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참다운 신통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길이다. 공부하는 이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생사에서 해탈하는 이 공부, 나도 일체중생도 단박에 노병사를 비롯한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이 공부에 발심해 정진할 일이다.
그러려면 스승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법문을 들으며 공부해야 한다. 다만 스승의 법문을 들을 때 자기의 견해, 생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리하면서 들으면 올바른 공부가 되지 않는다. 생각을 쉬고, 텅 빈 마음으로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훈습(薰習)하듯이 듣는 것이야말로 참되게 법문을 듣는 자세다. 이렇게 들을 때 견성, 돈오의 길에 이를 수 있다.
또한 법문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법문이 너무 어렵다는 현애상(懸崖想)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문이 너무 어려워서 나 같은 사람은 들어봐야 깨닫기 불가능하리라는 퇴굴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본래 종성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문을 들을 때 두 가지 금기 사항인 현애상과 관문상(慣聞想)이다. 현애상은 법문이 너무 어려워서 들어도 모를 것이라고 짐작하며 듣는 것이고, 관문상은 항상 듣던 법문이라 이미 다 안다고 여겨 소홀히 듣는 것을 말한다.
유위조작하는 수행 위주의 불교에서는 퇴굴심을 내기가 쉽다. 몇 년, 몇십 년을 열심히 좌선하고 기도하고 수행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 좌절감과 절망감이 생긴다. 저토록 훌륭한 스님이 목숨 걸고 수행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하고 퇴굴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눌 스님은 이런 사람들이 발심하도록 이끌고 있다. 불교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며, 수행을 잘해야만 깨닫는 것도 아니다. 현애상이나 퇴굴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다.
세상의 모든 공부는 기본 자질이 있는 사람이 더욱 잘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운동 신경을 타고난 사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공부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애쓰고 노력하고 갈고닦는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그 어떤 타고난 재능이랄 게 없다. 우리가 이미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늘 쓰고 있고, 매 순간 활용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의 본래면목이자 본래 살림살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부처의 종성을 끊어 버리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발심해도 좋다.
여전히 ‘정말로 깨달음이 그렇게 쉬운 것일까?’, ‘저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 진짜 깨달음이 맞을까?’, ‘신통력도 못 부리는데 깨달은 자가 맞아?’, ‘큰스님들이 그토록 힘든 고행을 다 하고도 못 깨닫는데, 저렇게 쉽게 깨달을 리 없어’, ‘저렇게 쉽게 깨닫는다는 것은 말이 안 돼’, ‘법문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하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혹은 지눌 스님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깨달음, 해오처(解悟處)까지 믿지 않고, 저 사람은 신통을 보이지 못하는 자라고 경솔하게 말하며 선 공부를 업신여기지 않았는가? 지눌 스님은 이것이야말로 성현들을 속이는 일이라며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한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