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시키와라시 - 3
눈이 조금 뻑뻑해서 지그시 감고 엄지와 검지로 양쪽 속눈썹을 살짝 잡아
당겼다. 집게손가락 끝에 속눈썹 두 가닥이 팔(八)자 모양으로 묻어나온다.
물방울이 점점이 묻어있는 창 너머로 철로변의 명자나무가 스쳐갔다.
새벽에 깬 후 다시 잠들지 못했다. 좋은 꿈은 아니었지만 그리 불쾌한 기분
이 드는 꿈도 아니었다.
풀 한포기 없고 온통 버석버석 마른 모래흙뿐인 언덕에 내가 앉아있었다.
아래로는 호수가 내려다보였다. 내 옆에는 (낚시로 잡은)커다란 생선이 든
광주리 하나와 귀여운 꼬마 여자애 두 명. 나랑 서로 재잘거리면서 놀고 있
었다. 두 아이 모두 이야기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으면서도, 한 아이는 광주리
에 든 물고기를 무심중 찔러보기도 하고 꾹 누르기도 했다. 빨간 피가 찔끔
찔끔 배어나왔다. 속으로 얼굴을 찡그리지만 그만하란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무랐다가 아이의 미움을 사는 게 싫었다.
그 아이가 다른 물고기를 집어들더니 언덕 아래로 가지고 내려갔다. “살려
줘야지”하고 그 애는 말했다. 마른 흙만 황량한 물가에서 그 애는 물고기를
휙 집어던졌다. 세게 휘두른 듯 보였지만 바로 앞의 얕은 물가로 첨벙, 하고
떨어진다.
물속에 떨어진 물고기는 머리부분이 온통 진득진득한 붉은색으로 변해 있
었다. 꿈속이지만 깜짝 놀라서 보니, 물고기 머리의 은색 껍질이 통째로 벗
겨져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벗겨진 껍질은 원래모양을 유지한 채 깔대기처
럼 가라앉아 있고 물고기는 이미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아이는,
“아가미에 찔러넣었던 손을 제때 놓지 못했어”
라고 말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다시 올라온 -손에 피 묻은- 그 아이랑 아까처럼 놀다가 한 아이가 나를
돌아보며,
“OO언니,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나”
옆자리 승객 모르게 손을 입 앞으로 모으고, 하-하고 불어본다.
‘냄새 안 나는데.’
전철이 작은 역에 도착하고 몇 명이 올라탔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눈에 띈다. 아는 아이는 아니었다.
잠에서 깬 건 꿈 탓이 아니다.
무언가한테 목이 졸린 것처럼 발버둥치다가 컥컥거리며 일어났다. 눈을 뜨
고도 한동안 기침이 멈추지 않아, 새카만 방에 울려퍼지는 내 기침소리가 무
서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난 무언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목에 희미한 멍자국이 남아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을 조금 움츠리고 머리칼을 쓰다듬듯 목덜미 쪽으로 모은다.
다행히 내 피부는 새하얀 편은 아니라서(진짜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
니다) 흐릿한 멍자국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전철 안에 꽤 사람이 늘어났다. 저녁과는 다르게 조금은 긴장된 느낌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앞에 있는 사람의 다리와 신발만 보인다. 앞의 왼쪽은
핑크색 줄무늬가 들어간 나이키 스니커즈, 왼쪽은 세련된 페라가모 에나멜
펌프스.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든 건 아마도 떨어지는 꿈 같은걸거다. 그런 기분이 들
어서 잠결에 스스로의 목을 감싸쥐는 바람에 멍이 든 걸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안 그러면 너무나 무서워지니까 혼자서 살 수 없어진다. 방범
방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잘 때는 창이나 방문을 꼭 잠그니까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목 졸리는 느낌은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가끔씩 찾아오던 거라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제는 나쁜 꿈의 일종으로 치부
해 버릴 수 있다.
# 학교
“비 그쳤네.”
식탁보 대신으로 책상에 깔았던 얇은 도화지를 걷어내며 에미가 말했다. 점
심식사가 끝나가는 교실에는 아직 음식냄새가 떠돌고 있다.
“몰랐어? 아까 2교시 지나고부터 안 왔어.”
라고 대답하며 창문을 열자 무겁고 차가운 공기가 흘러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짙은 침엽수 녹음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나와 바람에 흘러가고 있다.
