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의 사진편지 제907호 (08/11/6/목)
<목요 기획>
김용만의 주말걷기 음악 파일(9)
관부연락선이 왕래했던 현해탄 (08/10/11 일본 후쿠오카쪽에서 함수곤 찍음)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글 : 김용만
연락선(連絡船)은 떠난다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 오케레코드, 1937년)
쌍고동 우러우러 連絡船은 떠난다
잘가소 잘있소 눈물저진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생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파도는 출렁출렁 連絡船은 떠난다
정든님 껴안고 목을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생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바람은 살랑살랑 連絡船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님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1. 관부 연락선에 어린 민족의 애환
일제 강점기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간을 오가게 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우리 입장에서는 부관연락선이라 해야 옳은 표현이 되겠지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제일의 해양 간선 교통로인 한일노선에 투입된 기간 교통수단이었다.
이 배는 일본인에게는 식민지 개척으로 열려진 새로운 토지, 직장을 찾아가는
희망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식민경영 혹은 본토와의 연락 용무로 오가는데
이용된 편리한 것이 되기도 하였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징용으로 끌려가거나
토지를 잃고 고향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차별 받으면서 타야 했던 원한 어린
교통수단이었다.
1905년 첫 취항 이후, 부산의 부두에서 수많은 형제자매, 친지들을 눈물로
떠나보냈던 관부연락선에 대한 한 많은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진지 30여 년이
지난 1937년, 이 관부연락선에 대해 우리 민족이 지녀온 한과 비감을 그대로
표현해낸 노래가 나왔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연락선은 떠난다’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였다.
유행가는 “그 시대와 사회의 눈물‘이랬든가, 당시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맺혀 있던 관부연락선에 대한 애환이 작사가 박영호의 시적 정서로
표현된 적절한 노래 말과 김해송(김송규)의 격조 높은 멜로디, 그리고 참신한
신인 여가수 장세정의 청초하면서 색기(色氣)어린 목소리에 실려 나왔던 것이다.
거기에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인기 변사 서상필의 넉살 좋은 입담으로 읊어내리는
대사까지 넣어 이 노래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으니 당시 사람들은 이
’연락선은 떠난다‘에 빨려들어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음반 판촉의 성공을
위하여 세심한 신경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그 대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대사)
여기는 항구, 추억의 보금자리
진정코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가는 그대여,
오! 내 얼굴엔 눈물이 퍼붓소이다,
잘 가시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이것은 선물이오니
변변치 못한 손수건이오나/ 이것으로 눈물을 씻어 주세요,
언제나 잊지 마시고 영원히, 영원히
고맙소이다, 안타까운 이별에 주고받는 선물이
내 장부의 가슴을 쥐어뜯는구려,
그대 성공하시어 조선의 디아나더빈이 되기를 바라오.
(출처;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영남일보)
‘연락선은 떠난다‘ 음반은 나오자말자 크게 히트하여 경향 각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가수(歌手) 장세정의 애끊는 목소리에 흐느끼는 듯한 숨소리,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 그리고 울음섞인 비음에 흐느끼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이 노래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너무나 잘 맞아
(김명환, 충청투데이) 음반은 불티나듯 팔려나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부산 부두에서 가족들을 보냈던 자신의 비감어린 경험들을 이 ’연락선은
떠난다‘에 오버랩시켜 부르면서, 식민통치 아래 울분을 삭이다 못해 체념상태에
있던 당시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억울함과 답답함을 속 시원하게 풀 수 있었
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관부연락선에 자기 가족을 직접 떠나보냈거나, 아니면 주위의
친지나 이웃들이 가족을 떠나보낸 슬픈 사연들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관부연락선에 서린 애환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시의 사회적
상황 아래서 ’연락선은 떠난다‘ 음반이 나왔으니, 모두가 이 노래에 실린 사연이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생각하여 이 노래에 빠져들었고, 민족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10년 전, 가수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곡에 가사를 붙인 노래 ‘사의 찬미’를 동경에서 녹음하고 돌아오던 중, 관부연락선
갑판 위에서 연인인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관부연락선에 대한 감회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이 노래 한곡으로써 평양에서 올라온 열일곱 살의 신인 장세정은 바로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라, 당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뜨고 있던, 같은 오케레코드
전속인 이난영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가수겸 연주자, 작곡가로서 천재적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호월, 손목인에게 밀려 기회를 잡지 못했던 김송규(김해송)는 이 노래로
명실공히 일류 작곡가의 위치에 올랐다.
