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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0 가을호 일상적 삶과 경험의 회복 - 이종문, ������정말 꿈틀, 하지 뭐니������, 천년의 시작, 2010 - 임성구,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동학사, 2010 이 송 희 (시인) 1. 두 개의 언어 풍경 이종문 시인의 ������정말 꿈틀, 하지 뭐니������와 임성구 시인의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는 목소리가 다르다. 이종문의 시집이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풍경과 음각된 삶의 이면들을 들추면서도 해학과 풍자, 유머의 기법을 동반해 재미있는 화법을 구사하였다면, 임성구의 시집은 안정된 정형의 율격 안에서 육화된 기억의 세목을 열거하면서 자연 사물과 서정적 풍경에서 깨달은 감각적인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전자의 시집이 해학과 풍자로 능청스럽게 흔들어대는 말 부림과 풀었다 조였다 하는 긴장미와 반복, 고조된 감정으로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후자의 시집은 자연 사물과 내면의 풍경이 결합하는 가운데, 삶의 성찰에 이르는 과정을 애잔하게 보여준다. 2. 삶의 비의를 들추는 풍자와 해학의 가락 - 이종문, ������정말 꿈틀, 하지 뭐니������, 천년의 시작, 2010 이종문 시인의 시집 ������정말 꿈틀, 하지 뭐니������는 흥미롭다. 시인은 우리 삶의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풍자와 해학의 기법으로 그려내며 감칠맛 나는 화술과 생동감 넘치는 시적 리듬을 선사한다. 해학과 풍자는 ‘웃음’을 동반하여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표현기법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해학이 대상에 대해 갖는 호감과 연민 의식이 긍정적 기제로 작용하는 반면, 풍자는 대상에 대한 날카롭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종문 시인은 ‘모두가 즐기며 웃는’ 해학의 원리를 통해 현실의 모순이나 결함까지도 낙관적이고 관조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가볍지만 날카로운 풍자의 원리로 사회의 부조리를 들추며 개혁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의 시의 주요 화법인 해학과 풍자는 조선후기 양반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양심을 비판하고 모순된 사회의 계급구조를 희화화하는 사설시조에서 특별히 그 미학적 실체를 잘 드러냈다. 해학과 풍자를 동반한 시적 상상력과 날렵한 언어 감각들이 어떻게 삶의 비의(悲意)를 읽어내며 동시에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지 그의 시집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 옛날 전우치가 밥알을 툭- 내뱉으면 낱낱이 나비 되어 천지간을 훨훨 난다 어여쁜 꽃 한 송이씩 고이 물어 올리듯, 아니면 지눌 스님 가랑잎에 虎字를 써, 훅- 불면 범이 되어 산적들을 죄 내쫓고 서늘한 가을 절 한 채 그 자리에 앉히듯, - 「詩法」 전문 우선, 그의 시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시법(詩法)에 대한 그의 시관(視官)을 읽어보아야 한다. “밥을 툭- 내뱉으면//낱낱의 나비 되”고, “지눌 스님 가랑잎에 虎字를 써,//훅- 불면 범이 되”는 것처럼, 그는 오랜 시간 숙련되고 발효된 삶의 경험이 쌓여 그 웅숭깊은 사유가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꿈꾼다. 공자의 말처럼,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시의 경지는 긴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다져진 철학적 깊이와 그간 갈고 닦아 온 언어의 깊이가 만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독자에게 아무리 쉽게 읽히는 시라도 쉽게 써지는 시는 없다.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시법을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오늘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시인들의 고뇌와 정신을 시사한다. 