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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의 등극 공식과 평가(1-3)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배신까지도 감내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1-4)
13장은 이야기의 무대가 유다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갑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제23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17년을 다스립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의 악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7절에서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다는 언급을 보면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만을 섬기는 예후의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이전의 혼합주의적 종교 전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예후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여로보암이 만든 단과 벤엘의 황금 송아지 제의를 완전히 없애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은 죄는 조금만 방심해도 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자극하여 금방 번성하게 만듭니다. 우상숭배의 죄가 쉽게 만연해지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성공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이런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기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이 종교보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이방제의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손에 넘기다’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하는 관용적인 표현인데, 여기서는 아람의 승리를 약속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항상 패배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도 여호아하스 평생 동안 아람에게 졌다고 말합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에게 진 것을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였습니다. 나라 간의 압제는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고 영토의 일부분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남조 유다 왕 요아스에게서도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받아 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 경제적 부담은 모두 백성들이 져야 하기에, 백성들의 삶 역시 황폐해졌을 것이 다원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한 여호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절하게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5-7)
자신이 실패 후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그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훈을 삼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비참과 초라함을 안기십니다. 은혜를 망각한 채 배신과 반역으로 배은망덕한 것이 여호아하스의 허물이었습니다.
5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5-7)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자를 주십니다. 이 구원자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당시 앗수르의 왕인 아다드니라리 3세이거나 하맛의 자쿠르 등 이웃 나라의 통치자라고 봅니다. 당시 사역하고 있던 엘리사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구원자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애굽의 압제에 있던 이스라엘이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나온 것을 묘사한 신명기 26:7-9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적의 손에 넘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자 구원자를 보내셔서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해주시는 이 패턴은, 사사기에서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과 매우 닮았습니다. 여기서 구원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일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자는 이방 나라 왕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에 집중하지 않고 구원자를 세우신 여호와께 집중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엘리야 이야기 이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정세에도 관여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기준에 따라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시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나라의 성쇠가 주변 나라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듯이 보이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열왕기 기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6-7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려움이 끝나자 여전히 이전에 믿던 신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길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세라 상은 여전히 사마리아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으면 이전의 모든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지만, 구원만 경험하고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고는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아하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다른 신을 절대 섬기면 안 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방식도 여호와께서 정한 방식으로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회심한 것이 아니라 개종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신만 요청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께서 다시 아람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것이다.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되었다는 것은 알곡 하나 없이 먼지만 날리는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거의 죽이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 보병 만 명만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배반한 심판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여호아하스의 죽음 공식(8-9)
하나님 대신에 돈과 권력을 숭배하면 그것들에게 넘기셔서, 그것을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닌 모든 것은 나를 노예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8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8-9)
이 단락은 여호아하스의 죽음 공식입니다. 여호아하스에 대해서는 아람과의 전쟁 이외에 다른 업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죽어 왕의 묘실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대로 예후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통치(10-13)
가정이나 국가가 혼란스러워진 상황을 경험하면 이러한 일들을 다음에나 다음 세대들이 답습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자성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의지를 가지고 개선하지 않으면 악행은 반복하게 됩니다.
10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10-13)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 37년에 이스라엘 왕이 됩니다. 그런데 1절에서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요아스 23년에 왕이 되었고 17년을 다스렸으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 39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 역본들이 이런 조화를 위해 유다 왕 요아스 39년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요아스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인데, 죄목은 아버지 여호아하스와 동일합니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 행한 것입니다. 요아스의 업 적으로는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것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바로 죽음 공식이 나옵니다. 그도 사마리아 왕의 묘실에 묻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이렇게 요아스의 업적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이 요아스의 이야기는 엘리사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실패가 자녀에게서 반복되는 것은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인격과 삶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부모의 삶을 반추하며 교훈을 얻고, 과오를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성찰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