1934년 ’타향(살이)‘, 1935년 ’목포의 눈물‘, 1936년 ’짝사랑‘ 등 매년 최고의
히트곡을 내놓아 음반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오케레코드는, 1937년에도
이 ’연락선은 떠난다‘를 내놓음으로써 음반 가요 시장의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물론 다음해에도 오케레코드는 ‘바다의 교향시’(김정구),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등의 명곡을 연이어 내놓아 부동의 1위 자리를 변함없이 굳혀나가게 된다.
2.'평양이 낳은 가희(歌姬) 장세정(張世貞1921-2003)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장세정은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생후 두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갔고, 본 적도 없는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군이 되었다고
하지만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장세정은 줄곧 조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장세정은 평양경림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화신백화점의 상신악기점
점원으로 취직해 있었는데, 노래 잘 부르는 처녀로 주위에 알려져 있었다.
드디어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가요콩쿠르에서 그녀의 노래솜씨를
보여줄 기회를 얻어 1등을 하였다.
가요콩쿠르에서 솜씨를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을
만날 수 있었고, 이 사장은 그녀를 면담한 즉시 오케의 전속으로 스카우트하였다.
오케레코드에서는 서울로 올라온 장세정에게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시키면서도
바로 취입시키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녀가 급박하게 준비한 전국 가요콩쿠르
대회에 나가 우승하는 과정을 한번 더 거치도록 하여 전국 제일의 가수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피알을 한 후에야 ‘연락선은 떠난다’를 데뷔곡으로 취입하도록
했던 것이다.
음반을 소개하는 가사지에는 '평양이 낳은 가희(歌姬)'라는 선전문구를 넣었다.
“색향 평양에서 온 전국 제일의 여자 가수‘라는 이미지를 강조하여 그녀의 인기를
올려놓기 위한 배려였다.
이 노래는 나오자말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장세정은 이 곡 하나로
일류가수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데뷔곡이 바로 히트곡이 되는 경우는
흔한 예가 아니었는데 장세정의 경우는, 본인의 탁월한 음색과 가수로서의 역량
외에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의 세밀한 배려와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철 사장은 장세정을 크게 신뢰하여 그녀의 가수로서의 입신출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핵심멤버가 되게 했다. 그렇게 되니 먼저
기반을 잡고 있던 이난영의 심기를 많이 불편하게 하여 둘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지경에까지 갔다고 한다.
장세정에 대한 이철 사장의 배려와 지원은 결국 나중에 장세정과 이철 사장과의
관계가 연인관계로까지 진전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도록 했고, 이에 장세정은 유학
간다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피신하여 일년동안 공부하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장세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의 원로 엔카(演歌) 가수로부터 가창 수업을
받는 등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였고, 하리타세이테이(張田世貞)이라는 이름으로
음반 취입도 하였다.
영남대 이동순 교수는 장세정 창법의 특징을 “죽죽 뻗어나가면서도 가볍게 코에
걸리는 달콤함을 속으로 간직한 창법, 혹은 청초한 색기(色氣)를 느끼게 하는
창법”이라 했는데, 사실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어보면 이난영의 음색에 보다
젊은 색스어필이 보태어진 것 같은 감이 든다. 정말 그녀의 노래에서는
‘청초한 색기’를 느낄 수 있다.
‘연락선은 떠난다’가 크게 히트하자 상술 좋은 오케레코드측은 재빠르게
‘연락선은 떠난다’라는 악극의 대본을 써서 각색을 하고 조선악극단에서 공연을
하도록 했고, 전국 순회공연에 나가도록 했다.
