀(精密) 타격(打擊)’한 것일까?”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역사(歷史) 해설(解說)에 의하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게 조선사(朝鮮史)냐? 아니면 한국사(韓國史)냐?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학계(學界)! 이게 나라(國家)냐?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오늘의 현실(現實)이다.
○ 하기야 『작금(昨今)의 이 나라 정권(政權)도 “무능력(無能力)과 무책임(無責任)”으로 무장(武裝)되고 거짓말과 무지무식(無知無識)으로 정치(政治)를 하고 있는데 누굴 비판할 수 있겠는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요!!!
2023년 04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