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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미세먼지 속에서 지낸 듯합니다. 따뜻한 겨울이 결코 반갑지도 달갑지도 않습니다. 겨울방학 중인 산행을 다시 하려고 해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냥 방학을 지내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1월이 계속된다면 정말 나가볼까 고려중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겨울입니다. 하기야 이상기후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은근히 걱정됩니다. 겨울이 이 정도라면 여름은 배로 뛰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추위보다 낫다고 하지만 냉동이냐 구이냐 선택하라면 글쎄, 구이보다는 냉동? ㅋㅋ 동상도 무섭지만 화상은 더 무섭지 않은가요? 너무 극단적으로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에 관하여 아직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거참!
우리는 전쟁 포화 속에 있지 않은 것만도 감사합니다. 중동과 유럽의 전쟁은 기약이 없네요. 군인들이야 직업이니 그렇다 치고 백성이 불쌍합니다. 식량 배급 받으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더 마음이 슬퍼집니다. 어떻게 자랄까, 무슨 꿈을 꾸며 자랄까, 꿈이라도 꿀까 등등 생각이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괜스레 불안이 스며듭니다. 한창 말대포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말이 씨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높으신 양반들이야 올라가든 내려가든 피할 곳이 있겠지만 역시 일반 백성만 고달파질 것입니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는 것이 그 양반들의 책임인데 때려 부술 생각들만 하고 있는 듯하여 오히려 불안하지요. 하기야 ‘하나님이 보우하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 이야기 정말 재미없습니다. ㅋㅋ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아직 새해 초두, 희망을 갈고 닦으며 전진합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2024년 1월 13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잠언 29 : 20)
<티처스 라운지>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어린아이라고 모두 순하고 착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때부터인가 부모의 말에 대꾸한다든가 지시에 거부하는 의사를 나타냅니다. 하기야 젖먹이 때부터 말은 하지 못해도 거부 의사는 표현합니다. 아이라고 싫고 좋고를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서는 부모의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본능적으로 알 것입니다. 대체로 시키는 일에는 고분고분 따릅니다. 모르니까 계속 알아가야 하는 단계이기에 따라가는 것이지요. 조금씩 알아가며 시야가 넓어지고 지각이 생기고 자신의 지식도 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자기 생각도 나오고 의견도 표합니다. 조금씩 달라짐을 알게 됩니다.
수 년 동안 가정에서 자라다가 학교라는 새로운 사회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부모와 다르게 새로운 지도자가 생깁니다. 부모와는 또 다른 권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함께 생활합니다. 혼자만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아이들과 어울려서 지내야 합니다.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생각들이 많아지고 의견들이 다양해집니다. 지식을 배워감에는 공통의 요소가 있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표현하는 데는 서로 다른 길들이 많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것을 알고 인정하고 조정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 다소 거친 아이가 껴있다면 아무래도 힘들어집니다.
어리다 해도 좋고 싫은 감정을 가집니다. 그것 또한 서로 다릅니다. 내가 좋다고 다른 아이들도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아이들 속에도 못된 버릇을 가진 아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내에서 자그마한 도난사고가 발생하면 작은 일이지만 지혜롭게 해결해야 합니다. 당사자를 찾아내서 벌을 주기보다는 훈계를 통하여 바른 길로 나가게 해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심리적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 있고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는 벌주는 곳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언어가 어떤 영향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고 그것을 도덕적인 지식으로 갖추게 해주어야 합니다.
요즘은 많은 학교나 학급에도 다문화 환경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 인종과 서로 다른 국적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한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또한 선생님은 그런 문화 차이도 이해해야 합니다. 담임선생님은 맡은 학생들의 개인 환경도 가능한 대로 알아두어야 합니다. 학생의 언행이 뭔가 다르다면 이해해야 하고 학생들 서로에게 이해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종으로 지역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로 인하여 충돌이나 갈등이 발생하면 해결하기 매우 까다롭게 됩니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조심하고 예방하는 것이 낫습니다.
확실한 증거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일대일 개인적으로 조용하게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억측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사자는 개인적인 모욕을 받은 것으로 거칠게 반항했습니다. 문제는 교장선생님이 처음 제기한 ‘카를라’ 선생님의 생각에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를 부릅니다. 그리고 추궁하지요. 완강히 부인하자 학교 사무실 근무를 정지시킵니다. 그 아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카를르 선생님 반에 있습니다. 자연히 어떻게 된 사실인지 알게 됩니다. 엄마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아들도 부인합니다. 선생님과의 사이가 갑자기 서먹해지고 불편해집니다. 한 반의 아이들까지 알게 됩니다.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더구나 교무실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누가 선생님들의 언행을 감시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것입니다. 사건이 이상한 데로까지 번져가는 것입니다. 카를르 선생님은 아이에게 최대한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방어하려 해도 이야기는 겉잡기 힘들게 돌아갑니다. 학부모회에서도 문제로 드러나고 교사들 속에서조차 서로 감시하느냐고 말들을 하고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갑니다. 당황스럽고 도망가고 싶을 지경입니다. 학교를 떠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답니다. 가뜩이나 교사가 부족한 상황에 대체 인력도 없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학교는 시끄러워집니다. 게다가 학교신문에까지 기사화됩니다.