따라서 장세정은 공연무대에도 많이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연락선을 떠난다’
를 부르면 관중들은 1절에서부터 따라 부르다가 3절에 이르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마치 1928년부터 몇 년 동안 이애리수가 ‘황성옛터’를 부를 때의
상황과 같은 장면이 이 때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장세정은 ‘37년부터 ’41년까지 많은 인기곡을 내놓으면서 인기가수로서의
지위를 굳혀 갔다. 그 시기의 대표곡은 ‘연락선은 떠난다’ 외에 ‘분홍 손수건’
‘아시나요’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김정구와 듀엣으로 부름)' '불망의
글자'(1937), ‘처녀야곡’ '토라진 눈물' ‘외로운 화장대‘(1938), ’항구의
무명초‘(1939), ’잘 있거라 단발령’(1940), ‘역마차’(1941) 등이다.
그러나, ‘42년부터 광복되는 시점까지는 일제의 전시 비상체제 강화에 의한
가요에 대한 통제로 인해, 과거와 같은 애정이나 눈물로 포장된 민족의 대중
가요가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신곡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장세정도 이렇다 할 노래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독려하는 ’지원병의 어머니‘(1941), ’반도의 아내‘(1942), ’아가씨 위문‘ ’지원병
의 집‘(1943) 등과 같은 군국가요를 불렀다.
당시의 소위 인기가수는 거의 모두 군국가요 가수로 동원되었기에 최고의 인기
가수 장세정도 예외 없이 군국가요를 부르는 가수 그룹에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음반 취입 시설이 없어 가요계를 통 털어 신곡이 거의 없었고
‘46년부터 음반에 취입된 곡들이 나오게 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수들은 대부분이 무대공연 활동을 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장세정도 이 시기에는 이렇다 할 신곡을 내놓지 않았지만, 김해송의 KPK악단에
참여하여 뮤지컬 플레이 형식에 흡사한 작품 ’천리춘색(千里春色, 1947)‘ ’천국과
지옥(1948)‘ ’카르멘 환상곡‘(1948), 그리고 오페레타 형식무대 ’로미오와
줄리엣‘(1949), 가극 ’살로메‘의 번안극 등에 출연하여 그녀의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을 과시했다.
KPK악단원
광복 후 장세정이 내놓은 인기곡으로서는, 가요계에서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는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48)을 비롯하여 ‘백팔염주’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49)가 있고, 1 .4 후퇴 시 대구에 피난 내려가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취입한 ‘고향초’(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샌프란시스코’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즐거운 목장’(나경숙 작사, 박시춘 작곡)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고향초‘는 처음에 송민도가 불렀던 곡이지만, 장세정이 부른 후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5, 60년대에는 장세정은 신곡 취입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비롯하여 이난영, 백난아 등이 불렀던 옛 인기곡들을 재취입한 음반을 내놓기도
하여 원숙한 음색으로서 중년가수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인 1966년에는 한일친선문화예술단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교포위문 등의 공연활동을 하고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출반하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곡 ‘연락선은 떠난다’는 ‘렌라쿠센노우타(連絡船の唄)라는 이름으로 이미
그녀가 일본에 유학했던 시기에 취입하여 일본에 알려져 있었던 인기곡이었지만,
이때 다시 취입하였다.
그러나 장세정이 과거에 불러 히트했던 대부분의 노래가 월북작가인 조명암,
박영호가 작사한 것이거나, 납북되었으나 행방을 몰랐던 김해송(김송규)이 작곡한
것이었기에 금지곡이 많았다. 때문에 장세정은 무대공연을 비롯한 가수로서의
활동을 하지 못하는 뼈저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생활수단을 잃는 것이고 생의 보람을 잃는
것이었다. 거기에 고혈압 질환까지 앓게 되어 장세정은 지병과 스트레스가 겹쳐친
우울증을 앓아야 했고, 낙이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는 옛 동료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는 충무로의
카나리아 다방에 나와 옛날을 회상하면서 소일하기도 하지만, 가수가 자기가
불렀던 옛 인기곡을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1973년 미국으로 이민가는 길을 택하였다.
