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 金九 선생 암살범 안두희가 이른바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의 문하생 박기서에 의하여 살해되어 저주받은 인생을 끝맺었다. 인과응보라고 암살자의 최후는 암살로만 끝나야 하는가?
우리는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 古下 송진우 선생과 夢陽 여운형 선생, 雪山 장덕수 선생을 암살자들의 손에 빼앗겼고 건국한 지 10개월이 못되어 白凡 김구 선생을 안두희의 흉탄에 잃어버렸다.
그러나 대부분 정치지도자의 암살 사건이 그렇듯이 암살범과 직근의 교사자는 밝혀졌어도 최종의 배후는 밝혀지지 못했다.
더욱이 건국 한 지 2년이 못되어 일어난 6․25 동란으로 감옥에 있던 이들 암살자들의 행방이 묘연케 되어 송진우 선생과 여운형 선생의 암살의 직근 교사자 한현우(93년 한겨레 김효순 기자에게 몽양 여운형 암살은 자신이 지시했다고 자백)가 일본으로 도망쳐 살고 있다.
장덕수 선생의 암살범 최중하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최서면이란 가명으로 국내에 드나들며, ‘김구 선생 시해 진상조사위원회’에 관여할 뿐,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공교롭게도 안두희 뿐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이상한 억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국민의 애틋한 심정은 한낱 암살의 하수인이 최종의 배후를 알겠느냐는 상식을 떠나 천수를 얼마 안둔 안두희가 인생을 회오하면서 혹시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배후의 실마리를 털어 놓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反韓운동 일환으로 만든 시나리오
그런데 근래에 이같은 국민들의 기대를 악용하여 저질 정치음모와 결탁한 소영웅주의 망동과 우리 사회에 만연된 주사파의 反韓운동의 일환으로 안두희를 강박하여 시나리오에 따른 날조된 자백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92년 4월 13일 권중희 일파가 안두희를 강박하여 배후로 O. S. S 미군 중령과 張澤相 초대 외무부장관, 金昌龍 특무대장을 지목하여 한때 우리 매스컴이 광란케 한 사건이 있었고, 동년 9월23일 또다시 안두희를 납치하여 9월 25일 우당기념관(이종찬 소유)에서 그 배후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지목한 사건이 있었으며, 또 ‘김구 선생 시해 진상조사위’ 김석용씨가 안두희를 데리고 두 달 동안 여관을 전전하며 받아냈다는 녹음테이프며 95년 12월 18일 국회에서 내놓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보고서’ 둥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김구 선생 암살배후 규명은 모두가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미국을 배후로 미리 확정해 놓고 저 중세의 신탁재판이나 마녀재판과 같이 시제에도 맞지 않는 O. S. S 미군 중령과 장택상 외무부장관, 김창룡 특무대장을 중간 교사자로 등장시켜 대한민국의 국가적 범죄로 만들려는 데 특색이 있다.
그리하여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안두희가 살해된 후에 백범 사상연구소의 백기완 같은 이들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1백21개의 녹음테이프에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라는 배후가 있음을 인정했지 않느냐”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래에 있었던 이른바 안두희의 자백 소동과 녹음테이프와 국회의 조사보고서를 살펴보고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김구선생 암살의 배후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각이 보이는 저질의 정치공작
권중희 일당이 안두희를 강박하여 날조된 자백을 하게하여 흑세무민한 것은 민자당이 대통령 후보를 경선한다고 떠들썩한 92년 4월 13일이다.
우리 언론은 당시에 사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나 뽑을 수 있는 특대호를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 장택상 외무부장관과 김창룡 특무대장이란 제목을 달고 전 지면을 할애하여 벌석을 떨었다.
