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겸 전략가. [181~234].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산둥성[山東省(산동성)] 교주만(膠州灣) 서남 해안에 있는 낭야군 양도현(琅邪郡 陽都縣: 기수현(沂水縣)] 출생.
전한(前漢) 말 사예교위(司隷校尉: 치안국장) 제갈풍(諸葛豊)의 후예로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도 태산군(太山郡)의 승(丞: 부장관)을 역임하는 등 호족(豪族) 출신이었다.
또 형 제갈근(諸葛瑾)은 오(吳)나라 손권의 책사로 대장군 완릉후(宛陵侯)에 봉해지고, 동생 제갈균(諸葛均)은 그와 함께 촉한의 장수교위(長水校尉)를 역임했으며 4촌 동생 제갈탄(諸葛誕)은 조조의 수하에 있는 등 형제들이 모두 지략이 있었다.
어머니를 9세 때, 아버지를 14세 때 사별, 형 제갈근은 손권의 수하가 되고 그와 동생 균 및 두 누이 등은 형주(荊州: 후뻬이성[湖北省(호북성)]에 사는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찾아가 그의 손에서 자랐다.
숙부 사후 양양(襄陽) 교외의 융중산(隆中山)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밭갈이와 독서로 세월을 보내면서 석도(石韜)ㆍ서서(徐庶)최주평(崔州平)ㆍ맹건(孟建) 등과 교유했다.
207년,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劉備)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그의 군사(軍師 - 군대의 운용 담당자인 책략가)이던 서서(徐庶)가 그를 와룡(臥龍: 장차 대업을 이룰 누워있는 용)이라면서 소개하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했다.
그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자 유비는 이에 탄복하고 그를 맞아들여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208년 10월, 그는 유비를 권유하여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양쯔강(揚子江)의 적벽(赤壁)에서 벌어진 적벽대전에서 대파했으며 이어 형주ㆍ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만들었다.
221년, 한(漢)이 멸망하고 유비가 국호를 한(漢: 뒤에 역사가들이 촉(蜀), 또는 촉한이라고 부름)이라 하면서 건국하여 제위에 오르자 재상에 임명되었다.
223년, 유비가 임종하면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제갈양의 충고에 꼭 따르기를 유언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유선이 무능할 경우 직접 제위에 오르도록 부탁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225년에 익주군((益州郡))에서 남만이(南蠻夷)들의 반란이 있자, 위·오를 쳐 천하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을 평정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운남(雲南[윈난])으로 진출하여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그 두목인 맹획(孟獲)을 복종케 했다.
그러나 위나라 공략은 여의치 못해 227년의 상용(上庸) 전투에서는 위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에게, 228년 가정(街亭)에서의 전투에서는 읍참마속의 고사일화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부장인 마속이 사마의의 부장인 장합(張합)에게 패해 그 책임을 지고 관직 강등을 윤허받기 까지 했다.
그 후 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 출사표〉를 쓰면서까지 출전한 진창(陳昌) 전투에서도 세불리를 느끼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29년, 무도군(武都郡)에서의 전투에서 위군을 격파, 이 공로로 다시 승상에 복직되고 또 231년에는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사마의가 거느린 위군을 대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여러 번에 걸친 위나라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변변히 싸우지 못하고 실패해 군략의 귀재라는 그의 명성을 무색케 했다.
234년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지막 위의 공격에 나서서 장군 사마 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 산시성[陝西省(섬서성) 미현(미縣)]에서 대진하고 있었으나 와룡의 꿈을 달성하지 못하고 진중(陣中)에서 병사했다.
위(魏)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후주에게 올린 전(傳)·후(後) 〈출사표(出師表)〉는 모두 진심에서 울어나오는 충의가 절절하여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이는 충신이 아니라고까지 평해지는 천고(千古)의 명문이다.
그는 기계제작과 수리에도 능해 한꺼번에 여러 대의 화살이 발사되는 활을 발명했고 목우(木牛)·유마(流馬) 등의 수레를 고안하여 물자를 수송하게 했으며 팔진법(八陣法)이라는 진법도 완성했다고 한다.
14세기의 장회(章回)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그를 거의 초인적인 전략가로 묘사하여 신격화하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희곡과 소설 등 문학작품에도 빈번히 등장한다.
오장원의 전투 중 제갈량이 죽자 이를 눈치 챈 위나라 명장 사마의가 촉군을 추격해오자 강유가 제갈량이 죽으면서 세워 둔 계책대로, 제갈량이 살아있는 듯이 위장하고 반격 태세를 취하자 사마의가 부랴부랴 군대를 돌려 달아나 버리고 말아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이라 했다는 《한진춘추(漢晋春秋)》등의 전설이 생기는 등 그는 지금도 일반인에게는 전략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엄격한 정사(政事)를 펼치면서도 공평한 상벌과 공정한 정치, 청렴하고 충성스러운 인품 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과 아낌을 받은 정치력에 있었다.
그의 사후 중국 각처에 무후사(武侯祠)·제갈묘(諸葛廟) 등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1724년 유교의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고육지계/ 공성계/ 국궁진췌/ 반골/ 사제갈주생중달/ 삼고초려/ 수어지교/ 식소사번/ 언과기실/ 와룡봉추/ 위급존망지추/ 읍참마속/ 이도살삼사/ 적벽대전/ 출사표/ 칠종칠금.
[출처] 제갈량(諸葛亮)|
[출처] 제갈량(諸葛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