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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86
3월4일[사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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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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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m5H5aY-hCw?si=h5-wCK-0f7GTFjkJ
[의정부교구 김동규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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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 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 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 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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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lmznoOH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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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성경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요즘 흥행하는 영화 ‘파묘’(2024)에서 많은 가축과 사람들이 죽어가자 정부는 곰의 소행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결국 귀여운 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살릴까, 죽일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 합세한 주인공 팀은 그 원인이 관에서 나온 ‘험한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진짜 적과 싸웁니다.
현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판단합니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무엇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해석하여 믿음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개신교에서 아무리 성경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틀렸습니다.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은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2베드 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리고 대놓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믿음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십니다. 엘리야 때 하느님께서 기근을 주셨는데 예언자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렙타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 또 이스라엘에도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만 치유해주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의 권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꽃 편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랑을 고백한 대상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통해 구원의 믿음에 이른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분노를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 이뤄지는데 성경은 그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만을 설명하지, 그 믿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면 자기 생각 안에서 맴돌고 성경 공부를 하면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성경을 통해 전달받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2티모3,15)
성경은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가장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지 성경을 파고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각자의 믿음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가장
쉽습니다. 성경을 맹신하다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이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기에 성령님만이 참된 해석자이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완전한 성경 해석자입니다. 성령강림은 각자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내렸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도 계셨고 베드로도, 열두 사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별적 해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성령으로 해석한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성경은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스텔스 전투기처럼 우리 힘만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그러니 그 전투기를 잘 조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 능력을 몇몇에만 부여하였습니다. 스텔스기를 만든 기술자들이 그 운행 능력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자기 조국을 위해 맡깁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맡기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 불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성경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배운 교리를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개신교처럼 성경을 절대화하여 각자가 자신이 옳은 해석을 한다고 하며 수백 개 종파로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은 성경은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은 배척하였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면서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배척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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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일수록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심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수 있듯이, 사소하게 나간 말 한마디가 큰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약점을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예뻐만 보이는 장미의 정원에도 자세히 보면 잎이 찢어진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색이 바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네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자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이스라엘 왕은 먼저 불평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유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의 부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나병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제게 위로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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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복음삼덕으로는 정결, 청빈, 순명이 있습니다. 향주삼덕으로는 믿음, 희망, 사랑이 있습니다.
깊은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있어야 합니다.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손잡이를 움직이면 마중물은 지하의 물을 불러오게 됩니다.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데 필요한 ‘마중물’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병을 고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갈망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죄인으로 비난받던 자캐오는 새롭게 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1999년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매 주일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성당에서 주보도 정리하고, 신자들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마르타처럼 외적인 활동은 많이 하였지만, 연극이 끝나고 텅 빈 객석에 남아있는 배우처럼 신자들이 떠난 성당에 있으면 허전했습니다. 모임을 만들어서 술도 마셨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신학교에서 매 주일 기도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신학교까지는 왕복 200킬로가 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한 시간 기도하고, 교재를 읽고 나누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은 ‘영신수련 지도자 모임’이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처럼, 자캐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것처럼 저는 기도 모임에서 저의 영적인 메마름을 풀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말처럼 기도 모임은 저의 사제생활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더 높은 영적인 갈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교만과 자만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하느님의 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는 교만과 자만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21세기의 교회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교회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유럽교회와 재정적으로 넉넉한 북미교회의 사정이 그렇게 밝은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가 부족해서 성당을 폐쇄하기도 합니다. 성소자가 줄어서 사제들의 고령화가 심각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여유도, 교회의 유산도 ‘갈망’이 없으면 영적인 메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평생 괴롭혀 오던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르단강에 몸을 담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르단강의 물은 시리아에 있던 다마스쿠스 강보다 수질이 더 좋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요르단강에 몸을 담그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믿음을 가졌고 요르단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강물이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나병을 고치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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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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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권위가 있어 모두 놀라는데, 오히려 그 경이로움이 예수님을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놀라운 가르침이 나오자 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믿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1독서에 제시됩니다. 존경받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불치병에 시달렸지만,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 결국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화를 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부하들은 대범하게 권유합니다.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명이 불가능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앎이 과도한 확신으로 왜곡될 때 주변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더구나 그 앎이 비교나 질투, 열등감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앎은 극단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요르단 물은 나아만의 몸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진정한 앎(인식)은 그의 의식과 마음까지 낫게 하여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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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ㄴ-27)