내용인즉 장택상 외무부장관이 O. S. S 미군 중령에게 안두희를 소개했고 그 미군 중령이 암살을 교사하여 이심전심으로 김구선생을 시해했고 김창룡 특무대장이 그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 암살은 49년 6월 26일인데 O. S. S가 해체된 것은 45년 9월의 일이고 장택상씨가 외무부장관을 사임한 것은 그 전해인 48년 11월이며 김구 선생 암살 당시에는 특무대가 없었고 김창룡 대위는 당시에 의정부 주둔 제1연대 정보주임으로 근무했던 것을 보면 터무니없이 날조된 내용들이다.
안두희를 린치, 허위 자백시킨 무리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이같은 사실들에 대한 어떠한 검증도 없이 마치 이제야 안두희가 자백하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 양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당시의 대통령 노태우까지 덩달아 나서서 정부는 배후 규명에 관계된 일체의 문서를 공개하라고 특별지시까지 했다. 그러나 4월 14일 밤 MBC의 PD수첩은 린치로 만신창이가 된 안두희가 침대에 누운 채 실려 나와 이같은 자백들은 권중희 일당의 강요에 의한 것이고 O. S. S 미군 중령은 물론 특무대장 김창룡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흘 후인 4월 17일 무역 회관에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 이종찬 후보 지지 당원 대회장에 문제의 권중희가 내빈으로 참석, 소개되고 사회자는 “애국자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배후 장택상의 비서를 한 김영삼이가 어떻게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느냐”고 기염을 토했다.
따라서 이같은 광경은 권중희 일파가 안두희를 강박하여 시제에도 전혀 맞지 않는 장택상 외무부장관과 O. S. S 미군 중령, 김창룡 특무대장을 등장시킨 의도가 어디 있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권중희 일당이 안두희를 강박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두 번째 소동은 첫 번 사건이 있은 지 5개월 후인 92년 9월 25일이다.
안두희의 처 김명희가 권중희 일파가 안두희를 납치해 갔다고 당국에 신고한 이틀 후 권중희에 끌려 이종찬씨의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한 안두희는 “김구 선생 암살 6일전에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안내로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높은 사람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일 잘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 권중희 일파의 첫 번 거사의 모의에 참가했고 그들을 잘 아는 이의 말을 들어 보면 加平에 있는 사슴목장으로 납치된 안두희가 3 ~4일 정도는 버틸 줄 알았는데 긴 한방침으로 허벅지를 몇 번 쑤시고 몽둥이로 어깻죽지를 몇 번 때리자 “이제부터 자네들이 내 대변을 하게”하여 이같은 가자회견이 이루어졌다 한다.
한편 6․25때 반공포로로 월남하여 안두희를 잘 아는 이를 통해 사건 직후 안두희의 말을 들어보면 납치후 권중희 등이 눈과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취재에 응할 내용을 암기시켜 먼저 동아일보 기자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안두희가 머뭇거리면 문 밖에 있던 권중희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그러면 동아일보 기자가 권중희를 문밖으로 내보내는 등 승강이를 하면서 이루어졌다 한다.
그리고 9월 25일 우당기념관으로 끌려와 기자회견을 했는데 상처의 부위를 가리기 위해 무릎 위에 모포를 덮고 흰 천으로 목을 둘렀어도 어느 기자 한 사람 사유를 묻지 않더란 것이다.
권중희 일파가 안두희를 납치하여 두 번째 한 기자회견은 동아일보를 제외하고 다른 언론의 각광을 받지 못했고, 9월 26일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당기념관 회견은 권중희의 가혹행위에 따라 강요된 내용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안두희의 녹음과 파블로프의 개
김구 선생 암살배후의 규명이란 미명아래 권중희 일당이 안두희를 강박한 두 차례의 소동 이외에도 이른바 ‘김구선생 시해 진상조사위원회’의 김석용씨가 92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정릉에 있는 여관 등을 전전하며 녹음했다는 1백21개의 녹음테이프가 있다.