학교 내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학교 측에서는 어떻게든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방어합니다. 대외 이미지 때문입니다. 학교의 명예이고 학생들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최대한 지켜야지요. 한편으로는 깨끗하고 정직한 공동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 흔히 정의를 지키려다 애정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의롭고 깨끗함에서보다는 사람들 속에 연결된 공동체 의식으로 다져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정한 일을 덮으려는 것도 잘못이지요. 균형을 이루기 힘들지만 그래서 지도자의 지혜로운 대처능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 ‘티처스 라운지’(Teacher's Lounge)를 보았습니다. 독일 작품입니다.
무엇을 담고 계십니까?
우리가 갑작스런 횡재를 만나면 보통 어떤 반응을 합니까? 주택복권이나 로또복권 같은 엄청난 횡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경품에 당첨되어 라면 한 박스를 얻게 된다든지 쌀 20kg 한 포대를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굉장히 기분 좋지요. 우리가 한창 어렵게 살 때 아내가 가스렌지를 경품으로 얻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거 10년 이상 애지중지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학교 소풍을 가서도 보물찾기 한번 당첨된 적이 없던 아내가 난생 처음 얻은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꼭 필요했던 물건이고 그게 자기 돈 들이지 않고 경품에 당첨되어 들어왔으니 기쁨이 두 배 이상 된 것입니다. 더구나 평생 처음 당첨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그것 또한 기쁨 중의 기쁨이었지요. 지금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그 때는 우리 신앙이 초보에 있던 때라 ‘할렐루야!’ 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자, 반대로 갑작스런 불행을 당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우리 신자들은 보통 뜻하지 않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곧잘 찾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그런데 특히 어디서 예민하게 반응하지요?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겠지만 행운보다는 불행에서 예민해집니다.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흔히 ‘왜 내가?’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왜 우리여만 하느냐 여기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신앙에 따라서 이 해답을 찾는데 시간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나 부정적인 사건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합니다. 물론 그만큼 상처가 깊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 가지고 상처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이나 마음 아프게 하는 말만 들어도 오래 고심합니다.
오래 전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자기 공장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화면을 통해서도 익히 아는 모습입니다. 흙을 반죽해서 모양을 내고 불에 구워내는 과정을 통해 그릇이 만들어져 나오지요. 그 과정을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서 모양새나 도자기의 품질이나 가치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서 도자기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비유를 합니다. 사 64 :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는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그 손에서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진흙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기에 따라서 멋없는 뚝배기가 될 수도 있고, 하시기에 따라서는 국보급 상감청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갖추려면 불에 몇 번을 더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니지요. 소위 불같은 연단을 그만큼 많이 받아야 그만한 그릇이 되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어영부영 지내면 뚝배기만도 못한 그릇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창 2: 7).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비유되고 또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을 밟아 부수고 주무르고 반죽해서 구워내 그릇을 만들어 냅니다. 흙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참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불에까지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속된 말로 환장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쓸모 있고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보다 더 많이 불 속을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혹 뜨겁다고 도중에 튀어 나오면 그릇이 될 수가 없습니다. 뜨거워도 견디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 보다 더 요긴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겠지만 우리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사용합니다. 많은 훈련과 연단을 받은 사람이 어렵고 힘든 일을 참고 인내하면서 잘 풀어가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바로 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보다 더 쓸 만한 그릇이 되려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보다 더 아름답게, 보다 더 귀하게 만드시려고 불 속에 집어넣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견뎌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그렇게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 43 :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그런데 그릇의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건을 담아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릇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 물이 담겨 있으면 물그릇입니다.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이고, 국이 담겨 있으면 국그릇입니다.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그 속에 개밥이 담겨 있으면 그 그릇은 개밥그릇입니다. 그 내용물에 따라서 귀하게 또는 천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라오면서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즉 자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얼굴이 좀 갸름했으면. 쌍까풀이 되었으면 등등. 청소년들의 중대한 고민거리들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외모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이 여전히 장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한국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프답니다. 천국에서는 실물 대조작업 하느라 바쁘고, 지옥에서는 불구덩이 리모델링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라지요. 이미 지상에서 불가마로 단련된 사람들이라 웬만큼 뜨거워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우리의 외모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담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 역전의 사람입니다. 바울이라 불리기 전에 그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예수 그리스도 이단에 미친 사람들을 잡으려 사방팔방을 뒤지며 다녔습니다. 행 9 : 1 - 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런데 바로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8 - 9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 즈음 주님은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지시합니다. 11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 때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누군데 그에게로 갑니까? 우리를 잡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자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멘! 예, 사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려 특별히 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처음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겠습니다. 빌 3 : 5 - 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 중에서도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 율법 중심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믿음에 있어서 누가 감히 사울을 탓하겠습니까? 그는 어디를 가도 당당했습니다. 좀 과하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세상에서는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 22 :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그 시대 석학들이 모여 배우는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나 학문으로나 그 행함으로나 어디 흠잡을 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여태 담고 있던 율법과 지식을 다 쏟아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새 것을 담았습니다. 