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재집 속집 제1권-대학 질의〔大學質疑〕
〈서(序)〉
기품부제(氣稟不齊) - 음양(陰陽)이 오르고 내려서 원양(元陽)과 원음(元陰)의 차이가 있고, 오행(五行)이 유행하여서 또한 각각 맑고 흐림과 순수하고 박잡함의 섞임이 있다. 어지럽게 얽혀 있고 뒤섞여 그 실마리가 천만갈래이다. 사람과 사물이 품부 받을 즈음에 음양과 오행의 맑고 순수함을 얻으면 가장 지혜로운 자질을 갖추게 되고 음양과 오행의 잡박하고 흐림을 얻으면 가장 어리석은 자질을 갖추게 된다. -
적자(適子) - 삼대(三代) 시대에 적자(適子)를 태학(太學)에서 교육시켰다면 중자(衆子)는 달리 가르치는 곳이 있었을 것이다. -
중기지류(衆技之流) - 유(流)는 바로 유(類)이니, 물이 여러 갈래가 함께 흐르는 것과 같다. -
〈경1장(經一章)〉
‘밝은 덕을 밝힌다’의 주석의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에 대하여[明明德註復其初] - 애당초의 밝은 덕을 회복하는 것으로 기질과 물욕으로 구애되고 막히지 않은 때이니, 바로 밝은 덕의 시초를 말한다. -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 - 묻기를 “이 한 절은 8조목과 더불어 공부와 효과가 서로 발명됩니다. 지지(知止)와 유정(有定)은 격물치지의 일이고, 정(靜)과 안(安)은 성의정심의 공효이고, 여(慮)와 득(得)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효과가 아닙니까?” 하니, 말하기를 “아니다. 주자 문인 중에 역시 이렇게 본 사람이 있는데, 주자가 매우 심하게 그를 배척하였다. 지지(知止)ㆍ정(定)ㆍ정(靜)ㆍ안(安)ㆍ여(慮)는 격물치지의 효과이니, 이른바 ‘격물치지를 하면 그칠 곳을 안다.’라는 것이다. 이미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고 지선(至善)이 있는 곳을 참으로 안다면 뜻을 정해서 갈 바를 알게 된다.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지향하고 군주가 되어서는 어진 정치를 지향하는 따위이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 모두 그러하니 안으로는 마음이 안정되고 밖으로는 몸이 편안하여 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접할 때 정밀하고 자세하지 않음이 없다. 능득(能得)은 성의ㆍ정심ㆍ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효과이니 곧 이른바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의 차례를 얻었다.’라는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혹문》에서 정(定) 자를 풀이하여 ‘그칠 곳을 알면 가슴 속에 모든 사물이 모두 정해진 이치가 있게 된다.’ 하였고, 《장구》는 ‘그칠 곳을 알면 뜻이 정한 방향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해석이 서로 다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혹문》은 범범하게 사물이 각각 정해진 이치가 있음을 말한 것이고, 《장구》는 반드시 득(得) 자의 뜻을 말해야겠기에 ‘뜻이 정한 방향이 있다’라고 한 것이니 서로 발명하였다.”라고 하였다. -
소후자박(所厚者薄) - 간혹 오기(吳起)가 자기 아내를 죽이고 장군이 되기를 요구한 것에 비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박(薄) 자에는 붙일 수 없다. -
물격(物格) - 원집의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 보인다. -
〈전6장(傳六章)〉
기와 폐간[己肺肝] - 모두 소인을 가리킨다. -
증자왈(曾子曰) - 증자(曾子)가 일찍이 외워서 경계한 말이기 때문에 문인이 특별히 ‘증자왈(曾子曰)’ 세 자를 덧붙여 만세의 깨우침으로 삼았다. -
십목과 십수[十目十手] - 열 사람이 보고 열 사람이 가리킨다는 것은 보고 듣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
〈전7장(傳七章)〉
심부재언(心不在焉) - 어떤 사람은 “몸뚱이 안에 있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보고 듣는 것에 있다.”라고 한다. ○지금 이 두 설을 살펴보니 마땅히 통간(通看)해야 한다. 마음이 몸뚱이에 있어야 바야흐로 보고 들을 때에 있을 수 있다. 바로 안에 주재가 되어 밖에 응하는 것이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몸뚱이에 있지 않으면 보고 들을 때 있을 리가 없으니 마음이 이미 사물을 쫒아가서 주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도(明道) 선생이 “안을 옳다 하고 밖을 그르다 하기 보다는 안과 밖을 모두 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본의(本意)와 장구(章句)의 ‘마음이 있지 않다[心有不存]’는 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석하기를 ‘만약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다면[若不能存心]’이라고 한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마음이 만약 있지 않다면[心若不在]’라고 해야 옳다. 옛날에도 이러한 풀이가 있었으니 이는 다만 마음이 주재하지 못할 때를 가리켜 그 병통을 말한 것일 뿐이고, 애초에 사람이 마음을 잡아 보존하지 못하여 이러한 병통이 생기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구(章句)에서 단지 “마음이 보존되지 못하면 그 몸을 검속할 수 없다.”