김석용씨나 국회조사특위는 안두희가 자발적으로 했고 상당히 임의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박기서가 안두희를 살해한 뒤에 백범사상연구소의 백기완 씨는 이 녹음테이프에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란 배후가 있다”라고 예의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92년 4월부터 9월까지 고대국가에서나 있었던 法外人(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취급을 받아 린치와 가혹행위를 당한 70대 중반의 안두희가 두 달 동안 여관을 전전하며 1백21개의 녹음을 했다 할 때 비록 김석용씨가 린치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누가 그 임의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편견 ․ 선입관과 상황의 왜곡 ․ 오인
파블로프의 개라고 심리학에는 조건반사의 이론이 있는데 아무리 이성적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주장도 반복해서 되풀이할 때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으로 비록 린치와 가혹행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곳을 벗어나면 언제 공포의 몽둥이가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아래 두 달 동안 여관을 전전하며 녹음했다는 데서 과연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같은 의문은 안두희가 피살된 후 한국일보가 10월 24일부터 10월 2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안두희의 증언’ 이라고 14대 국회조사특위가 이 녹음테이프의 내용을 풀어 썼다는 녹취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일보가 10월24일 첫 번째 실은 부분에 보면 병점고개 계획 등이 실패하자 장은산이 안두희를 지명해 김구 선생 암살을 명령하고 남의사 행동관례를 언급하며 “잘못되든가 안되든가 하면 너도 갈 수 있다”하여 강요된 상황에서 암살한 그가 10월 26일 마지막 부분에 보듯이 취조관이 “하기 싫은 말은 안해도 된다”는데 그 공포의 장은산을 증인 심문을 안한다고 승강이를 벌이고 느닷없이 재판정에서 “명령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이승만 본인이던가…” 등 앞뒤가 맞지 않은 내용이 나온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일보에 실린 녹취록을 보고 이를 실은 김정곤 기자와 통화를 하여 과연 “명령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이승만 본인이던가” 한부분이 그대로 녹취록에 있는지 확인을 해보았더니 앞뒤의 뉘앙스가 그렇지 딱 그렇게 못 박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녹음한 과정이나 녹취하여 풀어쓰는 과정에 이 부분이 집요하게 요구되었다는 추정이 성립될 수 있고 또 근래 김구 선생 시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인사들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전혀 왜곡 오인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주사파 정치선전 복사한 국회보고서
이같은 편견과 오류는 95년 12월 18일 제14대 국회가 내놓은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보고서’ 라는 30쪽짜리 보고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보고서는 머리말부터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범행후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년도 채 못 되어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하여 승진되었다가 국회에서 문제되자 제대한 후에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군납업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고 살고 반면에 민족의 영원한 스승 가장 존경받은 애국자 김구 선생은 이승만 정권 시절 용공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린 사실 ‘운운하여 머리말부터 마녀재판식 단정과 주사파적 선전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무기징역 받은 안두희가 1년도 못되어 형무소를 나온 것은 6 25때문이었고 국회에서 문제되자 제대한 게 아니라 다시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군납업은 정권의 비호가 아니라 안두희의 동향 친구인 양구 주둔 26사단 사단장 이기건의 배려로 콩나물과 두부 납품으로 시작했다(반공포로로 6 ․ 25때 월남한 26사단장 전속부관 S씨 증언).
또 “백범 선생을 용공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았다는데 그렇다면 김구 선생 영식 김신 장군이 어떻게 공군참모총장을 했고, 반면에 남북협상때 김구 선생을 수행한 신창균씨가 ‘범민련’ 남측 대표를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보고서는 안두희 관련자들의 증언이라 하여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김석용씨가 녹음한 녹음테이프를 안두희가 자발적으로 평소에 해둔 녹음테이프를 제출했다고 하는가하면 특무대, 88구락부, 사찰요람이 무엇인지 기본적 이해도 못하고 있다.
첫째 조사보고서는 50년대 ‘시역의 고민’과 ‘사찰요람’을 분석하고 ‘시역의 고민’이 안두희의 저서인가 위작 시비를 벌이면서 당시의 정치정세를 전혀 왜곡하여 견강부회를 하고 있다.
