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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9 - 고도 크라쿠프를 떠나면서 몽골군의 유럽과 폴란드 침공을 생각하다!
5월 10일에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도착하여 바르비칸 과 플로리안 문을 지나...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 Rynek Gfowny 을 구경하고 프란체스카성당으로 들어가서 잠시 쉬다가 언덕에
자리한 바벨 성 wawel castle 에 도착하는데 구시가지 남쪽 끝, 비스와 강에 면한 바벨 언덕 위에 자리합니다.
크라쿠프의 첫 마을이 바벨 언덕에 생겼으며 11세기 초에는 왕궁 이 생기고 성벽이 둘러쳐져 바벨성의 원형
이 되었으니 1499년 화재후 16세기 초 지그문트 1세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지어졌으며 남쪽에는 유대인들의 구역인 카지미에시 KAZIMIERZ(카지미에르즈) 가 있습니다.
이제 크라쿠프를 뒤로 하고 다시 바르샤바 로 가기위해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서 생각
하니 폴란드는 남쪽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만 제외하고는...... 평원에 자리한 나라
인지라 사방이 트였으니 외적의 침공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에 몽골군의 침공 을 생각해 봅니다.
1241년 래그니차 전투 는 독일어로 발슈타트 전투 라고 불리니 크라쿠프에서 멀지 않은 실롱스크(슐레지엔)
공국의 레그니차에서 바이다르 와 오르다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과 실롱스크 공이자 폴란드 고공
(Maximus Dux) 이었던 헨리크 2세 가 지휘하는 폴란드 각 공국 및 유럽 기사단 연합군 간의 전투였습니다.
이틀 뒤에 몽골군의 승리로 끝난 헝가리의 모히 전투 (1241년 4월 11일) 와 함께, 유럽에 몽골의
전투력 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으며...... 폴란드와 신성 로마제국 제후국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니 당시 실레시아 는 분열된 폴란드 왕국의 일부로 피아스트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3세기초 몽골제국은 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고 키예프공국 을 잿더미로 만든뒤 서부 유럽으로 진군
하고 있었으니, 몽골 제국의 제2대 오고타이 칸 은 1235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유럽 쪽으로의
서방 원정을 결의 하였고 장남 주치 가문의 당주인 바투 가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부장은 칭기즈칸의 노장이자 칼가강 전투등 유럽군과 교전 경험이 있었던 수부타이 였으며 몽골 기병대,
투르크계 보병 등으로 구성된 대군이었으니 중앙아시아에서 유럽·러시아까지 완전하게 정복
하고 헝가리왕국 으로 서진했으니 몽골군은 항복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 까지 포함해 대군을 형성합니다.
1239년 바투 원정에서 쑥대밭이된 키예프 공국에서 40,000호의 쿠만-킵차크인 들이 몽골군을 피해 헝가리로
도망치자 헝가리 왕 벨라 4세 는 기독교로 개종할 것과 몽골 침입시 함께 맞서 싸운다는 조건으로 헝가리
내에 정착하도록 했는데, 바투는 이들을 당장 돌려놓으라고 헝가리 왕에게 최후통첩 을 보냈으나 거부당합니다.
수부타이 는 헝가리 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측면에서 헝가리에 원병을 보내 올 수 있었던 폴란드
왕국을 미리 쳐부수기로 했으니 1241년 1월 바이다르 (차가타이칸의 차남), 오르다(주치의 장남,
바투의 형), 카단(오고타이 칸의 아들) 에게 2개 튜멘(12,000~20,000명) 으로 폴란드를 침공케 했습니다.
이들은 기동력 을 이용해 폴란드 각 소공국들의 군대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각개 격파
했으니.... 2월 투르스코 전투 (Battle of Tursko) 에서 크라쿠프 태수 (Voivode)
브워드지미에시 (Włodzimierz) 가 이끄는 1,500명의 병력이 몽골군에 격파당합니다.
