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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하는
왜냐하면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구약은 생로병사의 궤도로 돌고 있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를 권선징악의 논리인 율법 즉 도덕천으로 극복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영원한 생명과 평안인 행복을 누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아름답고 대단한 도전의 역사요 기록 같지만
외모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절대 불가능의 도전이 된 것은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한 것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질 헛되고 헛된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자신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절대로 온전한 이성과 감성을 가질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결국 구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 행하므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 하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약은 복음을 통한 구원의 첫 번째 조건으로 율법인 도덕천이나 혈연을 비롯한 이 세상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이란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우리 피조물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온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므로 우리는 그저 회개하고 그 사실을 믿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은혜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믿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완성된 구원을 신나고 행복하게 누리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목적이요 사명이지만 이 역시 신기루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피조물의 한계로 인하여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누릴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때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인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율법에 따른 외모인 도덕천이 너무나 멋있고 대단하여 진리의 달인 여호와 하나님과 그 사역의 핵심인 복음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르치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실족하기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의 한계와 복음의 무지에 따른 우리들의 불의와 불법을 선용함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처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사용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초지일관 우리 피조물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회개를 통하여 복음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아 누리라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에 따른 혈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용할 뿐 아니라 더 온전하고 완전한 방법인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심으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열한지파와 유다 지파,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 열한제자와 가룟 유다처럼 외모인 율법에 따른 도덕천인 선악과 죄로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님과
인자인 예수를 비롯하여 율법인 도덕천에 따른 피조물의 한계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모든 불의와 불법을 복음의 예수를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서로 사랑함으로 확인할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이고 은혜인지 분명하게 깨달아 감사함으로 신나게 누릴 수 있도록 성경을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함으로 성경을 주신 본질을 도덕천으로 판단하여 미혹할 뿐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나 바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과 아직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 목교세들이 하나님의 뜻을 도덕천에 따라 판단함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극복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강요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법과 규례로 가로수를 만들어 그것을 길처럼 미혹하며
또 성경에 나오는 절기와 이 세상의 기념일등을 빙자하여 추수 감사절이니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하면서 새로운 절기를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아세라상과 주상인 교회와 각종 종교단체와 행사를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미혹하고 있지만
우리 인생이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복음의 예수는 외모인 도덕천에 따른 선악의 잣대로 판단한 복과 저주를 좌우 가로수로 사용한 오직 믿음으로만 보이는 유일한 구원의 길로
도덕천인 외모에 따라 우리들이 바른 길로 인식하고 있는 혼자나 공동체로나 다 갈 수 있는 길로 눈에 보여 진짜 같지만 사실은 신기루인 허상의 기성복 같은 그런 길이 아니라
걸어감으로 누리기 전에는 절대로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모든 조건에 가장 잘 맞는 맞춤복 같은 길로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혼자나 공동으로나 절대로 갈 수 없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또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나와 다름과 영역을 분별하여 표시하는 지계석를 옮기지 않는 것이기에 부모나 선생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 또는 너를 위하여 지계석를 옮기는 것은 복음의 장님이 복음을 안내하는 것으로
결국 함께 실족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 예수님의 경고처럼 선생이 아니라 소유한 구원을 누리는 증인이 되는 것이 나와 너를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알 때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너무나 멋진 증인의 삶을 신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오늘 보여 주시는 것을 묵상해 보면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는 모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주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무지한 모세가 하나님 사역의 핵심인 복음의 본질을 도덕천으로 판단함에 따라 신기루 같이 사라질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신 참 복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부모와 선생이 되어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이는 결국 율법으로 복음을 삶으려는 불가능의 도전이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목교세들은 이를 하나님 말씀의 본질처럼 이 세상의 일로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음과
또 하나님을 빙자하여 도덕천에 따라 요구하는 모든 조건들은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것으로 이는 결국 구원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불필요한 고통 속에서 구원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음을 인식할 때
