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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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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잡소리 한 마당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1992)는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1930- )가 감독에 주연까지 맡았던 서부극입니다. 개봉 당시 미국 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은 영화였지요. 이 영화로 인해 이스트우드는 비평가들로부터 비로소 거물 작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으며, 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93년도 제65회 아카데미는 그와 그의 영화에게 감독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수여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직후엔 미국 언론들도 가세를 하더니 "The Year of King Clint" [<Newsweek 한글판>, 1993. 4. 14, 76쪽] 운운하면서 이스트우드 치켜세우기에 잔뜩 열을 올리더군요. King Clint 랍니다. 이건 극찬 중에서도 특급 극찬 아닙니까? 제왕의 자리에까지 등극했던 1993년의 이스트우드는 정말이지 정말로 행복했을 겁니다. 제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본 것은 영화가 비디오 테이프로 출시된 지도 한참이 지난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에 언급한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실 이 영화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서부극으로 출세한 이스트우드라지만,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서부극 장르에서 도대체 또 무슨 신선한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게다가 각종 시상식을 휩쓴 영화에 대해선 일단 색안경 끼고 대하는 고약한 습관이 있다 보니, 저로선 영화를 보기도 전에 벌써 이 이스트우드 표 서부극에 대해 거부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한 마디로 따봉(!)이었습니다. 왜 미국 비평가들이 이 영화를 그토록 호평하고 나섰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하긴 이 영화는 벌써 1992년 12월에 LA 비평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경력이 있거든요. 아무튼, 기대 밖의 수확에 잠시 흥분한 저는 저의 텍스트 해석이 과연 어느 정도나 타당성 있는 것인지 확인도 할 겸해서 <용서받지 못한 자>에 대한 국내 언론 기사나 유명 평론가들의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이 영화가 왜 잘된 작품인가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은 하나도 없고, 죄다 미국애들 논조를 본떠 이스트우드에 대한 칭송만 자자하거나 수정주의 웨스턴이 어떠니 스파게티 웨스턴이 어떠니 하는 쓸데없는 주변 얘기나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난데없이 '그래서 걸작이다'라는 결론을 내질러 놓는 겁니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이 따위 결론은 독자에게 아무런 설득력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저는 저의 해석이 타당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저는 영화 보기와 그 해석에 있어서도 과학 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의 애너키즘적 인식론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든 방법론은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은 '어떻게 해도 좋다'라는 것이다"라는 것. 이를 저의 경우에 좀 무리해서 적용시켜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따봉이라고 느꼈다면 그 따봉을 어떤 식으로든 언어로 표현만 해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물론 자기의 따봉을 언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저 변죽이나 울리는 얘길 늘어놓을 수밖에 없겠지. 언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따봉이라면 차라리 입을 다물리라. 그나저나 따봉조차 못 느끼는 영화에 대해서도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언어적 발화(發話)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평론가들이 너무 불쌍한 것 같다." 이제 저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느낀 저의 따봉을 여러분께 차근차근 글로써 발화해 보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저의 따봉에 대해 따봉하시든 안 따봉하시든 그건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이겠죠? 1. 과연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이 영화가 타이틀을 통해 정작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용서받지 못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그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속시원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답을 제시한 사람들도 이상하게 영화 텍스트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는 엉뚱한 시도를 하더군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수많은 거짓된 백인 히어로 총잡이를 만들어" 냈으며 "인디언 대량 학살이라는 엄청난 죄를 지었던 아메리카 역사를 오용하여 관객에게 팔아먹은 장본인"인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과 감독들이야말로 바로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듯해 보이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와 아메리칸 웨스턴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청년 세대의 이른바 '의식화'된 시각이 어떻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 텍스트 자체의 이해에는 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답은 분명 텍스트 '안'에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 영화를 만드는 사변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감독한 근래의 영화들, 예를 들어 <퍼펙트 월드>(1993)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앱솔루트 파워>(1997) 같은 영화들을 보면 무슨 심오하고 대단한 철학이나 혁신적인 테크닉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관객을 절대 괴롭히지 않는 편안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물론 이 편안함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가볍기만 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고 잔잔하며 깊이가 있는 편안함입니다. 이는 밑바닥 무명 배우 시절부터 이스트우드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연륜에서 비롯되는 솔직함, 그리고 장르 전통에 대한 장인(匠人)적 성찰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듯 체제 내적(內的)인 인물이 만든 서부극으로부터 헐리우드식 영화나 헐리우드 제작 시스템, 나아가 미국의 강단(講壇) 역사에 대한 비판 내지 도전이라는 이단 의식을 발견해 내려는 것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시도로만 느껴집니다. 각설하고, 여하튼 이스트우드의 감독으로서의 영화 철학에 기대어 판단하건대, 용서받지 못한 그 '누구'는 영화 텍스트 밖에서가 아니라 텍스트 안에서 찾는 게 훨씬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영화 속 등장인물 중 그 누군가가 그 '누구'에 해당하겠지요. 물론 그 '누구'는 영화를 해석하는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영화 속 등장인물 중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문학자인 김성곤 교수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저서 <김성곤 교수의 영화 에세이>[열음사, 1994] 258쪽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란 다름 아닌 주인공 '윌리엄 머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아내의 부탁을 저버리고 다시 한 번 폭력의 세계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빌(윌리엄의 애칭; 필자 註)은 아내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된다. 그러나 이번 여행으로 인해 그는 역설적으로 '용서받은 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번만큼은 죽은 아내가 상징했던 '연약하고 소외된 선한 사람들'을 위해 싸워 자신의 과거를 속죄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서 영화상의 다른 누구, 예를 들어 악질 보안관 리틀 빌이나 총잡이 잉글리쉬 밥, 머니의 흑인 친구 네드, 근시(近視) 총잡이 스코필드 키드, 또는 얼굴에 칼맞은 창녀 등등이 그 '누구'가 되는 것보단 머니가 그 '누구'가 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듭니다. 어쨌거나 머니는 주인공이니까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여전히 부자연스럽기만 합니다. 머니가 이미 죽어버린 아내의 판결(?)에 의해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용서받은 자로 둔갑했다는 주장이나 머니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싸워줌으로써 과거를 속죄할 수 있었다는 식의 주장은 어딘가 억지 춘향 격 해석으로만 느껴집니다. 영화상 어디에서고 머니는 용서받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그는 오로지 돈이 궁한 나머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후의 대결에서 그가 악질 보안관을 잔인하게 쏴 죽인 것 역시 선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이타심(利他心)에서 비롯된 행동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최후의 대결에 대해선 김성곤 교수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의 독해가 가능한데, 이에 대해선 졸고 제2장에서 상술하기로 하겠습니다]. 게다가 김성곤 교수도 지적한 바이지만, 이 서부극에는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즉, 등장인물 모두가 선인이면서 동시에 악인으로도 그려지고 있지요. 피해 당사자인 창녀들 역시 결코 "연약하고 소외된 선한 사람들"로만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정통 아메리칸 웨스턴에서 볼 수 있었던 선과 악의 뚜렷한 이항 대립이라는 비현실적 구도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용서받지 못한 자'란 누구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