전우치가 도술 부리듯 시를 쓰는 것은 그만큼 일상의 풍경을 살아 있는 언어와 생동감 넘치는 가락으로 풀어가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법은 일상의 슬픔과 생의 한계가 이렇게 전우치의 도술처럼 상상 가득한 웃음으로 극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소소한 일상을 해학과 유희의 공간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부고가 날아왔다. 아지매가 가셨다는, 그냥 리어카에 투욱, 받혔는데 여든 해 쉬던 숨결을 멈췄다는 것이다 영안실 안내판을 찬찬히 살펴봐도 누가 아지맨지 도무지 모르겠다 상주의 이름을 보니 김끝남씨인가 보다 아내에 맏며느리, 어머니에 아지매라 가슴에 단 한번도 제 이름을 못 달다가 처음사 영안실에다 이름을 단 김끝남씨. 살아 몰랐던 것 가시고사 겨우 알고 향불을 피워놓고 두 번 절을 하는 것을 아지매 김끝남씨가 말없이…굽어본다 - 「아지매 김끝남 씨」 전문 이 시의 주인공은 자기 이름이 없다. 이름은 개인의 정체와 신원을 대표하는 호칭으로, 존재를 상징한다. 이름에는 개인의 인격, 개성, 이미지가 형상화되어 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을 말한다. 환경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하쿠’와 ‘치히로’의 은유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감독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이름을 잃어버린 자연으로 대치시키며, 결국 인간이 자연의 본성인 이름을 기억해 줌으로써 회복되는 상황을 그려낸다.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한국의 여성들은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아줌마의 존재로 살아간다. 여성의 삶에 대한 비의는 제목에서부터 해학적 이미지를 풍기며 생생하게 전달된다. 옛날 사대부 집의 부인들은 이씨나 김씨로만 불렸다. 지금도 여성은 결혼하면 자기의 이름이 아닌, ‘새댁’이나, ‘oo 엄마’가 되거나, 중년 즈음 되면, 출신지의 이름으로 대신하며 ‘oo댁’이라고 부른다. 개인으로서, 여자로서가 아닌 가족관계의 일원으로서 호칭이 붙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누군가와의 관계로만 존재했던, ‘김끝남 씨’가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한 것은 고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이다. 여든 해 그녀 생애는 “그냥 리어카에 투욱, 받혔는데”에서처럼 대수롭지 않게 처리된다. “누가 아지맨지 도무지 모르겠다”, “김끝남 씨인가 보다”에서 우리는 떠나간 그녀에 대한 슬픔보다 그녀의 가벼운 존재감에 당황하게 된다. 셋째 수 종장 “김끝남 씨.” 다음에 찍힌 마침표는 “끝남”이라는 이름의 음가와 생의 종지부를 찍는 그녀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전략으로 보인다. 마지막 수 종장에 “아지매 김끝남 씨가 말없이…”라는 대목의 줄임표 역시 “말없이”라는 말과 의미를 같이하며, 죽은 영혼에 대한 비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김끝남’ 씨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 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한 위무와, 존재의 회복을 꿈꾸는 시인의 심정을 담고 있다.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며 너거무이 볼 때마다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 기 와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 「효자가 될라 카머-김선굉 시인의 말」 전문 김선굉 시인의 말을 그대로 시로 옮겨 적은 이 시는 경상도 방언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옛 고사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이 시의 이면에는 윤리와 도덕이 깨어지는 비루한 현장에 대한 비판의식과 고발정신이 깔려 있다. 이 시에서 효자가 되는 길은 어렵지 않다. “안아뿌라 → 만져뿌라 = 효자 된다”라는 등식이 가볍게 성립된다. 첫 수가 아우가 어머니에게 취할 행동이라면, 둘째 수는 어머니가 취할 행동이다. 아우의 행동과 어머니의 반응은 김선굉 시인이 아우에게 건네는 말 속에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써진 이 시는 “너거무이”, “만져뿌라”, “효자 된다”의 반복과 잦은 쉼표의 사용, 경상도 방언의 빈번한 서술로 시적 흥치와 율동감을 선사한다. 