3월 크라쿠프 근방 흐몔니크 전투 (Battle of Chmielnik) 에서도 아직 규합되지 못한 폴란드군
이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 에 크게 패해 폴란드 대공의 도시
크라쿠프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고, 크라쿠프로 진입한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 이 이끄는 병력은 소폴란드(Małopolska) 지역의 남은 폴란드군을 타첵 전투 (Battle of
Tarczek) 에서 격파하고, 4월 브로츠와프 근방에서 바이다르 군과 합류했는데, 폴란드 공국들을 다시 규합
하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 는 모라비아와 성전기사단의 지원까지 얻어 몽골군에 일격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보헤미아 왕국 의 왕 바츨라프 1세도 원병을 모아 폴란드로 달려오고 있었으며..... 그외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제후국 들이 원병을 파견한다는 약속을 했으나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수 없었던 헨리크 2세는 빠르게 출정해 몽골군과 맞서려고 했습니다.
대폴란드~소폴란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진군하던 몽골군은 4월 9일 실롱스크(슐레지엔) 공국의 레그니차
에 모습을 드러냈고... 3,000 ~ 8,000명 연합군 은 몽골군에 맞섰으니 1241년 4월 9일, 대공 헨리크 2세는
폴란드 연합군을 모아 레그니차에서 동남쪽 4km 떨어진 레그니키에 폴레 (Legnickie Pole) 에 포진합니다.
헨리크 2세 는 군대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으니 제1진은 모라비아 변경백의 적자인 볼레슬라프 의 지휘 아래,
모라비아인, 대 폴란드지방 농민 징집병,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자원병, 소수의 기사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제2진은 크라쿠프의 기사이자 고위귀족이었던 술리스와프의 지휘 아래 대폴란드 (비엘코폴스카), 소폴란드
(마워폴스카) 와 크라쿠프, 시에라츠, 웽치차 공국 등의 기사와 종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제3진은 오폴레-
라치부시 공작 미에슈코 2세 (Mieszko II) 가 이끄는 그의 영지에서 데려온 징집병과 소수의 기사대였습니다.
제4진은 본진으로서 헨리크 2세 가 직접 이끄는 실롱스크의 기사대, 폴란드 각지의 기사대
와 성전 기사단 등 서유럽에서 지원 온 기사단 그리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본진의 주력이었던 실롱스크의 기사들은 몸 전체에 메일(mail) 을 두르고 마갑을
입혔으며 방패와 3~4m에 이르는 랜스 를 들고 돌격하였으니 백병전 시엔 검을 사용했습니다.
1월 12,000 ~ 20,000여명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던 몽골군은..... 레그니차 까지 진군하는
3개월 기간 동안 병력을 조금씩 손실해 전투 직전 그 수가 8천 남짓이었다는데
대부분은 기마 궁수 였고 소수는 전투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을 중장기병 이었다고 합니다.
몽골군의 사령관은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 (Baidar), 바투의 형 오르다 (Orda) 였을 것
이라고 보는데, 몽골군도 군대를 4개 로 나눴고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진 전방 3개 진은
횡대로 넓게 벌렸으며 후방 중앙에는 기마궁사와 소수의 중장기병들이 예비해 있었습니다.
실롱스크 (슐레지엔) 기병대의 돌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몽골의 기병대를 너무
쫒아간 기병대가 폴란드어로 "달려" 라고 외친 것을 혼동해 오폴레 공이 군대를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헨리크 2세가 전투 중심부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도 합니다.
유럽군 제2진의 일부인 실롱스크의 기병대가 몽골군 전방의 기마 궁사로 이루어진 경기병
인 선봉대 만구다이에 돌격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몽골군의 화살세례 를
받은 후 격퇴되자..... 조바심이 난 헨리크 2세는 전방 부대의 총공격을 지시 했고
술리스와프가 제2진 전체를, 오폴레 공작이 그의 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에 재돌격 합니다.