미국에서는 L.A.에 정착하여 현지 해외교포 위문공연에 나서기도 했고, 가수로
데뷔하여 41년이 지난 시점인 1978년에는 이민 가 있던 가수들, 현지 연예인 등과
함께 ‘장세정 은퇴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2003년 2월 16일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여, 할리우드 포레스트론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때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사무실에 빈소를 마련하여 추모식을 거행하고 한 시대를 빛냈던 원로 가수의
명복을 빌었다.
장세정은 1940년대 초에 미국에서 돌아온 하와이안기타 연주자이면서 열렬한
펜이었던 한정식(조지 한)씨와 결혼하여 한영, 한웅, 한세란, 한성씨 등 3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차남 한웅씨는‘60년대의 전위적 소울그룹이었던 포가이스를 거쳐, ‘70년대
초, 록그룹의 황금기를 이끌며 ‘초원’ ‘당신은 몰라’ ‘초원의 빛’등 외국곡이 아닌
우리의 창작곡을 내면서 한국 록 음악사에 결정적 공헌을 했던 히파이브,
히식스(He5, 6)의 베이스키타리스트로 활약한 분이다. 그도 아마 6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3.'연락선은 떠나다'를 작곡한 만능음악가 김해송(金海松, 1911-1950)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대중음악인 중에 천재적 음악성을 발휘하거나 독창적 음악
창작 활동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파장을 일으켰던 분으로서 손목인, 박시춘,
이재호를 드는 분이 많지만, 김해송도 그 반열에 놓아야 할 재능있는 대중음악가
중의 한분이다.
김해송
본명이 김송규(金松奎)인 김해송은 1911년 평남 개천에서 출생하여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다나다가 공주로 와 공주보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의
조지(上智)대학 철학과를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출생지가 공주라는 설도
있고 공주사범을 졸업했다거나 일본에서 도요(東洋)대학을 다녔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게 밝혀줄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숭실전문학교 시절부터 기타 연주 등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하여 1935년 오케레코드의 문호월을 찾아 테스트를 받았으나 여의치
못하여 손목인의 권유로 조선악극단의 키타리스트로 들어갔다.
손목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김해송에게 노래 부르는 것보다 작곡을 배우라고
권하면서 작곡수업을 받도록 하였는데, 머리가 좋고 재질이 있어 날로 실력이
늘었다고 했다.
가수로서 보다 작, 편곡, 연주, 연예기획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던 그의
역량은 이때 벌써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항구의 서정'
(남풍월 작사, 김송규 작곡)과 ‘웃지를 마셔요’(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두 곡을
데뷔곡으로 발표하였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하여 가수로서는 주목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무대공연에서 급조된 보컬의 멤버로서, 자신의 창작곡 발표회와 음반
취입을 통하여 노래 부르는 것을 계속하였다. 그가 부른 노래는 대부분이 스스로
작곡하고 직접 부른 것이어서, 우리 가요사에서 그는 김용환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역량있는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매김 되기도 한다.
연주, 작, 편곡, 가수활동 등 모든 부문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어 오던
그에게, 1936년 말경,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그에게 ‘연락선은 떠난다’(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를 작곡하게 하고, 공들여 키운 장세정으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 그것이다.
신인발굴과 인기곡 제작 및 마케팅에 남다른 혜안을 가졌던 이철 사장이
장세정이라는 매혹적 신인가수와 만능 음악인 김해송에게 희망을 갖고 배팅했던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1937년 2월에 내놓은 음반은 불티나듯 팔려나갔고,
김해송의 입지는 넓어졌다.
김해송
그가 가요계에 입문하여 1950년 별세할 때까지 불과 15, 6년 남짓한 기간에
약 200곡을 작곡하거나 불렀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악극 소재로
작, 편곡한 수많은 곡들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이다.
