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여성불교 리타 엠 그로스 Rita M. Gross (1943.6.~2015.11.)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오클레어 캠퍼스 비교종교학자이자 작가였습니다. 1943년 출생한 그녀는 위스콘신주의 린더랜더의 농장에서 성장하였으며 2015년 위스콘신주 자택에서 이 세상과 인연을 마쳤다. 리타 그로스는 1975년 시카고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은 종교학 분야에서 최초로 여성학과 페미니즘 방법론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과 종교, 특히 성과 불교에 관한 여러 권의 책과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 A Feminist History, Analysis, and Reconstruction of Buddhism 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93년 ‘뉴욕주립대출판사-SUNY Press’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현대여성이 본보기로 삼기에 적합한 과거의 사례를 찾아보면서 한 전통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초기 페미니스트 연구와 밀접하게 닮았다. 그로스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불교는 시대를 따라 내려가면서 대다수의 아시아 사회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최초의 승가공동체에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붓다가 마지못해 허용했다는 데서 잘 나타나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본지에서 2020년 1월호 부터 3월호까지 3차례에 걸쳐 소개하였다. 이 외에도 성과 종교에 관한 책으로는 Feminism and Religion: An Introduction 이 있다. 1977년 그는 나로빠 대학교 설립자인 쵸감 트룽파 린포체의 제자가 되면서 티베트 불교신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형태의 티베트불교를 40여년간 수행하였으며 불교와 명상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제쭌 깐도 린포체가 이끄는 티베트 불교의 민돌링 파의 법사였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장애인가 ?
리타 그로스 (Rita M. Gross )
불교에서는 장애가 우리의 수행을 돕는다며 장애를 고마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장애는 깊은 지혜와 자비를 개발하도록 돕고 이는 결국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불교는 자주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장애라고 말한다. 그러면 장애가 그렇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이 장애를 겪는다면, 그러면 여자는 진즉 존경받는 스승들의 서열 가장 윗자리에 올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여장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장애가 되기에 여자의 몸으로는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고까지 한다. 이것은 정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장애이다. 여자로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은 이 생애 동안 많은 공덕을 쌓아서 내 생에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길뿐이라고 한다. 자애가 우리의 수행을 돕는다는 것과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장애라는 것, 이 두가지 주장은 참으로 화해하기 어려운 주장으로, 불교 가르침의 핵심에 커다란 모순을 제기한다. 그동안 불교계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원천적으로 장애라는 주장을 와해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들어 그 부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부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을 페미니스트들은 절대적 전제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현실 상황에서 볼 때 여성들이 종종 남성들이 당하지않는 장애를 겪게 되는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장애가 정말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까 ? 30년 이상 불교를 수행해 온 지금, 나는 지난 세월동안 맞닥뜨렸던 많은 장애가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나는 여성의 몸이라는 장애가 유용하다는 문제를 놓고, 이전에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나는 그 동안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장애라는 주장을 약화시키고, 또한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주장을 실제로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썼다. 그러나 상대적 차원에서 여성으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 나이(1943년생)의 여자들에게 있어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장애였다. 그런데 내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 많이 이루어낼 수 있었던 걸 그 장애에 대해 감사해야 할까 ? 몇 년 전 미국종교학회에서 내 평생의 학문적 작업을 기리는 학회를 동료들이 열어준 적이 있다. 참으로 고맙고 기분 좋은, 그동안의 어려움을 다 녹여주는 그런 행사였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 내 학문적 작업은 종교학과 불교학 분야에서 무척 중요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당해 왔기 때문이다. 학회 마지막 날, 지난 10년 동안 나와 같이 학술지를 공동으로 편집해 온 남자 동료와 아침심사를 같이 했다. 옛날 일을 회고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리타, 만일 당신이 남자였다면 아마 당신 분야에서 크게 출세했을 겁니다(여기서 ‘출세’란 내가 평생 해 보지 못한 명문대학의 교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답했다. “하지만, 내가 남자였으면 그렇게 중요하고 흥미진진한 연구주제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 내가 만일 남자였따면 나는 아마 아마 젠더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지난 40년간 학계 또는 불교계에서 젠더만큼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는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면 이것이 장애로 인해 도움을 받은 경우일까 ?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시작하여 나는 평생 여성학과 페미니즘에 관련된 연구를 해왔다. 이러한 연구의 보상으로 내가 받은 것이라고는 시카고 대학원생 시절에는 일종의 코기 페미니스트 이론을 만들어낸 것 때문에 교수님들에게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분들은 학계의 정설인 남성중심주의적 규범에 도전하는 내 논문에 학위를 주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어떤 남성 지도 교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인간 또는 남성 그 자체가 여성까지 망라하는 것이니 여성을 특별히 연구하는 건 불필요하다.” 