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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 사랑 받을수록 겸손해지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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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 받을수록 겸손해지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주종관계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일까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그렇게 인자한 분이 아니시고
인간을 종처럼 부려 먹는 분이시며 이런 하느님께 인간은
낮에는 힘들게 일해야 하고, 돌아와서는 시중들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굽신거려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일까요?
한 마디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임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얼마간 그런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7장인데 앞선 12장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종을 너무도 사랑하고, 오히려 식탁에서 종의 시중을 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착각하지 마라! 너희는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겁니다.
‘오냐, 오냐 하니까 할애비 수염까지 당기려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손주를 나무라는 말이지만,
할아버지는 이런 나무람에 오히려 괜찮다고 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그러니까 애가 버릇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단지 할아버지와 손주의 얘기만이 아니고,
너무 잘해주면, 미성숙한 사람은 자기 주제를 망각하고 버릇이 없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을 할아버지와 버릇없는 손주의 예를 들어 얘기하는 것이지요.
사실 성숙한 사람은 잘해줘도 자기 주제를 망각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잘해줄수록 고마움을 더 느낄 뿐 아니라
잘해주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더 존경할 것이고,
자기는 그렇게 잘한 것도 없고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일 겁니다.
충직하고 겸손하고 성숙한 종이라면 자기가 할 바를 다한 다음에도
우리는 주님께 쓸모없는 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천한 존재이고 비굴해야 하는 종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시고 넘치는 사랑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치시는 말씀일 겁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회의를 위해 지방에 와 있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간신히 올렸습니다.
그래서 내일 혹 강론이 올라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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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하오니, 주님!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일을 다 하게 하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다 하게 하소서!
다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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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해야 할 일과 하고싶은 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잔뜩 해 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들이 큰소리치는 안타까움을 보았습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고 공허한 메아리만 남았습니다. 세상은 참 약삭빠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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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국에서 하던 일이나, 대학에서 배웠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미국에서도 뮤지컬을 공부했던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지만 미국으로 이민 와서는 전공했던 일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미에서 의류 사업을 하기도 했고, 핸드폰 대리점을 하기도 했고, 주유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감사할 일은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이고, 성당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한국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분도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전공을 살리는 분도 보았습니다. 간호사로 미국에 와서 일을 하였지만 더 공부하여 의사가 된 분도 보았습니다. 감사할 일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아프리카와 남미로 의료 선교 활동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는 안 하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를 다니는 일입니다. 덤으로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주기도 하고, 동북부 엠이를 위해서 봉사하기도 합니다. 감사할 일은 아직 건강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일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은 보람이 있으면서 수입도 좋은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수입도 좋은 일입니다. 그 다음에 좋은 일은 보람은 있지만 수입은 적은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수입은 적은 일입니다. 그래도 견딜만한 일은 보람은 적지만 수입이 괜찮은 일입니다. 원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가족들 돌 볼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은 되는 일입니다. 가장 안 좋은 일은 보람도 없는데 수입도 적은 일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신문사에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보수가 많지는 않지만 어르신께서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주십니다. 자식들이 용돈을 드리고, 정부에서 연금도 나오지만 어르신은 가족을 돌보듯이 저와 신문사 직원을 위해서 아낌없이 도와주십니다. 제가 외부에 일이 있어서 식사를 못하면 조금 서운해 하십니다. 저도 부르클린 한인 성당 미사를 2년 째 다니고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좋아하고, 신자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여름날에 성당에 와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에 쌓인 오물을 꺼내는 형제님을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큰 솥에 육수를 끓이고, 친교실 청소를 하는 자매님도 보았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에 남아있는 주보를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를 즐겁게 하는 수녀님도 보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말없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인 저는 그분들의 신발 끝을 풀어드리기에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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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있습니다. 확진된 적 없는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하긴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확진 경험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확진 경험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코로나가 맞다’라고 생각해서 병원에 가보고, 자기 진단키트로 검사를 해도 늘 ‘음성’입니다. 혹시 ‘슈퍼항체 보유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매일 미사와 안치 예식으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3년째 코로나 팬데믹 안에 살면서도 아직까지 확진 없이 건강하게 있다는 자체를 떠올려 보니 거의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는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확진되지 않더라.”라고 농담하기도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않았던 저였기에 이렇게 확진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큰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이를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신 ‘내가 건강해서.’, ‘내가 조심해서.’라는 이유를 붙이면서, ‘나 때문에’라는 생각만 했었음을 반성합니다.