양익의 징집병들도 돌격하자 만구다이들은 공격을 받고 퇴각 했는데, 이것은 거짓 이었고 폴란드의 기병대
는 몽골군 깊숙히 끌려들어가고 말았으니 보병대가 기병대와 분리 되자... 양익에 배치된 몽골 기병대가
보병을 측면에서 공격했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헨리크 2세는 자신의 기사대를 이끌고 역시 공격해 들어갑니다.
백병전을 벌이던 몽골군은 조금씩 퇴각해 거리를 벌린 뒤, 야크와 양꼬리털로 만든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 들판에 불을 피워 엄청난 연기 가 발생하자..... 몽골군의 움직임은 가려졌고
유럽군은 심한 혼란 에 빠졌으니 얀 드우고슈는 몽골군의 이 작전에 대해 "타타르인 들은 전쟁
할 때 점술과 사악한 마술 에 의지한다던데, 그들은 정확히 우리에게 그 짓을 했다." 라고 썼습니다.
몽골군은 말머리를 돌려 화살을 쏘며 혼란에 빠진 폴란드군에 돌격해 들어갔으니 측면에선 화살이
쏟아지고 중앙에선 몽골의 중장기병들이 돌진해 들어오자 그대로 대학살 이 일어났으니
모라비아의 볼레슬라우((Boleslaus Děpolt) 는 전사했고, 헨리크 2세는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고자 했으나..... 혼란한 와중에 유럽군의 잔여병력은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 거의 궤멸 합니다.
대공은 호위대 병력을 쪼개어 탈출구를 열어보려고 하였지만, 곧바로 적의 포위에 가로막혀 주변에는
오직 4명의 병사 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헨리크 2세를 태울만한 말들도 다친 상태로 방치 되다가
몽골군의 공격에 죽어버렸으나, 다행히 휘하 기사가 어떻게든 말을 찾아 구해주어 탈수 있었습니다.
헨리크 2세 가 일격을 가하려 팔을 들자, 겨드랑이에 몽골군의 창이 박혔고 곧 화살 두 발도 맞았으며
대공이 땅에 떨어지자 몽골군은 그를 참수 했는데 연대기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뒤 몽골군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군 전사자의 한쪽 귀를 잘라낸 것이 커다란 자루 9개 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레그니차 전투 가 끝났을 때, 원병으로 가고 있던 바츨라프 1세의 보헤미아군은 레그니차에서 하루 거리
에 있었는데 폴란드군 참사를 듣고 헝가리에도 가지 않고 그대로 후퇴해 마이센과 튀링겐의 원병을
받아 자국 방어에 전념 하기로 했으니, 이 전투로 몽골군의 폴란드 침공 목표는 완벽히 달성되었습니다.
헝가리의 주변 강국들은 원병을 보낼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공국 및 성전 기사단 으로 부터 소수의 지원만 받아
모히치 전투를 치렀다가 참패 했는데, 바투는 헝가리를 정복한후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체크하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스스로 물러나길 요구하며 "나는 너의 왕위를 빼앗으러 가고 있다" 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1241년 말, 바투는 알수 없는 이유로 그는 다시 유럽으로 오지 않았고, 폴란드 공국들은 그 참혹한 피해
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국들과 달리 몽골의 영향권 밖에 남을 수 있었는데.... 하지만 헨리크
2세의 사망, 그리고 실롱스크공국 국력이 크게 약해짐에 따라 폴란드의 통합은 약 80여년 지연 됩니다.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이 오스트리아의 빈과 독일로 진격하지 않고 갑자기 철수 한게 유럽인들은
신의 가호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몽골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으니 그 후계자 선정을 위해
쿠릴타이 가 열리는지라.... 각지의 몽골군은 모두 몽골초원 울란바토르 로 급히 돌아갔던 것입니다?
