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자 눈이 아렸다. 밝은 불빛 때문이었다. “여기 좀 앉았다 한산해지면 나가자. 그 동안 이거나 봐.”
엄마가 민지랑 민수에게 팸플릿 한 장씩을 건넸다. 그건 조금 전에 본 영화에 대한 거였다. 대한제국 시절의 고종황제와 그때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의 대통령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영화였다.
힘 있는 나라에게 끌려 다니는 힘 없는 우리나라의 얘기, 그 때문에 민지는 이따금씩 가슴이 답답했었다. 속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가 얹힌 것처럼.
민지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눈으로 팸플릿을 죽 훑었다.
나가! 당장 나가! 가서 애들에게 명성황후가 누군지 물으면 이미연이라 대답하고, 을사늑약이 뭐냐고 물으면 새로 나온 약이라고 말해버려!
▲ 그림:이상윤
바로 이 구절에 눈이 딱 멎었다. 문화센터에서 역사를 강의하던 아저씨가 아줌마들에게 외친 말이었다. 민지는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와하하’ 웃었다. 그런데 웃음 끝에 코끝이 찡했었다. “엄마, 그냥 지금 나가면 안 돼요? 배고픈데.”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너희들은 안 갈 거니?” 엄마는 민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그냥 가지. 식당에도 화장실 있는데! 배고파, 쫄깃쫄깃한 생선초밥 먹고 싶다.” 민수가 배를 쓸어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 순간 민지는 고종황제의 부인인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의 칼에 쓰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 다른 거 먹으면 안 돼? 오늘은 초밥이 좀 그런데….” “왜, 너도 좋아하잖아?”
민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민지를 봤다. 민지 눈은 여전히 팸플릿에 멎어 있었다. 그제야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너, 그 영화 때문이지? 바보,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 “하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잖아.” “다 옛날이야기야. 100년도 더 된. 그리고 맛있으면 먹는 거지. 어느 나라 음식이든, 무슨 상관이냐?”
민수는 팸플릿으로 비행기를 접기 시작했다. 민지는 왠지 오빠의 말이 영화 속의 한 아저씨와 닮아보였다.
“그럼, 오빠도 이 아저씨랑 같은 생각이야? 힘센 나라한테 의지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 민지는 손가락으로 팸플릿에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민지야, 너 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아냐? 그게 다 힘도 없으면서 강한 나라한테 맞붙었기 때문이야. 차라리 힘센 나라가 원하는 거 들어주면서 안전하게 보호도 받고, 그래서 잘 살면 좋지 뭘 그래?”
민수는 다 접은 비행기를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민지는 다시 팸플릿으로 눈을 돌렸다. 빨간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 아래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그 글씨들은 커다란 외침이 되어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내 나라에 들어온 외세도 일본이 막아주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일본이 한다면 이 땅이 누구 것이며 누가 주인이란 말이냐?’
고종황제의 슬픈 눈빛도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분은 내 나라, 내 땅인데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은 일에도 억지로 도장을 찍어야 했다.
“오빠, 잘 사는 게 뭘까?” “야, 또 시작이냐? 나, 무지 배고프거든. 그만 좀 하자.” 민수는 종이비행기를 날리려다 말고 민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다 스르르 눈을 돌렸다. 민지 눈에 수많은 생각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던 것이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먹고 싶은 거 맘껏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힘들지 않게 살면 되는 거 아냐?”
민수는 힘껏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비행기는 곧장 날아올랐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를 것 같던 비행기가 갑자기 머리를 꺾더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바로 그때였다.
오래 전에 읽은 ‘유관순’이란 위인전이 떠오른 건. 감옥에 갇혀서 끝까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유관순! 순간 민지는 오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그럼 유관순 언니는 왜 죽어가면서도 ‘독립만세’를 불렀을까?’ 민지는 이렇게 소리쳐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가슴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배고프다며, 뭐 먹을래?” 언제 왔는지 엄마가 출입문 쪽으로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어느새 거리엔 까맣게 어둠이 내려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빨강, 노랑 색색의 영어 간판들이 꽃처럼 피어있었다. 민수와 민지는 등을 맞댄 채 그 간판들을 천천히 훑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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