이종문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흥취와 은근한 경치에 대한 비판의식은 오랜 시간 대상에 대한 응시와 내면의식의 결합으로 다져졌을 정신적 소산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칼국수엔 칼이 없다”는 발상으로 일상을 스케치한 「칼국수를 먹으며」, 초파일, 절집에 가서 밥이 동나 못 얻어먹고 오던 날,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식당과 화장실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라는 유머를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밥」을 비롯해 “짧은 봄날 며칠 사이”, 그 잠깐 사이에도 “비아그라 공장들이 신나게 돌아가고/그것도 가짜 공장이 더 신나게 돌아”간다는 표현을 통해 자본에 눈이 멀어 양심을 사고파는 사회를 비판하는 「사이」에서도 일상의 소소한 풍경에서 발견한 것을 해학과 풍자로 노래한다. 삶의 심각한 표정들을 웃음으로 넘기다가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시인의 매력이 묻어 있는 시집이다. 3. 투명한 마음을 꿈꾸는 유년의 시작노트 - 임성구,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동학사, 2010 임성구 시인의 시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는 “오랜 시간 시(詩)의 감옥”에서 보낸 매일 매일의 자성적인 기록이다. 오랫동안 시의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그는 내면에 “촘촘히 박혀 있던 쇠창살의 녹슨 가시”를 제거해 갔다. 16년이라는 꽤 긴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번 시집은 “푸른 노래가 살고 있던 집”(「갈치」)에 대한 서사이며, “오롯하게 한 길 비추는 아버지의 눈빛”(「대(竹))과 보고 싶은 어머니가 있는 생의 근원지를 향한 그리움의 원형이다. 여기에 “가식적인 그말/혈전으로 쌓인 것을”(「필터」) 성찰하는 시인의 내면이 그가 오래 서 있었던 골목의 쓸쓸한 풍경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집은 “투명한 마음을 꿈꾸는 유년의 시작노트”(「자귀꽃」)인 샘이다.
너무도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불안한 밤 추위에 떨며 달력을 뜯어낸다 별자리 더듬는 키 작은 바람 모로 누운 여러 날 가슴 졸이며 쓴 시(詩)가 빗물에 번지던 날 번득이던 부호마저 낙뢰로 묻혀 버리고 그런 날 낮도 밤 같아 이정표가 안 보인다 수렁을 빠져 나온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물기둥을 보았다 까만 얼굴 환한 웃음도
한 됫박 별물을 퍼올리면 갈증도 저리 빛난다 - 「시작(詩作)」 전문 그의 시의 출발은 골목이다.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을 표상하는 골목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새 골목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우리는 골목과 골목을 지나 길을 찾아간다. 시인에게 이 골목은 시(詩)의 감옥이다. 누가 가둔 감옥이 아니라 스스로 갇힌 감옥이다. 시인은 “걸어온 순간순간들이 얼음꽃을 피우는 시간”일지라도 “묵언으로 일생을 꿈꾸며 사는 누에”(「오디」)처럼 오랫동안 버틴 것이다. “너무도”라는 부사는 녹슨 가시를 제거하는 오랜 시간에 대한 자책에서 온 듯하다. “불안한 밤, 추위에 떨며 달력을 뜯어”낸다. 해가 바뀔 때마다 각오는 새로워지고, 시인은 쇠창살의 녹슨 가시를 또 하나 제거해 간다. 별자리를 더듬어 근원적인 생의 자리를 더듬고, “모로 누운 날들”이 셀 수 없이 지나간다. “가슴 졸이며 쓴 시(詩)가 빗물에 번지던 날”, “부호마저 낙뢰로 묻혀 버”리던 슬픔은 낮도 밤처럼 어두워지는 골목으로 더 깊숙이 몰아 버린다. 이정표 하나 찾지 못한 어두운 골목에서 불안하게 떨고 있던 시인은 “수렁을 빠져 나온/아프리카 난민촌에서”, “물기둥”과 “까만 얼굴 환한 웃음”을 본다. “한 됫박/별물을 퍼올”려 갈증도 빛나는 순간에 “몸을 부비며 향기나는 시”(「산행」)를 만날 수 있다. 오랜 기다림 뒤에 얻어지는 시 창작의 과정을 과거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시다. 