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논쟁 비화 두 가지 // 임헌영
1. 팔봉과 무애의 논쟁 후일담
1970년대 중반기의 한국은 일부 지식인에게 지옥의 계절이었다. 1974년, 광복 후 가장 많은 문학인을 구속시킨 사건(이호철. 정을병. 김우종. 장백일. 임헌영)으로 나는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 장장 24년간(정식 복권 된 게 1998년) 온갖 제약에 묶여 지냈다.
월부 책장사가 성행했던 그 당시 이 분야에서 관록이 붙은 태극출판사에 내가 기획부장으로 취업한 것은 1975년이었다. 그때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권 규모의 <한국문학대전집>을 계획, 이를 위한 실질적인 편집기획이 내 몫이었다.
홍윤희 사장이 판매와 경영을 맡고, 조소앙의 삼균주의 전문가였던 사장의 아우 홍선희 철학박사(벽초의 집안으로 홍기삼. 김문수와 청주고교 동창)가 편집 기획일체를 자문하던 태극출판사는 60년대 이후 대두한 신중산층의 구미에 맞춰 백과사전을 비롯한 전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더구나 이 출판사에 애정이 갔던 건 그 숱한 전집물(백과사전을비롯한 여성, 사상 등) 홍수 속에서 홍박사의 용기로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본과 서구의 '진보적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홍박사는 나에게 한국문학도 구태의연한 전집이 아니라 진보적 관점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면서 전적으로 모든 기획을 일임해 주었다.
우선 범문단적인 편집위원을 구성한답시고 서정주. 박두진. 김동리. 안수길. 여석기. 백철. 조연현을, 기획전문위원으로 정한모. 박재삼. 이호철. 정을병. 김문수. 신동한. 백낙청을 추대했다. 아직 문인들이 지금처럼 이해관계에 밝지 않은데다 문학전집이라는 드문 기획인지라 각자의 게재 몫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더구나 매절로 적잖은 원고료를 지불했기에 약간 신도 났다.
더욱 열을 올린 부분은 부록으로 <<문학 논쟁집>>을 기획했던 점이었다. 내 개인적으로 근현대 비평사 집필을 위해 온갖 자료를 수집 중이었는데, 이것과 맞아 떨어져 전국 유명 도서관을 뒤지며 희귀본을 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하고, 백순재, 김근수 등 장서가의 도움도 받아가며 기초자료들을 수집, 근대 문학사 이래 본격적인 논쟁사를 다룬 첫 결실인 임헌영 편 <<한국문학 대전집 부록 1 문학 논쟁집>>을 출간했다(나중 내가 1979년 모종의 사건으로 구속 되자 편자인 내 이름을 삭제해 버림).
자료 수집도 중요했지만 나는 더 욕심을 내어 당시 생존했던 원로 문인들의 증언을 들어두려고 권말에다 <근대문학 논쟁 비화>라는 좌담을 마련, 김팔봉. 백철. 양주동. 이헌구 제씨와 사회자로 이어령을 동석(1976. 3. 12)케 했는데, 분단 이후 이런 거물들,
1920년대 논쟁의 적수였던 팔봉과 무애까지 한자리에 앉기는 처음일 것이다.
1903년생 동갑인 무애와 팔봉, 1905년생의 이헌구와 그 3세 연하인 백철 모두가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인지라 원로들 답게 청년시절의 논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20년대에 톨스토이(1910년 작고 후 한국에서 여러 기사가 나서 더 유명해짐)를 흉내내어 루바슈카를 입고 민중문학으로 속속 모습을 바꿔가며 신경향파- 프로문학- 카프 조직 - 해산과 전향이라는 논리적인 굴절 과정을 아무런 여과나 이해관계 없이 진솔하게 추억담으로 털어놓았다.
팔봉이 일본 유학 중 앙리 바르뷔스의 클라르테운동에 감화되어 대중을 위한 현실비판 문학을 하자는 취지로 알지도 못했던 월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때의 사상이념이 민중주의적 차원이었으며, 정작 문단생활을 하면서 프레하노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건 약간 충격이었다. 나도 등단(1966년) 이후 이내 민족. 민중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프레하노프에 전념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문학사도 결국은 돌고 도는구나 싶었다.
특히 팔봉과 무애의 대화는 너무 적나라하여 감동적이었다.
양주동 ; .....내 솔직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냥 재주로 논쟁을 했는데 팔봉은 뭔가 있었어요. 사회주의니 민족주의니 자본주의니 하고 말입니다. 그런 이론적 배경이 있으니까 재주만으로 대항하던 나는 많이 배운 반면에 팔봉도 나의 논쟁 기술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웃음).
김팔봉 ; 무애, 그때 생각나요. 우리 그때는 서로 알지도 못하면서 논쟁을 했는데, 하다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사신으로 연락하여 공개된 논쟁의 배경까지를 설명해 가면서 아주 신사적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요새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그때 싸우면서도 아무런 유감이나 인신공격이 없었습니다.
좌담 "근대문학 논쟁 비화", 임헌영편 <문학 논쟁집> 수록, 태극출판사
최서해는 경향적 작품을 쓰면서도 친구는 국민문학파에 더 많아 무애가 어느 쪽이냐고 다그치자 "허허허" 웃기만 하고 끝까지 대답을 않았다든가, 해외문학파가 실체도 없었는데 프로문학측의 공격을 받으면서 한 흐름을 이뤘다거나, 프로문학 빼고는 이론도 체계도 없이 그냥 프로문학이 싫어 억지 논리를 전개해 봤다는 등의 실토는 문학의 본질을 다시 검토케 만들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기록으로도 할 수 없었던 팔봉과 무애의 인생론적 사담이었다. 무애는 솔직히 당시 국민문학이나 중도파에서는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회과학에 대하여 백지상태였다고 고백했다. 이어 무애가 팔봉에게 그때 전향 한 것이 강제였나 내면적인 자발성이었냐고 말머리를 돌리자 팔봉은 외적인 강제였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무애는 "역시 팔봉은 대단해. 나 같으면 내면적인 자발성에서 전향했다고 말할텐데.......