하나님을 빙자하여 율법인 도덕천에 따라 하는 모든 말은 참으로 멋있고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오히려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여 미혹함으로 스스로 선생과 부모와 심판관이 되어 죄의 멍에를 씌우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각각의 성경기자들이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이 직접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 도구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기에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깨달음은 언어도단, 불립문자라 하여 이심전심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의 언어나 문자를 방편이 아닌 본질로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절대로 우리 피조물이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하여 더욱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므로 은혜로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복인 행복한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복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은혜로 받아 확증된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 까지는 미완이라고 복음에 무지한 목교세들이 헛소리로 미혹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절대로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믿고 인정한다는 것으로 결국 성령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구원이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불완전한 구원 같지만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알 때
구원을 지키기 위하여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는 이런 불확실함에 목숨을 걸거나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음행하고 자신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빨리 돌이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이 될 뿐 아니라 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분별하지 못한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최후 심판의 그 날이 곧 일어날 것으로 착각함에 따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로 미혹하고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것으로 전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성경을 통해서나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인 도덕천이 본질인 복음보다 더 그럴 듯 하고 달콤하게 보일 뿐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으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짓이 되니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가짜 복음인 도덕천에 자긍심을 가지고 본질처럼 착각에 빠져 바울이 요구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섬김과 봉사와 나눔을 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찾아가는 삶으로
우리들의 얼굴과 가슴에 있는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고 착한 양심을 위한 선한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자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의 도전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인 도덕천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임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이 손가락이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권능을 이 세상을 잘 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을 아는데 사용하면
이 세상의 관점인 도덕천으로 보면 너무나 대단한 성경에 나온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대단한 인생들도 절대로 피조물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온전히 표현 할 수 없음을 알뿐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남용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며 악을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본받기 위하여 발악하며 악을 쌓기보다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너무나 감사한 이 복을 서로 사랑함으로 누리는 증인의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외모로 판단함으로 왜곡 변질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우리들이 이미 경험한 이단이라고 하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고 또한 이 세상의 조직이나 공동체보다 더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와 종교단체임에도
아직도 성령의 권능을 외모로 판단하여 병 고침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복음의 무지를 도덕천의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선하게 보이는 일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겠지만
이는 복음과는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선생이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감동을 성경기자에 의하여 표현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대로 판단하여 최후 심판의 공포분위기까지 조성한 것으로
지금의 제도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가 절대로 아님에도 아직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초대 교회로 돌아가지며 진짜 교회처럼 나팔을 불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목교세들의 미혹과 유혹에서 빨리 깨어나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초대교회의 허구에서 벗어난 성령님께서 위로하고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손가락인 도구로 주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빈 껍질이 되어버린 구약의 요소들인 율법, 성전, 십일조, 안식일, 예배, 기도, 찬송, 금식 등을 비롯하여
인자의 예수나 부부나 혈육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천에 따른 사랑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봉사등과 여러 가지 제도를 아직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처럼 나팔을 불며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불의와 불법을 빨리 멈추어야 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나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이 도덕천에 따른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모양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으로 곧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그것을 누리는 삶으로 증인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묵상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성전인 교회와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율법의 완성이고 또 그것들이 손가락이 되어 가르친 것으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확정된 구원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피조물의 사명이요 목적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의 지체들은 복음의 무지에 따른 도덕천의 판단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복음으로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믿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히 깨달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내용의 목적이 도덕천에 따라 상대방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인 꽝과리와 나팔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 몸임을 믿고 상대방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이 된 그 예수를 우리가 사랑하기(살기) 위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바로 알 때
이것이 바로 율법이 손가락이 된 도덕천이 가르치는 복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시는 평안이고, 구원받은 복을 누리는 행복임을 분명히 알아야
복음에 무지함으로 도덕천에 따른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복음을 가르치는 손가락으로 주신 인자인 예수와 도덕천인 율법과 혈연과 제도와 문화와 역사 등을 한계를 넘어 회개하고 복음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을 날마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서로 사랑하므로 확인하고 누릴 때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기적이나 이적보다 더 큰 감동과 감격임을 깨달아 날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으로 확정된 구원을 행복하게 누리는 오늘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