책을 낼 때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지 않은 이상 누군가 초안에 손을 댔을 것은 추리할 수 있고 그 내용이 얼마나 변질됐느냐는 안두희 자신과 손을 댄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보고서는 책의 출판 당시의 정치정세를 전혀 잘못된 편견으로 상황을 오인하고 있다.
즉 “백범 암살사건은 자유당과 이승만 시대에 뇌관과 같은 폭발성을 지녔다면서 뉴델리 사건이 유포되고 백범 암살사건을 잘 알고 있다는 김성주가 살해됐다”고 했는데 전쟁 중에 생존과 먹고사는 문제 외에 무엇이 국민적 관심사였는지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야당은 한독당과 물과 기름관계인 한민당의 후신 민국당이었고, 뉴델리 사건도 민국당 주도권문제로 안두희 재판 당시 남북협상의 용공성을 감정 증언한 함상훈씨와 조병옥 박사가 장본인이고, 김성주의 주검도 백범 암살에 관계된 순교가 아니라 정부가 임명한 평남지사 부임을 방해하여 보고서가 인용한 그대로 법에 따라 극형에 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메모 이상 이하도 아니다. 단지 경직된 생각에서 법적 절차를 떠나 살해한 원용덕의 행위는 별개일 뿐이다.
조사보고서는 ‘사찰요람’을 정치문서인양 백범 암살의 정권적 실체 운운 했는데 이는 치안국 사찰과의 대외비문서로 이를 문제 삼은 자체가 주사파적 콤플렉스다.
또 백범 암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이범석 총리의 성명을 해괴망측하다고 했는데, 김학규 장군이 안두회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저격당한 그날 밤 차일 속에서 K씨에게 보이면서 불태운 ‘나는 매국노 이승만을 처단하겠다’는 안두희의 혈서로 볼 때 해괴하다고 보는 게 바로 편견이 아닌가.
둘째, 60년대의 증언이라고 하여 4 ․ 19후 구국청년단을 만들어 선동하던 고정훈의 말을 바꾸고 있는데, 그때 고정훈은 “김준연 신성모” 라고 하여 명예훼손으로 피소까지 당했는데, 보고서는 “임병직 신성오”로 바꾸어 92년 4월 13일 장택상 외무부장관이라고 무고한 것을 얼버무린 의도적 변조를 하고 있다.
또 88구락부도 치안대책회의가 아니라 안국동 8번지 윤보선씨 댁에 자주 교유한 김도연 김효석 신성모 허정 이기붕과 산림처사 김범부 실업인 김양수 등 친목모임으로 백범 암살에 회자된 사람은 신성모와 김효석 허정씨 정도다.
백범 암살의 배후는 누구인가
이제까지 백범 암살의 배후 규명은 잘못된 편견과 선입관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국가적 범죄나 이승만 정권의 정권적 범죄로 꿰맞추려고 시제도 전혀 맞지 않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실체적 진실 발견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암살에 관계됐다고 보는 인물들의 인적 배경을 살펴보고 정권이 구태여 백범을 암살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가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정부가 수립된 지 1년이 채 못 되었지만 신생 대한민국을 흔들려던 제주도 4 ․ 3폭동과 여 ․ 순 반란사건이 진정되고 서울에 여러 차례 폭동의 시도와 국회 프락치사건과 외국군 철수결의안 등이 실패했다.
또 남 ․ 북협상차 북에 갔다 절교한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5월 22일 덕수궁에 회동하여 꽃구경을 하고 다음날 김구선생이 3영수 회담을 제의하여 정국이 새로운 안정을 모색하고 있었다.
백범 암살 관련자돌 하나같이 좌익
한편 배후로 거론된 신성모 국방장관은 임정 시절 이승만 대통령 탄핵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첨병 노릇을 했고, 박용만 신숙 등과 李 대통령 암살기도를 했으며 (장흥장군 수기), 백범 암살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간첩 김정제를 치안국 경무과장에 기용했고, 6 ․ 25때 월북하여 북의 내무부 제2부부장을 한 김효석을 천거한 인물로, 주일대사 시절 그의 생질 김삼수의 간첩사건으로 말썽을 일으킨 인물이다.