이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들의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자기들은 구원받기로 보장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해서 별로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은 구원을 이미 보장받았다는 바로 그 특권의식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는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7장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하신 일을,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인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규탄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렙타의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고, 엘리야 예언자는 그 과부 덕분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여자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맞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 달리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겼음을, 또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했음을 나타냅니다.>
엘리사 예언자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열왕기 하권 5장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아만’만 고쳐 주신 것은, 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청했기 때문이고, 다른 병자들이 치유의 은총을 못 받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받지 않거나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꾸짖으면서, 동시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고, 구원은 유대인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격만 갖춘다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만을 선택해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화를 내면서(28절)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죄인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마르 14,64) <그렇지만 정당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군중이 함께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법을 집행한 일이 아니라, 그냥 ‘악한 집단 폭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라는 30절의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위엄과 힘에 압도되어서 어찌하지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아직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요한 8,20)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타이르신 일이기도 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이고, 저승의 세력이, 또는 악의 세력이 건들지 못하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신 교회인데, 그리스도교가 망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저승의 세력이 교회를 건들지 못하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의 신앙인답게 살 때만 유효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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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1960년. 살면서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살던 50대의 한 남자가 아르헨티나의 버스 정류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계가 집중하는 가운데 이 남자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가 붙잡힌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때에 유대인을 실어 나르던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운영, 관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샤워형 가스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는 그 죽음의 책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대 앞에서 말했습니다. “제가 살인이라도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한 명의 인간이자 관리였을 뿐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전혀 없습니다. 월급을 받으면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때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행동의 무능.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고향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찾으셨으나,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편견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이에 그분은 “사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하여 예로 드시는 구약의 말씀이 바로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즉,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외면할 때, 주님께서 보살피시는 손길은 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나병이 걸린 이방인의 장군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따릅니다. 이방인의 장군으로서 작고 지저분해 보이는 요르단강에 가서 씻는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편견을 버리고 엘리사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자 그는 거짓말처럼 낫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곧 다른 이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이유는 보이는 것만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작은 고장 출신의 목수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편견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심리학 학자들이 두 명의 학생을 한 명의 교사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 명의 학생은 지적수준이 굉장히 높게 측정된 재능 있는 학생이니 잘 가르쳐 보라고 말했고, 또 다른 한 명의 학생은 학습 부진에 빠져있지만 어떻게든 잘 이끌고 가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테스트가 시행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인지 재능이 있다고 평가된 학생은 높은 점수를, 학습부진이라고 평가된 학생은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사의 평가 역시 상반되었습니다. 학생평가서에는 전자의 학생은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반면, 후자의 학생은 교과과정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해 주제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질문만 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실 교사에게 맡겨지기 전 두 학생의 지적 수준은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동일한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똑같은 수준의 질문이 교사에게는 한쪽은 ‘창의적인 질문’으로, 다른 한쪽은 ‘어리석은 질문’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인간의 편견이 “무능의 죄”를 낫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사가 올바른 의식을 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후자의 학생을 배려하고 그가 왜 학습이 부진한지 살펴보며 오히려 그를 이해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부르는지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발적 무능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 앞에서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여기서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신학적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의 동화,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이가 예절 교육을 받아도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 또한 그러합니다.
머리로만 하느님을 알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이는 결국 기도와 사랑에 무능한 자가 되어 결국 예수님의 도움과 은총에도 아무런 감화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혹시 내가 하느님의 말씀에 다소 무능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강론을 쓰는 저 역시도 아주 부끄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하느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저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듯 예수님이 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기 전에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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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는 장소는 나자렛 회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61,1-2 참조)을 선포하시며 당신의 정체와 파견되신 까닭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놀라움과 의심이었습니다.(루카 4,2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선포에 이어지는 사건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있던 청중에게 당시 통용되던 격언(루카 4,24; 마르 6,4; 마태 13,57 참조)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을 예언자와 동일시하십니다. 이어서 구약의 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루카 4,25-27 참조), 이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사명과 정체를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야는 과부이자 이방인, 곧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파견되었습니다.(1열왕 17,9 참조) 엘리사는 나병에 걸린 이방인, 곧 사회 종교적으로 배제된(레위 14장 참조) 시리아 사람에게 파견되었습니다.(2열왕 5,9-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기름 부음 받은 이(그리스도)로 파견되시어 가장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신분은 두 예언자와 이루는 관계로 증명되며, 거부와 배척이라는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운명으로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파견과 복음 선포에 대한 나자렛 군중의 반응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그들이 보여 준 적대적 반응은 그분의 마지막 때에 온 백성이 보여 줄 모습을 예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의 모함으로 죽음에 이르시지만, 놀라운 ‘탈출’(부활과 승천)로 복음 선포를 이어가실 것입니다.(사도행전 참조)