그럼 아직도 그런 일 했던 거 후회 않아?"라고 따졌다. 팔봉은 "후회도 않고, 나의 문학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라고 하여 잠시 자리를 숙연케 했다. 요컨대 팔봉은 현실비판 의식의 문학에 대한 정당성을 시종 견지해 왔다는 건데, 이건 그가 6.25 때 인민재판으로 사형 언도를 받아 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다가 송장 구덩이에 팽개쳐진데서 기어나와 살아남은 참담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의 인민재판 체험기는 6.25만 다가오면 반공 교육용으로 재생시키곤 했던 유명한 일화다. 여담이지만 만약 북한이 팔봉을 처치하기로 들었다면 확인 사살까지 하던 때라 결코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이런 고통을 겪고도 팔봉이 여전히 프로문학은 옳았다고 고백한 것(실은 개인적으로 내가 팔봉을 찾아가 프로문인들의 인적사항을 문의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문단생활을 떠난 지가 오랜데도 내 이름을 듣더니만 금새 반갑게 맞아주며 "얼마나 고생했냐"고 그윽한 애정을 나타냈다)은 놀라웠다. 혹 나를 통하여 자신의 청년시절을 회상했던가. 그는 사석에서 프로문학 이야기만 나오면 먼 그리운 추억처럼 회고해 주었는데, 어쩌면 만년의 이런 모습이 진짜 팔봉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문학사가 유희가 아니라 진지한 사상사인 건 이런 인사들의 피 흘린 고난의 덕분이 아닐까.
(김동리)
2. 김동리의 참여문학 공격
1978년 나는 월간 <<독서>>(발행인 여승구. 현재 책을좋아하는사람들 대표)로 일자리를 옮겼다. 위치가 무교동이라 문단 지기들과 문학담당 기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여기서 독서운동을 위하여 매월 <이달의 좋은 책>을 선정 발표(아마 국내에서 이런 캠페인을 한 것은 처음임) 했기에 화제가 되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서 민중문학이 강력하게 대두, 기존 문단은 서서히 붕괴하고 계간지 중심의 새 질서가 정립되어 가자 원로 대가들의 노골적인 불만이 '참여문학 빨갱이론'으로 비화했다.
발단은 1978년 9월 12일 김동리가 <한국문학의 나아갈 길>(태창출판사 주관. 영화사였던 태창이 출판부를 신설, 많은 책을 냈는데 이호철. 이문구. 염재만 제씨가 계속 기획 전반을 맡았다)이란 강연회에서 참여문학 평론가들(주로 <<창작과 비평>>을 지칭)의 활동을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는
사회주의적 내지 진보주의적 사실주의"라고 평하고는 "최근 수 3년간은 여기서 다시 변모의 양상을 띄우기
시작하고 있습니다"고 포문을 열었다.
바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이란 고발이었는데, <<조선일보>>는 이런 요지를 9월 13일자에 실었다. 그 며칠 뒤 나는 흥사단 초청 강연회에서 김동리의 논지를 반박했는데, 이 기사가 일부 신문에 보도되자 송상옥(재미작가.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 근무)이 나의 발언요지와 구중서의 반론을 함께 게재했다(9월 24일).
그쯤 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기대했던 김동리는 즉각 <문학엔 임무가 있을 수 없다 - 임헌영. 구중서씨의 반론에 대하여-->(9.27)가 나와 참여문학 동네 전체를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글 요지는 "구씨의 소론에 언급치 못하여 미안하다. 다른 기회에 실컷 토론을 하든지 의견을 교환하든지 했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었는데, 나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눠보고자" 한다고 겨냥했다.
곰곰이 이 구절을 따져 보았다. 우리 또래의 참여문학 평론가 진영 중 당시 <<현대문학>> 출신은 나 혼자였고, 보수적인 문단 원로들과 두루 가깝게 지냈던 것도 나뿐이었다. 그런 뜻에서 나를 논쟁의 상대로 지목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가장 나쁘게 봐서 그랬는지 그 속뜻을 알 수 없었다. 존경하던 경제학자 박현채 선배는 이 구절을 보고는 "임헌영, 너는 논쟁에서 빠져라. 이건 김동리가 너를 사상적으로 가장 나쁘게 본다는 뜻"이라고 충고했다.
이후 논쟁은 구중서. 염무웅의 조리있는 반론과 김동리의 끈질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론' 직격탄이 날아들었는데 표적은 백낙청에게도 겨냥되어 있음을 눈치 채도록 장치했었다.
백. 구. 염. 그리고 박현채와 나 등 몇몇이 모여 이 혼탁해지는 논쟁의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결과 더 이상 대꾸하지 말자는 결론이었는데, 마무리는 당사자가 아니었던 홍기삼이 <동대신문>>을 통해 정리해 주었다.
1920년대와 정확히 그 반 세기 뒤인 1970년대의 두 논쟁은 문학의 본질에 대한 추구로 문학이 존재하는 한 반복될 것이다. 지금 김동리가 살았다면 무애처럼 허심탄회하게 당시의 심경을 후배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송상옥은 이 논쟁으로 신문사 내부에서 특종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