총참모장 채병덕은 당시 그의 사촌이 김일성의 경호 대장을 했고 친형이 남북교역을 해, 총참모장직에서 물러났다 복귀한 인물로,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처형된 정국은과의 관계나 6 ․ 25직전 북의 수상한 동향 정보를 묵살하고 대부대 이동과 전군 수송차량 회수 등 6 ․ 25 직전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북에서 남파되어 위장 전향한 간첩 조염과의 관계로 군 기관에서 내사를 받다 다부동 전투에 배속되자 전선이탈을 하여 일본 밀항을 하려다 처벌됐다.
김지웅은 중국에서 일본 특무기관의 앞잡이를 하다가 귀국, 중국군 왕금산 장군이라고 하다 들통 난 인물로, 46년 2월 16일 결성된 좌익 총연합체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중앙위원이었다. (해방조선I P. l54)
홍종만은 북에서 남파된 간첩으로 시경에 체포되자 김지웅이 석방시킨 인물이고 안두희 재판때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시위를 한 김성주는 중국구강에 있다가 귀국하려고 수용소에 있을 때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있다 한다.
이와 같이 백범 암살에 관계된다고 지목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좌익 전력의 소유자다. 이점에서 백범 암살 배후는 새로운 관점에서 봐야 하고 그게 곧 북의 원격 조종설이다.
국회보고서 역사 앞에 책임져야
지금까지 백범 암살을 보는 시각은 네 가지였다. 첫째 반민특위 활동에 위협을 느끼는 친일파들이 생존의 돌파구로 친일파 숙청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과잉충성분자들이 이 대통령의 뜻과는 관계없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백범을 암살하고 권력을 농단하기 위해 암살했다는 설.
셋째 동 ․ 서의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구축하고 이승만 체제의 통치 질서의 안정을 위해 남 ․ 북협상을 주창한 백범을 암살했다는 설.
넷째 배후에서 리모트 컨트롤 하는 세력과는 별개로 북에서 월남한 극단주의자를 대표한 안두희의 소영웅주의적 망상에서 비롯된 단독범행설이다.
이중에 첫 번째 설과 두 번째 설은 경합되어 주로 이승만 정권 당시에 야당을 했던 분들의 시각이고, 세 번째 설은 92년 9월 24일 동아일보에서 보듯이 고려대의 이호재 교수나 역사문제 연구소의 이이화씨 등 좌파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고, 네 번째 설은 6 ․ 25 이전에 월남하여 공산당과 김일성에게 철천지 원한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러나 근래 김구 선생이 임정의 옥쇄를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북의 영화 ‘위대한 품’이나 안두희를 강박하여 백범 암살을 대한민국의 국가적 범죄로 만들려는 주사파 아류들의 망동을 보면 북의 조종설에 한층 심증이 굳어진다.
그렇지 않고 주사파 아류들의 망동 그대로 이승만 대통령이나 장택상 외무부장관이 백범 암살에 연루됐다면,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신성모와 일체가 되었던 김효석이 월북하여 북의 내무부 제2부장을 하고 조평통의 대남 방송을 할 때 이미 귀가 따갑게 폭로했을 것 아닌가.
또 백범이 암살된 당시의 정치 상황은 지금 배후 규명을 한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보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백범 암살을 정권적 범죄라고 단정하고 주사파에 부화뇌동한 국회조사 보고서를 작성한 자들은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첫댓글귀중한 자료를 올려주셨군요. 백범 살해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승만 배후설을 주장하는 친북좌파들에 의해 그것을 정설로 믿고 있는 우익도 많습니다. 우리가 싸울 무기는 진실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통해 건국 대통령 복권 운동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만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귀중한 자료를 올려주셨군요. 백범 살해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승만 배후설을 주장하는 친북좌파들에 의해 그것을 정설로 믿고 있는 우익도 많습니다. 우리가 싸울 무기는 진실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통해 건국 대통령 복권 운동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야만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