그 누구도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음을 이번 팬데믹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고, 또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는 주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내세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 시대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종일 밭에서 힘 빠지게 일하고 돌아와서 또 집안일을 해야 하고 배고픔을 참고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종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면 그가 노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노예는 이런 일들을 하기로 하고 고용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주인은 주인대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현대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분명히 악덕 주인일 것이고 신고 대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이와 같은 주인과 종의 관계는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너무 흔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하는 하느님의 일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하지 않고, 내 일이 바쁘다고 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내게 물질적인 이득이 없다면서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고 있었을까요? 주님 뜻보다 내 뜻을 더 내세우는 사람은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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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C.F 블렌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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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8.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선택, 지금 여기가 꽃자리이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올해 가을은 이런저런 사유로 참 긴박했고 힘들었습니다. 9월18일 마지막 시詩를 올린후 11월 8일 되기까지 한편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가을은 명실공히 기도의 계절입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더욱 기도생활에 힘쓰고 싶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지금 여기가 꽃자리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중 저절로 떠오른 고백이 그대로 강론 제목이 되었습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지금 여기가 꽃자리인줄 모르고 행복을 못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행복의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바로 꽃자리
하늘 나라이다.”-2022.9.18.
바로 마지막으로 올린 시가 꽃자리입니다. 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가 올 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행복의 꽃자리, 주님을 만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 만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쁨을, 찬미를, 감사를, 평화를 선택하여 훈련하며 살 때 행복입니다. 바꿀 수 없는 부정적인 타고난 것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을 탓하기로 한다면 남는 것은 절망, 원망, 실망뿐이요 거기가 지옥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16,2)
하느님은 회개한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은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부터 새롭게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살았느냐만 묻습니다. 날마다 행복인 주님을 선택할 때 저절로 감사요 감사요 감탄입니다.
어떻게 구원의 행복한 꽃자리를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고맙게도 답을 줍니다. 다만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면 됩니다. 행복의 비결은 단하나 이것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저절로 매사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으로 살게 됩니다.
이건 겸손이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이 있을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저는 ‘봉사’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섬김’이라는 말마디를 좋아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은 섬김의 일인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업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수도원 초창기 원장직에 일인다역一人多役, 전천후 다목적용으로 살 때, 한밤중 자다가 피정 신청을 받았고 이어 친절치 못하고 퉁명스럽다는 격렬한 항의를 받고 즉시 사과했던 추억입니다. 즉시 깨달은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교회는, 수도원은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1.사람이 좋아 친절하고, 2.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되고, 3.안팎의 환경이 좋아 쾌적하고 편안해야 되겠다, 바로 이것이 서비스업의 3대 필수 요건이겠구나! 대표적 서비스업인 음식점과 병원, 학교만 봐도 즉시 알 수 있겠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깨달음입니다. 그 어디든 참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에 충실할 때 거기가 행복한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주님을 겸손히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경각심을 주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다만 주님의 종으로써 시종여일 묵묵히 최선을 다해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삶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멋지고 행복한 삶입니다.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여 한결같을 수 있습니다. 누가 뭐래든 종으로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삶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이웃을 섬기는 삶자체가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탓할 것이 있다면 단 하나 한결같이,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주님을, 이웃을 섬기지 못하는 자신뿐일 것입니다. ‘연중 평일 감사송 4’ 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쉬워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구원이기에 자발적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사람이 되어 참행복을 살 수 있는 길도 이길뿐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궁극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주님을 섬기지 않고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섬기겠는지요!
섬김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음도 순전히 은총입니다. 분명히 하면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제1독서 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요, 이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한결같이 주님을,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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