우리는 모두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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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사건은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두 예언자 이야기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과 기근이 들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보내십니다. 사렙타는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과부와 아들은 한 줌의 밀가루와 그것을 간신히 구울 수 있을 정도의 기름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대접하고, 그 이후에 그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열왕 17장 참조)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십니다. 용맹한 장수였지만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은 사마리아 예언자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하자, 그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루카는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만을 향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 이전에 구약 시대에도 이미 하느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보내시어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되새겨 줍니다. 이것은 유다 민족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었던 당시의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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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4,27)
오늘 복음은 오늘뿐만 아니라, 연중 시기(22주간)에도 봉독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복음이지만 봉독되는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 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의 도입부인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4)라는 말씀도 그저 통속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순시기에 이 말씀을 듣고 있자니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미 암시되고 예정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구약의 민수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사람은 공동체가 진영 밖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15,5) 이는 예수님의 올곧은 말씀과 행동이 고향 사람들의 선택된 민족이란 자긍심과 자존심을 흔들었기에 이런 결과가 파생되었는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바람에 부응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고 거기에다 자신들을 무시하듯이 이방인인 시돈 지방의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를 들먹거리면서 이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신 예수님 언사는 그들의 분노의 기름 항아리에 불쏘시개를 던진 모양새입니다. 이 결과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하셨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실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와 까닭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순시기의 전례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장면은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엘리야 시대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사렙타 마을의 과부만이 기근에서 살아났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치유 받은 사실을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들의 기복적인 신앙과 세속적인 욕망을 흔들어서 영적 눈멂과 잠듦에서 깨우려는 의도였지만,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선택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으로부터 기근에서 구제받을 수 있고, 나병에서 치유 받을 수 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더 연장하면, 세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 신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근이나 질병에서 구제되고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나 행업이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이며 자비의 드러남이라는 것입니다.
기근을 겪는 과부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무엇이 사렙타 마을의 과부만이 굶지 않았으며, 나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그토록 많았는데 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치유 받았을까요? 물론 오늘 독서인 열왕기에서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 받게 되었나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오늘 현대인의 사고 의식처럼 치유가 인간의 정성과 봉헌에 달렸다고 믿었기에, 금은보화를 잔뜩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왕과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온 모습이 인상적이면서 아울러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런 물건과 더불어 시리아 왕의 친서를 받은 왕은 노발대발하면서 옷까지 찢으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다니!”(1열5,7)라는 푸념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 자기 위신이나 체면에 관심을 두는 왕의 불안한 내면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엘리사는 차분히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사람을 통하여 전하면서,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1열5,8)라고 선언합니다. 엘리야는 바로 나아만을 통해서 하느님이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다, 는 사실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곧 모든 치유와 기적은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그 영광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구한 것은 지극히 단순한, 어쩌면 너무도 시시콜콜한 것이었기에 나아만은 이를 거부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의 간곡한 권유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1열5,10) 라는 엘리사의 권고대로 하였더니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는 치유란 아주 특별한 어떤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아주 특별하고 거룩한 것으로 바뀌고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 서서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1열5,15)라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이 치유 받은 것은 그의 지극 정성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자비심과 무한한 사랑의 출현이며, 이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함께 계시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뿐입니다. 이렇게 치유는 하느님 현존의 표지이며 하느님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그러기에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인간은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향한 의탁과 신뢰에 찬 사랑의 고백만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상황에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받기 충분한 자격을 가졌기에, 정성이나 행동이 흡족했기에, 우리에게 한 없이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은혜란,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에게 주시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며 베푸심입니다. 나아만이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가 은혜받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봉헌해서도 아니었고, 다만 어린아이처럼 일곱 번(=완전한 숫자) 요르단강 물에 몸을 씻는 행위(=회심과 정화)를 통해서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낮아짐과 내려감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당신 고향 사람들과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것은 자신들의 뜻이나 의도보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신뢰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살려고 하는 마음가짐 곧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김을 가르치고자 하심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적으로 <성사의 사효성과 인효성>을 아십니까? 성사의 은혜는 인간의 정성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유효하지만, 동시에 성사에 임하는 인간의 정성과 태도에 의해서도 은혜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의 복음에서 인용한 사렙타의 과부와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 저의 약함을 치유하시는 당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가 늘 저와 함께한다면 저의 약함과 병듦이 두렵지 않을 것이며, 저를 통해 세상에 당신께서 여기 함께 계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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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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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소유 사이에서>
루카 4,24ㄴ-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사랑과 소유 사이에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빛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퍼지는 빛을
가두려 하지 않으니
빛은 늘
퍼지기 마련이요
퍼져야 비로소
빛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흐르는 물을
막으려 하지 않으니
물은 늘
흐르기 마련이요
흘러야 비로소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부는 바람을
움켜쥐려 하지 않으니
바람은 늘
불기 마련이요
불어야 비로소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이어지는 길을
끊으려 하지 않으니
길은 늘
이어지기 마련이요
이어져야 비로소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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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자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 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주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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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다>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인 회개뿐이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 43,3)
감로수(甘露水) 같은 ‘시대의 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니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집을 짓도록’ 격려했다.”