그 새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사울입니다. 코 수술한 것도 아니고 쌍까풀 수술한 것도 아닙니다. 사울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기념으로 이름만 바꾸었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릇이 바뀐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뀌었는가? 담은 내용물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빌 3 : 7 - 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아멘!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이 무엇입니까? 싸버렸다는 뜻이지요. 왜요? 그래야 새 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새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겁니까?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꾸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알 듯 세상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빠릅니까? 나를 바꾸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뒤집으려고 오신 것 아닙니다. 우리를 바꾸려 오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릇을 바꾸는 것은 좀처럼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의 내용물을 바꾸면 간단합니다. 여태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은 과감히 내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사울의 신앙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 즉 하나님 말씀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에는 눈이 어두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문자대로 보았을 뿐입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실체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사울이 여태 그 율법을 지키려고, 일점일획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힘썼습니까? 그런데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그건 그림자일 뿐이다. 그 속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지요. 실체를 알고 나니 여태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소용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배설물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닌 껍데기를 붙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알맹이를 담게 되었습니다. 그릇은 그냥 그릇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담고 있는 내용물이 달라졌습니다. 여태 사울이 담고 있던 내용물은 껍데기, 그림자, 거짓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이 담고 있는 내용물은 알맹이, 실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울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대단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반대로 마귀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실수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 때문입니다. 거짓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꼴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아무튼 두루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엇을 담고 열심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을 담고 열심히 뛴다면 그 열심은 오히려 마귀를 위한 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행여 껍데기 붙잡고 동분서주해봐야 주님은 그 날에 분명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 7 :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생각해봅니다. 사울이 율법, 하나님 말씀을 몰랐습니까? 자기 딴에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약속(구약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비밀이었고 바로 구약성경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골 2 :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신약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숨어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신약성경) 속에 있겠지요. 그런데 이미 말씀하였지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과 장래사를 비유로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옛날 사울처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울이 그랬듯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늘 대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것을 실체인양 믿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체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나 보여주셨지만 거부하였습니다.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그것만 우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겉만 보고는 지레 판단하여 무시하고 멸시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들어보니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분명 달랐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왜 다른지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선 출신 지역을 가지고 무시하였습니다. 요 1 :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정형편을 보고 무시하였습니다. 마 13 :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리고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더구나 귀신들렸다고까지 비난합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예수님에게서 백성을 떼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꾸짖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자기네 안 듣는 것은 말하지 않겠는데 왜 백성들이 듣고자 하는 것까지 막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지도자로서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 짓입니다. 그 ‘열심’이 자기들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목자 타령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알고 따르든 모르고 따라가든 구덩이에 빠집니다. 지옥행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며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목자(목회자)들이 가르치고 강조하며 신자들이 애쓰고 있는 사항이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것이지요. 말이야 당연합니다. 그 주님의 뜻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말씀 곧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대로’ 하는 것에는 대부분 ‘율법적인 요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유대인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결과는 다시 오실 때 우리도 못 알아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국 가기는 어렵다는 말이지요. 기막힐 일 아닙니까?
성경 속에 율법적인 요소 즉 교훈의 말씀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지키며 살아야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무슨 책입니까? 구약과 신약, 곧 언약,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고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하나님의 복은 언약(약속)을 지킬 때 주어집니다. 천국도 언약을 지켜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바로 무엇을 약속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구원’ 그런 애매모호한 신앙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고 끝난 이유는 하나입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언약(약속)은 무엇입니까? 교훈의 말씀(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약속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아십니까? 바로 ‘신약’(새 언약)입니다. 눅 22 :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옛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구약)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엉뚱한 것을 담아서 백성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사람의 계명’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마 15 : 8 - 9)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라 말라 하는 율법, 초등학문에 매일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시다. 배워서 알아야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대로 된 그릇, 언약의 말씀을 담고 신앙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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