솜털이 꼿꼿이 일어서는 저녁 무렵 굳은살 박인 하루를 얌전히 내려놓고 들다 만 술잔을 곁에 둔 채 거울 속에 잠이 든다 엘리스가 사는 나라엔 사과빛 하늘이 있고 단풍물 활활 태우는 천 개의 달이 뜨고 탈의한 힘센 근육이 천 송이 꽃을 피운다 빈부 격차 없는 세상, 언제나 봄인 그 곳은 젖은 달이 없고 풀잎도 젖지 않는……, 보송한 풀꽃 침대의 꿈 도화(桃花) 피어 천지 환하다 눈 뜨고 싶지 않는 날, 천 개의 거울 조각이 등을 핥퀴어 울었다, 만(萬) 방울 피를 흘리며 조용히 통증을 잠재우던 거울 속이 그립다 - 「꽃잠-어느 노동자의 노래」 전문 시인은 골목 어귀에서 일용직 현장에서 돌아온 어느 노동자의 노래를 듣는다. “굳은살 박인 하루”를 내려놓고, “들다 만 술잔을 곁에 둔 채” 화자는 “거울 속”에서 잠이 든다. “거울 속”은 “엘리스가 사는 나라”다. “거울 속”에는 “사과빛 하늘”, “천 개의 달”, “천 송이 꽃”이 있다. 그곳은 “빈부의 격차가 없는 세상”이며, “언제나 봄”이다. 그러나 거울 밖에는 “젖은 달”이 있다. 거울 속과 거울 밖의 대립적 진술을 통해 시인은 어두운 골목의 풍경과 비루한 노동의 현장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 “보송한 풀꽃 침대의 꿈”이 존재하는 “거울 속”은 어느새 도화(桃花)가 피어 천지가 환하다. 하지만, 현실은 “등을 할퀴며” 우는 시간의 연속이며, “만(萬) 방울의 피를 흘리”는 공간이다. 조용히 통증을 잠재울 수 있는 공간은 “거울 속”의 잠뿐이다. 시인은 골목의 어두운 내부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상처를 위무해주고 고통을 매만져 주는 자들이다. 그가 오랜 시간 골목에 서서 바라본 풍경은 주변에서 밀려나 타자화된 존재들이다. “벼랑 끝,//두 그림자가”(「단풍 무덤」)를 붙잡아 주고, “지워야 할 것, 많은 세상/마른 밤 홀로, 손 모으고”(「층층꽃」) 기도했던 시간은 이들에 대한 가없는 연민과 애정의 마음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 시는 “거울 속”과 “거울 밖”의 이항적 공간 대립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밀도 있게 구성한, 시적 사실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머니 그리워서 강가에 나온 날은 바람에게 잔을 건네고 소주 한 잔 마신다 가시에 찔린 탱자꽃 무명 손수건 닮았다 서걱이는 갈대에 누운 부질없는 약속들 모래에 새긴 글씨처럼 사라지는 낙동강가 새들은 사과 한 알 베어 물고 허공을 날아간다 가족의 밥그릇이 허기지는 해질녘 젖을 풀며 흐르는 강물 한 술 뜬다 모천의 붉은 노을 속 환하게 웃는 어머니 - 「흑백의 시간」 전문 시인에게 시의 근원적 뿌리는 어머니이다. 어머니 생각에 강가에 나온 날, 시인은 바람과 벗 삼아 소주를 마신다. “가시에 찔린 탱자꽃”은 어머니의 “무명 손수건 닮았다”. 자유연상기법에 따라 그리운 어머니를 환기시키고 있는 이 시는 이미 흑백이 되어 버린 시간을 되새기고 있다. 이미 흑백이 되어 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오래 전 떠나간 색 바랜 시간은 “부질없는 약속들”이며, “사라지는 낙동강가”이며, “허공을 날아”가는 새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저물녘 하늘가 “붉은 노을 속”에도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는 존재이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그림자와 같다. 시인이 회귀하고 싶은 그리움의 원형인 어머니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며 현재의 시․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가령, “새들이 신록으로 노래하는 우포에 와서”도 시인은 “눈감고 까만 모유 입안 가득 넣어 보면”, “몸속/부화한 유충들이/어머니 숨결 더듬는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그렇다. “까만 모유”에 비유되는 “오디”는 시인과 어머니를 잇는 매개물이다. “더 이상 과거이기를 포기한 물렁한 몸”(「물컹한 그리움」)이 시인의 내면 깊숙이 들어 와 있다. “옛 고향 울타리 너머”(「탱자꽃」)를 기억하고, “흉터뿐인 그 이름도 한번쯤 불러”(「질경이」)주며, “긴 겨울 날//결빙의 말”(「말의 균열」)들을 녹여주는 일이야말로 바로 그가 오래 시간 골목에 서 있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 이송희 프로필 1976년 광주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환절기의 판화������ 전남대 국문과 박사 전남대․조선대 국문과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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