“얘들아, 매점 갈래?”
옻칠을 한 사각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면서 건너편에서 마리아가 말했다. 창가인
내 자리에서 옆으로 한 줄 건너, 뒤에서 세 번째 자리다. 마리아가 싸는 보자기는
단정해서 마치 손수건에 싸여있는 결혼식 축의금봉투 같은 느낌이다.
“난 안 가. 몸 컨디션이 최악이야.”
에미가 책상에 풀썩 상체를 누인다. 아랫배에 손을 대고 지그시 누르고 있다.
학교는 왜 생리휴가가 없는거야, 라며 울상을 짓는다. 그리고는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매점갈거면 내 것도 사다줘”, 한다.
난 아주 조금이지만 상처를 받는다. 마리아보다 내가 더 가까이 있는데….
나한테 부탁해도 되는데.
하지만 나와 에미는 3학년이 되어 처음 만난거라 아직 조금 서먹함이 남아있다.
에미와 같은 반에서 올라온 마리아와도 마찬가지. 하지만 둘 다 좋은 애들이란
걸 알게되는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첫인상이 빗나가는 건 이지메당하는
학생이 자살할 확률 정도밖에 안 된다. 뉴스에서는 꽤 자주 떠들어대지만.
“뭐 사다줄까?”
“적당히.”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에미가 말한다.
“적당히?”
“응. 적당히. 키위맛 푸딩은 빼고.”
미용실에서 ‘적당히’ 깎아달라는 손님은 미용사가 싫어한다는데, 그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마음을 준(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만) 친구에게만 할 수 있는
다정한 부탁이다.
마리아는 싱긋 웃고 “알았어. 갔다 올게”하고 내 손을 잡아끈다. 뒤에서,
“오렌지 젤리도 배고, 떠먹는 요구르트도 싫어.”
라는 목소리가 쫓아와 마리아와 마주보며 ‘은근히 주문이 복잡하네’하고 풋
웃었다.
1층 신발장에서 로퍼로 갈아신고 현관을 나왔다. 한 달 전만 해도 3층이었는
데, 계단통로를 한바퀴 더 돌아야 현관이 나온다는 것이 아직 낯설다. 통로를
두 번 돌아내려와도 익숙한 신발장 전경이 아니라 계단이 계속 이어져 있으니,
‘이게 뭐지’하는 느낌이 든달까. 고작 한 층 더 위로 올라간 것 뿐인데.
창문가 자리인 에미가 보고있지 않을까하고 뒤돌아 올려다본다. 어느게 우리
교실인지 금방 구별할 수가 없다. 바람이 불어, 수많은 창문의 끄트머리마다
내비치고 있는 똑같은 아이보리색 커튼이 일렁였다. 천여명의 아이들이 만들
어내는 가벼운 소란이 고양이털뭉치처럼 한데 엉켜 머리위로 떨어져내리고
있다.
물기를 머금어 색이 한층 진해진 봄꽃들 사이사이로 달팽이와 사슴모양 정원수
가 웅크리고 있는 정원을 지난다. 벤치가 아직 젖어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삼삼오오 모여 있는 아이들의 수가 평소보다 조금 적었다. 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는 꺼져있다.
매점은, 정사각형모양의 자그마한 갈색 도서관(캐러멜처럼 생겼다)을 끼고돌아
강당을 지나 별관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꽤 시간이 걸린다. 그냥 자판기에서
살까, 하고 마리아에게 말하니, “비 갠 후라 상쾌하잖아. 걷자.” 한다.
------------------<내일 계속..>--------------------
"...그런데 최근의 일이지만, 나는 집안에 있는 그것의 존재를 깨닫고 있다.
무엇인가가 있다... 나를 지켜보고 있다...
기척을 느껴 뒤돌아보면 어느새 사라져버린 후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그 존재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내 방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늘에 가려져 두 발만 드러낸 채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 존재가 배후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
'자시키와라시' 라는 건..
-어린아이 형상을 하고 있는, 일종의 요괴예요.
집이나 전통식 여관같은곳에서 숨어사는데, 자시키와라시가 머무는 집에는 차례차례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집 식구중 어느 한명이 나쁜 짓을 하면 저주를 내려 죽여버린다고도 하고, 머물던
자시키와라시가 떠나버린 집은 불행하진다고도 전해집니다.