그가 남긴 노래 중 우리의 기억에 남는 인기곡은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1937)’
‘오빠는 풍각쟁이(박향림, 1938)’ ‘다방의 푸른꿈(이난영, 1939)’ ‘코스모스탄식
(박향림,1939)’ ‘항구의 무명초(장세정, 1939)’ ‘잘 있거라 단발령(장세정, 1940)’
‘울어라 문풍지(이난영, 1940)’ ‘화류춘몽(이화자, 1940)’ ‘선창(고운봉, 1941)’
‘역마차(장세정, 1941)’ ‘어머님 안심하소서(남인수, 1942)’ ‘고향설(백년설, 1942)’
’울어라 은방울(장세정, 1948)’ ‘백팔염주(장세정. 1949)’ 등이 있다.
그 외에 그가 작곡하고 직접 부른 노래도 많은데, 재즈곡으로 이난영과 듀엣으로
부른 ‘감격의 그날’(1936), ‘연애함대’(박시춘 작곡, 1937), 솔로곡인 ’밀월의
코스‘(1937), ’꽃피는 녹지‘(1938)‘, ’청춘계급(1938)‘ 등은 당시의 세계의 재즈
음악과 흐름을 같이 한 탁월한 우리의 재즈 음악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작곡하고 부른 ’개고기 주사(1938)‘ ’모던기생 점고‘(1938),
’나무아미타불‘(1939)과 같은 만요도 음반으로 전하여지는 것이 많다. 위의 인기곡
리스트에 있는 ‘오빠는 풍각쟁이’는 당시 만요의 대표곡이다.
이들 노래 중에 ‘청춘함대’는 1999년 영화 ‘해피앤드’에 전곡이 OST트랙에
채택되어 리바이벌 되었고, ‘오빠는 풍각쟁이’는 2004년에 나온 명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삽입된 곡으로 유명하다.
위에 든 노래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해송은 트로트풍의 노래뿐 아니라, 재즈나
블루스, 스윙과 같은 그 시기에 흔치 않은 음악 장르와 만요, 신민요까지를 섭렵한
만능 음악인이었다. 대중음악에서의 올라운드플레이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김해송의 진가는 뛰어난 연주자로서 무대 연출 분야에서 쌓은 탁월한
역량에서 볼 수 있는데 , 무대 활동의 특성상 그 활동 자취가 남아있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사실 그가 KPK악극단을 이끌면서 낸 악극들과 뮤지컬 작품들은 매우 전위적이고
예술성을 지닌 것이 많았는데, 지금 그 작품들의 면모를 편린이나마 볼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해송
김해송은 1937년에 이난영과 결혼한 후에도 조선악극단의 지휘자 겸 작곡자로서
활약하다가, 1938년에는 콜럼비아로 적을 옮기는데, 이 해 한해에 20 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거나 부를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여 과히 그의 전성기라 할 정도였다.
이때 그는 콜럼비아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황금좌(黃金座)의 밴드 리더로서 지방순회
공연을 하기도 한다.
콜럼비아에서 일년 남짓 보낸 김해송은 다시 오케레코드로 가서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지만, 이듬해부터는 전시체제로 들어간 시국의 영향을 받아 창작활동이 위축되고
공연활동, 특히 지방 순회공연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그는 코바야시히사오(小林久男)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으로‘이천오백만
감격’(남인수, 이난영 노래), ‘반도의 처녀들’과 같은 친일가요를 작곡하게 된다.
1946년에는 백은선(무용가), 김정환(무대미술가)과 함께 KPK 악단(KPK는 김해송,
백은선, 김정환의 이니셜에서 따 붙인 것)을 설립해, 이난영, 장세정, 윤부길
(가수 윤항기의 부친) 등 ‘올스타급’ 라인업과 함께 미군 구락부와 극장 쇼를
주름잡았다.
그는 민요, 라틴 음악, 트로트, 클래식, 1920~30년대 시카고 재즈 및 스윙 재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악 편곡과 연출로 일제시대 일본인과 해방 이후
미군들에까지 극찬 받았다.
특히 김해송은 KPK에서 오페라 ‘투란도트’, ‘카르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원용해 뮤지컬을 실험한 무대 예술의 전위였다. ‘뮤지컬의 선구자’라는 평은 비단
어느 가요 평론가의 사견에 머물지 않는다.