누군가 남성들에게 흥미롭고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면 그는 바로 출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그만 지방 주립대학에서 평생을 보냈다. 내가 발표한 많은 중요한 저작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내가 열성적인 학생이나 대학원 과정도 없는 지방 주립대학에서 힘들게 일하는 동안 명문대학에서는 내 글을 자료로 강의를 하고, 그리고 나는 거기에 초청연사로 강연하러 간다는 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지금 말한 이런 이야기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거나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장애라든가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불교에서 여성이라는 것은 장애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그 장애란 무엇일까? 그것은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업적이 적다거나 또는 몸과 마음에 결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성적인 논의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 관습에 따라 남성의 관점을 여성의 관점보다 우위에 놓고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내포된 편견을 해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체제, 바로 이것이 장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학계의 지도교수나 동료들에게는 남성의 관점만이 유일하게 흥미롭고 중요한 관점이었다. 그런 관점을 지닌 분들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에 굳이 그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불교도 이와 같다. 사실 전통적인 불교문헌들은 여성이 부딪치는 가장 실질적인 장애는 여성의 몸 그 자체가 아니라 남성 우위의 환경임을 인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들을 열거해 놓은 자료들은 남성의 사회적 우위나 혹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남자들의 평가-여자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사고방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문화적인 것, 즉 남성우위가 마치 본성 그 자체인 것처럼 혼동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조건을 절대적인 문제로 오해하는 이 잘못된 견해의 실체를 불교의 정교한 중관이론에 비추어 꿰뚫어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 윤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전통적 불교의 분석적 논리는, 사회적 남성 우위현상이 실제적,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않았을 뿐, 이 잘못된 견해가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경로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는 있었다. 여성 불자들에게 진정한 장애가 무엇인가를 찾아냈으니 앞의 그 대화 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내 남자 동료가 “리타, 만일 당신이 남자였으면 당신 분야에서 아주 출세했을 겁니다. ”라고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내가 만일 남자였다면 내가 이렇게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를 찾을 수 있었을까요? ”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큰 장애가 수행에 가장 큰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불교적 수수께끼의 긍정적 예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장애 때문에 아마 무너져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 이 경고에 대해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장애물은 때로는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해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종종있다. 불법을 수행하는 우리들은 빈곤, 인종 차별주의, 성차별 주의, 동성애 혐오 등 장애로 인한 심각한 상황들을 보면서 순진하게도, 장애는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무심히 내뱉은 그런 말들은 아주 피상적인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어떤 이유에서건 여자 몸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나는 젠더의 이치(Dharma)를 깊이 연구할 동기를 얻었다. 젠더가 장애라는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 소중한 기회를 중생들을 위해서 쓰려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마치 심장에 꽂힌 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장애들을 일관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직시하여 그 장애물을 축복으로 바꾸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그 동안 가르친 것에 도움을 얻은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움추려들지 않으면서도 장애의 위력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장애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해 준 조언들을 따랐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문제는 실제는 없는 거야. 감정이나 그런 사실 따위는 그냥 무시해 버려. 모두 상관없는 것들이야.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젠더는 문제가 아니거든.” 있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그래서 번뇌 중에서 가장 깊고 고질적인 무지라는 번뇌에 빠지게 되는 것을 불교에서 어찌 합당한 조언이라고 하겠는가. 다행히 나는 그런 조언을 따르지 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한 사실을 모른 체한다든지 그것을 없는 것처럼 억눌러서는 오히려 더 나쁘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마하무드라 가르침에 나오는 번뇌를 다루는 과정에 대해 말해 보겠다. 