자시키와라시의 모습은, 그 집에 사는 사람 이외에는 볼 수가 없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시키와라시를 보기는 매우 힘들대요... 특히, 어른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래는, 자시키와라시 그림!!
(제가 그린 건 당연히 아니구요, 출처는 몰라요..)
첫댓글 앗,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요! 오오, 제목조차도 흥미롭군요오!!!!!/ㅁ/ 그나저나, 주인공이 여자였군요!<-여지껏 몰랐다.ㅠㅠ //으아, 정말 몇번 이나 말하는 거지만 사와지리 님 같은 분위기....뭔가 평화롭고 잔잔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데도 흥미로운것! 바나나 님 필체와 비슷하시군요./ㅁ/
우리나라에도 '좌부동자'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거하고 거의 비슷한건데, 왜 '동자'라는 말은 남자아이를 지칭하잖아요. 그에 반해 자시키와라시는 남자아이모습일수도 있고 여자아이모습일수도 있대요. 그래서 남자아이의 이미지인 '좌부동자' 대신 '자시키와라시'라는 제목을 붙인거랍니다..// 아.. 주인공이 여자인걸 눈치채지 못하셨다니.. 제 불찰입니다ㅠ_ㅠ 글의 분위기만으로 성별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써야 진짜 좋은 글일텐데, 아직 내공이 많이 모자라네요ㅠ_ㅠ.. 그래도 칭찬해줘서 고맙습니다, 라즈페님!!!!
왠지 내일부터 밥상에 올라오는 생선이 다르게 보일것같네요..^^;;;그림..왠지..섬뜻한데요..외로워보이기도 하고...
저도 저 그림 꽤 맘에 들어요. 뭔가 나른하면서도 굉장히 애틋한 분위기... //아,.. 저 생선나오는 꿈... 나름대로 꽤 많이 생각하고 쓴 거예요^^ 앞으로 이어질 글의 내용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상징성 강한 꿈이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그림이 안보여요 ㅠ / 앗 주인공이 여자였어요? 지금까지 남자라 생각..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외국인가요? 친구들 이름이 한국사람이 아니네요 ㅎㅎ (왜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지..ㅠ)/ 첫부분에 그 꿈얘기. 으악 무서워요.
꽤 멋진 그림인데 안보이신다니 안타까워요ㅠ_ㅠ (이상하네요... 혹시나 하고 제가 그림 올린 컴퓨터 말고 다른 컴퓨터로 들어와봐도 그림 잘 뜨던데..) //아.. 저 한국에 있어요.. 근데 배경이 한국이 아닌 것은... 제목을 꼭 '자시키와라시'라고 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생각한 주제가 그 '자시키와라시'라는 단어와 너무 잘 들어맞아서.. 제목만 일본어고 등장인물이 한국인이면 이상하잖아요.. 그래도 한국으로 할까 망설였는데, 어쩌다보니 1회에 '관에 누워 얼굴만 보이는 엄마는' 이라는 부분을 집어넣었단걸 알게 되었어요ㅠ.ㅠ 왜, 한국의 장례식장에서 쓰는 관은 얼굴부분이 개방되는 구조가 아니잖아요.
그에 반해 일본의 관은 열굴부분이 열리게 되어있어서 망자의 얼굴을보면서 추도를 할 수 있게 되어있고요.. 1화를 고칠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일본으로 하자!! 고 정했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지금은 그림이 보여요. 와 누가그렸는지 정말 잘그리셨다. // 아 배경이 일본이었군요! 덕분에 많은걸 알게됬어요. 자시키와라시랑 일본은 관이 틀리다는것 등등,,ㅎㅎ
그림이 보이신다니 다행이에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일본은 신학기가 4월달에 시작되더라구요.(한국은 3월달에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이 글에도 신학기가 시작된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벌써 벚꽃이 등장하는 거랍니다. 한국이 배경이었다면 시기상으로 잘 맞지 않죠...
오오, 상당히 일본풍이네요. 허허허- 이런거..좋아해요. 허허허- 이런 분위기들..좋아해요!! 뭔가..엄청난 고백하는 분위기가 되버렸네요, 저는. 허허허-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