김해송이 해방 후 대중음악협회의 창단총회에서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점은 당시
그의 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용우, 인터넷한겨레, 2005.05.25(수) 17:52]
6. 25 전쟁 직전에 김해송, 이난영 부부는 정원이 딸린 넓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유모를 여럿을 둘 정도로 여유롭고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6. 25 사변은 그걸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김해송이 인민군에게 잡혀 북송되는 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사망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 가정의 행복이 무너지고 유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도 큰 불행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재즈, 스윙 등에 감각과 조예가 있는
그가 계속 활동하지 못함으로서, 한국대중음악이 트로트 일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기를 늦추어버렸다는 것은 우리 대중음악 발전면에서 본다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해송은 1937년 이난영과 결혼한 후 5남7녀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기도 하고
9남매를 두었다고 하기도 하나, 1.4 후퇴 시에는 이난영이 7남매를 거느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그 자녀 중에서 김 시스터스와 같은 세계적 보컬이
나온 것은 그 부모의 재능을 본다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녀들은 지금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4.'연락선은 떠난다'를 작사한 박영호
‘연락선은 떠난다’의 작사자는 박영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보는 대부분의
노래 책에는 박남포 작사로 되어 있는데, 박남포는 반야월(진방남) 선생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월북작가의 작품을 살리기 위해서 짜낸 변칙 때문이다.
노래를 살리기 위해서 만능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가사를 약간 바꾸고 작사자의
이름도 그의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노래룰 살리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은방울자매, 김용임 등이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와 같이 ‘60년대 이후
취입된 것은 모두 박남포가 개사한 것인 것이다.
참고로 박남포가 개사한 가사를 아래에 적어본다. 오리지날 가사와 비교해 보면
교묘하게 자구나 문장을 바꿔 놓았지만, 개사하는 분들이 원가사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했음을 읽을 수 있다.
(개사한 가사)
연락선 고동소리 울어울어 주는데
잘가소 잘있소 이별슬픈 밤부두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마세요)울지를 말아요
파도는 출렁출렁 이가슴을 치는데
정든님 부여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임자만을 오로지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없이 정처없이
떠나갑니다 (울지마세요)울지를 말아요
(오리지날 가사)
쌍고동 우러우러 連絡船은 떠난다
잘가소 잘있소 눈물저진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생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파도는 출렁출렁 連絡船은 떠난다
정든님 껴안고 목을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생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바람은 살랑살랑 連絡船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님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없이 지향없이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어요
우리 가요의 가사는 언제부터인가 2절만 있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50년대의
노래만 해도 대부분이 3절까지 있었다. 일본의 엔카(演歌)의 가사는 지금도
원칙적으로 3절까지로 되어 있다.
어느 것이 좋은가는 수요자인 고객들이 판단해야 할 일이지만, 2절로만 되어 있는
노래가 지루하지 않아 좋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왜 이런 걸 꺼내 얘기하는가 하면 이 '연락선은 떠난다'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월북작가의 가사를 개사하는 분들이 3절을 개사할 수고를 덜 수 있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원래의 노래가 지닌 의미와 상징을 살려가면서 개사하기 위해 고심하기 보다는
차라리 창작하는 것이 덜 고생스럽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은 비록 나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3절이 없어짐으로써 노래의 클라이맥스가 없어져버려 원래의 의미가
상실되고 그에 따라 고객이 외면하면 노래의 수명은 다할 수밖에 없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장세정이 부르는 ‘연락선은 떠난다’를 따라 부르던 관객이 3절에 가서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던 식민지 시절의 그 괴로워하던 낭만이 이제는 없어져
버려서인가?
노래에서 낭만을 찾아보려던 우리들과 같은 구세대의 감상은, 2절 밖에 없는
노래를 붙들고 옛날과 같은 낭만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어디 기댈 언덕조차도
없어져 버렸기에 노래로서 아픔을 풀 수 있는 그 순진스럽던 낭만은 이제 세월과
연륜 속에서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인지? 그래도 한곡 부르면서 느끼고 싶은 낭만은
남아 있는데.......