우선 자신을 어지럽히는 감정들, 즉 집착이나 분노 등에 집중하여 그것들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 감정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의식한 그 명료한 감정과 에너지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서는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본다”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 가르침은 그 감정을 어떻게 표출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으며 무시해 버리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강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무시하라는 조언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쪽이 더 안전해 보이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나는 남성 우위라는 장애와 그에 대한 분노를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지 않았다. 이 장애와 몇 년을 씨름하면서 마하무드라와 위빠싸나 수행법을 사용했는데 그 효과가 아주 놀라웠다.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내부와 일반 사회에서 남성 우위 현상을 아주 분명히 통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법 과정에 대해 80년대 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여성 수행자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내 글 속에 나오는 “분노 속에서의 냉철함”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분노”에 반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수행 여정의 어떤 단계에서는 분노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아의 매커니즘 때문이다. 흔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내 감정을 나보다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누구겠어?”) 이러한 작업의 결과가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Buddhism After Patriarch, SUNY Press, 1992>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일어난 일련의 일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 남자 동료가 우리 둘 다 아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불교문헌들에 대해서 자기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아주 새로운 식으로 해석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그녀 해석이 아주 맞아, 왜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못했지 ?”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세상의 해석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지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부동산 중개인들은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라고 말한다(역자 주: 즉 여자라는 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는). 장애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장애를 가진 그 사람뿐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진실이다. 장애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극복하기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 중심적인 불교 체계 내에서의 여성의 몸이 장애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현재 이 글이 취하는 입장처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가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은 확실히 장애라는 것,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불교의 지난 역사와 현재를 볼 때,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정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남성 우위사상은 여성적인 것을 장애로 생각하는 불교 사상이 태어난 근원이며 또한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과 또한 결국 남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것은 정말 심각하게 부끄러운 일이며 불교가 합리적이고 인간적이며 더군다나 자비로운 종교라는 인식에 흠집을 내는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남성 법우들의 도움을 기대한다.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모든 증거를 솔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남성들, 그리고 우리들의 스승들에게 이제, 깨달은 사람은 젠더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제도 내에서 남성 우위는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완전히 혼돈하는 것이다. 불교제도 내에서의 양성평등을 주장할 때 누군가가 “너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에고(ego) 때문이야, 왜냐하면 만일 더 깨달은 사람이라면 사회적 억압이 있어도 아마 달갑게 승복했을 테니까. 그게 자기를 비운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라고 말하면 절대 그런 말에 빠져들면 안된다. 어떤 불교 집단도 사회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그런 윤리를 적용한 적은 없다.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억압을 포용할 것을 강요할 때 이런 논리를 사용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왜곡된 논리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또한 남성 불자들에게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우위를 이용하지 말고 그 논리를 당신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고 요구해야 한다. 부탄의 어떤 성지에 스승님과 그분 제자들이 간 적이 있었다. 스승님과 몇 분 비구니 스님들이 먼저 들어가고 제자들이 들어가려고 했더니,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일행이었던 서양 남자들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 여자들은 분개했다. 남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남성으로서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 여자들이 왜 화가 났는지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입구를 지키는 부탄 사람보다 일행인 남자들에게 더 화가 났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럼 자신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냐고 나에게 물었다. “당신도 우리와 같이 밖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요”라고 대답했더니, 그 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다 드러나 보이는 이런 것을 우리 남성 법우들이 인정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관계없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지혜를 가지고 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삼독(三毒,탐욕.