헨리크 2세가 많은 폴란드 공국을 연합했다는 사실에서, 만약 몽골의 침입이 없었고 그가 좀 더 오래 통치하게
되었다면 그의 재위기에 폴란드의 통합 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사후 1290년대 다시 폴란드 절반을 장악한 대폴란드 공 프셰미스우 2세가 통합 에 가까이 갔으나 왕으로
대관한후 1296년 암살 당하면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브와디스와프 1세의 통치기인 1320년에야
폴란드는 다시 통합 되었지만 그 동안 실롱스크(슐레지엔) 공국은 보헤미아의 속국 이 되어 떨어져 나갑니다.
한편, 1241~42년의 폴란드 침공에서 폴란드의 힘을 파악한 몽골은 부룬다이 (Burundai)의 지휘 하에
1259년 오로지 약탈을 목적 으로 폴란드를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침공했는데 분열되어 있던
폴란드는 다시 한번 패했고 전역이 약탈당했으며 크라쿠프는 또 불태워졌으며 1287년
탈라부가 (Talabuga) 가 이끈 세번째 침공은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 가 성공적으로 물리칩니다.
몽골은 유목 민족이니 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소와 말에 양을 키우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데....
자연히 짐승과 더불어 사니 그들의 배설물인 똥을 치우는게 일과 이기도 하니 문득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이 동아일보에 쓴 “쇠똥구리가‘춤’ 을 추는 이유”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왜 하필 이런데서 살까? 어린시절, 이런 생각으로 소들이 큼지막하게 떨어뜨리고 간 소똥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쇠똥구리 를 구경하곤 했다. “지저분한걸 뭘 그리 보느냐” 혼나기도 했지만 진짜 신기했다.
자연의 생존 전략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나서야, 우리 기준일 뿐, 자연에서는별일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마치 전원생활을 즐기는 이들이 서울 강남 빌딩숲에 사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데서 살까’ 하는 것
처럼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이들의 신기한 능력은 따로 있다. 우리는 모든 쇠똥구리가
경단이라는 똥덩어리 를만들어 굴리는걸로 알지만, 이런 녀석들은 10% 정도다.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맛있고 따뜻한 ‘선물’ 아래의 땅속을 ‘개발’ 해 살거나 새끼를 낳는다.
하지만 사막처럼 뜨거운 곳에선 이럴 수 없다. 약간이라도 주변이 촉촉해야 새끼들이 자랄
때까지 덩어리가 말라 버리지 않기에 경단을 만들어 여기까지 가져 와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남자들이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하듯, 이들도 비슷해서, 이런 일은 수컷의 몫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서울의 좋은 곳에 집을 마련하는 것 이상으로 쉽지않다. 경단이 잘 굴러
가게끔 거의 원형에 가깝게 만들고, 더 큰 힘을 내느라 물구나무를 서듯 앞다리로 땅을
짚고 뒷다리로 밀기 까지 하지만 이것으론 턱도 없다. 세상 자체가 울퉁불퉁한 데다
이 경단이 자기 몸의 두 배나 큰,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3t 이나 될 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뒤로 밀다 보니 앞을 볼 수 없어 구덩이에 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이러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끌어올리지만 안타깝게도 ‘다된 밥’ 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구덩이에 빠진 덩어리를 간신히 빼낸 후나 한참을 밀고 가던 도중, 가끔 한 번씩 이
덩어리 위에 올라 마치 춤을 추듯 한 바퀴를 쓱 돈다. 잘되고 있다 싶어 기쁨의 춤을 추는 걸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2016년 스웨덴 룬드대 연구팀에 의하면.....
단순한 춤이 아니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방향을 파악하는 몸짓 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태양과 달, 그리고 은하수의 위치 를 이용해 길을 찾는데, 이를 위해 처음 출발할
때의 하늘 풍경을 스냅 사진 처럼 기억한다. 예고 없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생존의 법칙을 녀석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벌써 일년의 절반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우리 역시 바라는 곳으로 잘 가고 있는지, 가끔 쇠똥구리 처럼
‘춤’ 을 출 필요가 있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엉뚱한 곳으로 간다면, 이거야말로 큰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