6.25 사변 이후 월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 소설, 노래 할 것 없이 남한에서
소통되지 못하도록 했다. 노래는 작곡자가 월북한 것은 물론 작사자가 월북한 것도
금지되었다.
노래의 3 당사자 즉, 작곡자, 작사자, 가수 중의 어느 한분이 월북했다면 어김없이
그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던 것이다.
월북 작가의 금지곡은 작곡가보다도 작사가에 의한 노래가 많았다. 작사가들은
대부분 문학가이었기에 이들의 문학작품이 금지되면서 노래도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사랑을 받던 노래를 살리기 위해서 작사자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고 가사를 약간 바꾸거나 하여 노래를 살리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금지곡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월북 전까지 가장 많은 노래 말을 지어 내었던
조명암(본명 조영출, 예명 이가실, 김다인, 김운탄, 1948년 월북)과
박영호(다른 이름, 처녀림, 1946년 월북)가 작사한 노래였다.
‘알뜰한 당신(이부풍 작사)’ ‘고향초(김다인 작사)’ ‘고향설(추미림 작사)’
‘꿈꾸는 백마강(김용호 작사)’ ‘목포는 항구다(박남포 작사)’ 등은 조명암이
작사한 것이고, ‘연락선은 떠난다(박남포 작사)’ ‘짝사랑(김능인 작사)’
‘번지없는 주막(추미림 작사) 등은 박영호가 작사한 것이다.
‘짝사랑’은 작사자가 월북작가 박영호이어서 당연히 금지곡으로 되었어야 했지만,
고복수가 처음 부른 후 계속하여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 노래를 살리기 위해,
음반사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이 작사자를 1930년대 말에 이미 사망한 김능인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위에 있는 추미림, 박남포는 반야월(가수 진방남)의 다른 이름이고, 김다인은
조명암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박영호도 김다인이라는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었기에 가요계에서는 박영호와 조명암이 작사한 곡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곡이 몇 곡 있어 밝혀야 할 과제로 두고 있다고 한다.
'연락선은 떠난다'도 작사가를 박영호 대신에 박남포로 바꾸고 가사를 개사하여
부르게 했지만, '30년대 말, 이 노래에 흥분했던 분들의 낭만을 지금에 와서 느껴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변해버린 세상 탓만은 아니고 원가사가 지니고 있던 의미와
상징이 사라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영호(1911-1953)는 강원도 통천군 출신으로서 원산에서 성장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없다. 북한에서 간행된 최창호 저“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
[이 책은 2000년 서울에서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일월서각)라는
이름으로 출판됨)에서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마쳤으며, 와세다 대학 문과
강의록으로 대학과정을 터득하고 문학창작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프로레탈리아 연극활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구속되기도 했다. 원산의 프로연극 단체 조선연극공장에서 ‘팔백호 갑판장’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 초, 중반에 연극시장, 신무대. 조선연극사, 연극호, 황금좌 등의 단체를
거쳤고, 1930년대 중, 후반에는 청춘좌, 성군, 고협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0년대 중, 후반을 대표하는 몇 명의 중요한 대중극 작가에 꼽히며, ‘산돼지’
‘등잔불’ 등의 대표작들을 발표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목적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2년 ‘세기말의 노래(이경설)’로부터 시작하여 ‘짝사랑(고복수)’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울어라 문풍지(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박향림)’
‘유랑극단(백년설)’‘번지없는 주막(백년설)’ ‘망향초 사랑(백난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냄으로써, 조명암과 함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사가로 손꼽힌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에 둘째 부인인 작가
이선희와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조선연극동맹 초대위원장을 지냈으며, 6.25 사변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3년 3월에 종군작가 활동 중에 전사했다.
폐결핵을 앓던 중에 1952년에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이영미 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일월서각, 2000. 참고)
한밤의 사진 편지 11월 7일 (금) 자는 저의 여행으로 휴간하고
11월 10일 (월)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연락선은 떠난다/ 장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