분노.무지)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중 가장 위험한 것이 무지이다. 우리는 불교계 지도자들로부터 남성 우위 현상을 그냥 모르는 척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아시아 여성이건 서양 여성이건 우리는 모두 가부장적 문화에서 남성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남성에게 양보하도록 사회화되었다. 그 결과, 남성 우위 현상을 못 본 척하라는 말을 들으면 “좋은 여자”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냥 그렇게 한다. 자신의 권익이나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를 인식하고 방어하기보다는 남자들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한다. 전통이나 권위 있는 남성의 말과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덮도록 자신을 훈려시켜왔다. 그래서 출가 수계 전통이 없는 나라들에 다시 그 전통을 세우도록 돕는 문제에 있어서도, 불교의 규범으로 보면 우리의 주장이 올바른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신경을 쓰고 그 의견에 양보하는 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무지의 또 다른 형태는 불교에서 젠더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모르거나 불교문헌 속에는 여성험오증이나 남성 우위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이야기와 주석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여성도 수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되었을 때, 그 분은 바로 포기해 버리지 않았다. 다른 여인들과 함께 계속 노력했고 결국 아난다의 중재로 비구니 승가가 성립되었다. 그때 이후 불교의 여성들과 일부 남성들은, 여성혐오나 성차별이 아닌, 젠더의 중립성과 포용성이라는 이상을 고취해 왔다. 불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런 자랑스러운 전통을 무시하고 최근 여성 불자의 권익과 필요를 주창하는 운동이 서양 페미니즘 때문에 발생한 이질적이고 현대적 현상이라는 주장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여성들이 남성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양보하도록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익과 시대적 요구와 전통을 무시하는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남성 우위와 그 해악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바로보게 되면 격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분노를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영적 웰빙에 해롭다고 한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썼기에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불교의 계율을 진실되게 수행한다면 분노는 금방 사라지고 곧 명징함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나 일단 분노가 가라 앉았다고 해서 더 이상 앞에서 말한 무지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대신 불교에서의 남성 우위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명확하고 신중하게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한다. 불의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묵인하거나 분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만 나의 스승(여성임)께서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어느 여성이 스승께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그때 스승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분노는 언제나 시간 낭비입니다.” 그 여자는 놀랐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했을 때도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그랬더니 스승님께서 답변하셨다. “나는 분노가 시간 낭비라고 말했을 뿐, 당신의 비판적 지성을 포기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비판적 지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비판적 지성으로 사유해 낸 결론을 다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화를 낸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기분 나빠 한다든지 또는 사람들은 기분 나쁜 사실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증오의 감정 없이 자신의 통찰력을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억눌러서는 안 되고 그렇게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젠더의 시각으로 채색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불교의 성차별적인 경향, 여성혐오, 남성 우위를 지적하면서 얼마나 유해한지를 보였을 때 내가 불교를 젠더화한다고 비난했다. 그러한 비난에 대응할 단 하나의 길은 오래전 불교의 제도가 남성을 더 우위에 두었을 때부터 불교의 가르침은 이미 젠더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이 글은 -불교 페미니즘과 리더십 불광출판사 출판-에서 옮겨 실었습니다
[다음은 원담의 덧붙이는 말] 세계역사는 남성위주로 전개되어 왔고, 제도화 된 불교(전통적 불교)도 그랬다. 이제 21세기 불교 시대를 말하고 싶다면 남성우위로 운영되는 불교제도는 양성평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먼저 남성우위적 관점으로 이해되었던 불교의 가르침이 있는지 점검하고, 있다면 과감히 수정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성차별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고대 인도사회에서 완고했던 남성우위, 여성차별적 상황을 고려하여 여성 출가자와 여성재가불자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승가를 운영하였으며 재가불자들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후에는 승가가 왕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남성우위, 여성차별하는 관습이 자연스레 승가 안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불교에서도, 남방불교권(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서도 대승불교권(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도, 티베트불교권에서도 반성없이 지속되었다. 이제 불교가 서양에 전래되어 100년이 훨씬 지났다. 서구의 휴머니즘과 페미니즘 및 과학의 세례를 받은 불교는 본래의 가치인 계급평등, 남여평등 및 모든 차별을 넘어선 평등, 그리고 자유와 비폭력,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정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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