“무장해제는 도덕적 의무이다.”
“우리 모두 말해 봅시다.”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Let us all say: “Enough!”, “please!”)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라는 철학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이 책중 나오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동양의 지혜는 역사 없이 존재한다. 이는 곧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며, 특정한 관념에 의해 역사를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역사는 역사를 가질 수 없다. 공자를 비롯해 동양의 현자들이 세상에 대해 그 어떤 편견적인 시각을 투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상 자체에 접근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자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동양의 현자들과는 달리 성서의 현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하느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우선 제1독서의 나아만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의 무지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살펴봅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오늘 제1독서는 나아만의 나병치유와 더불어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의 치유과정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치유에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쨌든 나아만에게는 나병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전화위복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온 소녀가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할 것을 누가 알았겠는지요! 이 또한 우리의 선입견을 깹니다.
사소한 작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됨을 배웁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두려움에 떠는 아람 임금 또한 무지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자기만의 편견과 오해로 상황을 재단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등장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할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문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의연한 엘리사는 참으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합니다. 이또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근본적 무지의 병인 허영과 교만의 치유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 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겸손과 순종의 시험입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들이 그의 굳어진 선입견, 편견, 교만을 보여 줍니다. 나병에 앞서 나아만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교만의 무지의 병이 심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부하들의 간청대로 엘리사의 조언대로 겸손히 순종하여 따랐을 때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집니다. 어린아이 같은 새살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무지의 치유에 순종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으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병도 치유된 나아만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치유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깨어 있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무지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겸손해졌을 나아만은 온전한 건강의 참사람이 되었음을 봅니다. 나아만은 나병과 더불어 무지의 병까지 치유되게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흡사 화답송 후렴 시편이 무지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처럼 들립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시편 42,3)
무지에 대한 답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의 병입니다. 탐욕, 질투, 절망, 원망, 미움, 분노, 두려움,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어리석음, 전쟁 등 끝없이 이어지는 부정적 마음의 현상들 무지로 인해 파생된 징후의 병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들이, 마음속 괴물들을 잘 길들인 이들이 현자요 예언자요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여정, 치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신의 병도 대부분 이런 무지의 병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자렛 고향 회당에 모여있던 고향 사람들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의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편견과 선입견, 질투에 사로잡힌 무지한 인간의 한계요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상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워 겸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세상 연옥에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지로 인한 아비규환,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참 생존경쟁 치열한 참으로 혼란한 세상 전쟁터입니다.
주님은 엘리야 시대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의 예를 들면서, 또 엘리사 시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예를 들면서 고향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는 차별이 없고 일체의 기득권도 무용지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 과부처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처럼 겸손히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점입가경입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화가 잔뜩 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흡사 바위에 계란치기 처럼 무지의 바위처럼 생각되는 나자렛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을 예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떠나시는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유일한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인 회개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의 병의 치유 여정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는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시편 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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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제라도 깨닫는>
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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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루카4,28)
오늘 복음(루카4,24-30)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은 '나자렛에서의 희년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에 대한 말씀과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과 유다인들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두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것도 모든 예언자들 중에 으뜸이신 참예언자이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참예언자이신 예수님께 맡겨진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어 속죄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큰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고, 그로 인해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으뜸이며,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으뜸입니다.
'사순시기가 거룩하고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인 이유'는 이 으뜸 교리와 감사를 다시금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느님과 너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 나의 구원의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모두의 구원에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장애물들을 치워내는 사순시기, 그래서 부활을 잘 준비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정숙(사비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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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AiFbqv33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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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하늘이 알고
땅도 알지만
사람은
모릅니다.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예수님과
예언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편견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
현실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끄러운
믿음은
편견을
내려놓기가
힘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합니다.
선입견을
비워내는
자기성찰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교만에 취해있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편견이 빠져나가는
복음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편견을
뒤엎는 사랑입니다.
못 자국으로
우리의 편견을
들여다봅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구원은
서로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이유가
사랑의 기쁨이듯
우리 만남의
이유가
서로를 향한
선물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그 어떤 사람도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된
그 생각을
뒤엎듯이
사람을 회개로
바꾸어 놓습니다.
환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환영받지
못해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이들이 있기에
복음은 단절이
아닌 이어지는
연속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사순이며
사순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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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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