라고 곧바로 본문의 뜻을 해석하였고 이어서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이를 살펴서 경(敬)을 하여 마음을 곧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본문의 언외(言外)의 뜻을 미루어 사람들이 성찰과 조존의 공력을 더 들여서 마음이 주재를 잃어버리는 병통을 구할 수 있게 하였으니, 장구의 정밀하고 자세한 점이 이와 같다. ○또 《대학통고(大學通考)》를 살펴보니, 오계자(吳季子)가 말하기를 “황금을 움켜잡으면서 시장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은 마음이 시장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요, 고전 음악을 들으면 오직 졸려 자리에 누울까 염려스러운 것은 마음이 고전 음악에 있지 않기 때문이요,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치는 것은 마음이 수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몸을 닦고자 하는 자가 이 마음을 거두어 방촌(方寸) 사이에 두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증명하면 위에서 말한 “안에 주재가 되어 밖에 응한다[主於內應於外]”라는 설을 더욱 믿을 것이다. -
필찰호차(必察乎此) - 차(此) 자는 마음이 있지 않은 병통 부분을 가리킨다.
○살펴보건대, 주공천(朱公遷)이 말하기를 “백형(伯兄) 극리(克履)가 ‘《대학》의 경문(經文)에서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 것은 체(體)와 용(用)을 아울러 말하였고, 전문(傳文)에서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을 말한 것은 오로지 용(用)으로 말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밖에서 제재하는 것이 안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호병문(胡炳文))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在正其心]’라는 구절의 정(正) 자는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를 말한 것이니, 마음의 용(用)이 혹 바르지 못함이 있으면 바로잡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不得其正]’라는 구절의 정(正) 자는 마음의 체(體)가 본래 바르지 않음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잃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정암(羅整庵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에 또 “이 장에서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不得其正]라는 것은 단지 마음의 체(體)를 가리켜 말한 것 같은데 장구(章句)에서 ‘용의 행하는 바가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제2절의 일이니 마음의 체에 대하여 몇 마디 빠져 있는 듯하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心不在焉]’ 이하가 비로소 마음이 응용하는 잘못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씨(胡氏)와 나씨(羅氏)의 두 설이 주자천의 설과 다른 것이 이와 같다.
○또 살펴 보건대, 휘암 정씨(徽菴程氏 정약용(程若庸))가 말하기를 “《장구》는 ‘용의 행하는 바가 혹 그 바름을 잃는다.’라고 하였고, 《혹문》에서는 ‘이 마음의 용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여 체(體)가 바르지 못하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 오직 경문(經文)의 《혹문》에 ‘본연의 바름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고, ‘마음의 본체는 외물이 움직일 수 없어서 바르지 않음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혹자가 마침내 이 말을 잡아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바로 정(靜)할 때의 공부이니, 《중용》의 미발(未發)의 중(中)과 〈태극도〉의 주정(主靜)과 같다고 여기며, 경문에서 말한 정(定)ㆍ정(靜)ㆍ안(安)과 전문의 마음이 있지 않다[心不在焉]는 것이 바로 마음이 몸속에 있지 않은 때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칠 때에 대부분 동(動)하는 곳에 힘쓰도록 하여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ㆍ수신이 모두 사람들에게 동(動)하는 곳에서 힘쓰도록 한 것이요, 정(定)ㆍ정(靜)ㆍ안(安)도 또한 마음의 정(靜)함만 말한 것이 아님을 전혀 모른 것이다. 만일 정(靜)할 때의 공부라면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뿐이요,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현(聖賢)의 동(動)은 본래 정(靜)에 주를 둔다. 성(誠)의 통(通)인 원형(元亨)은 성(誠)의 복(復)인 이정(利貞)을 주장한다. 성의ㆍ정심ㆍ수신이라는 것은 바로 성이 통한 일이니, 이미 성의ㆍ정심을 하여 몸을 닦은 뒤에야 비로소 성이 회복[明] = 명(明)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다. = 될 수 있다. 만약 성의(誠意)한 뒤에 동(動)을 싫어하고 정을 구하여, 보는 것을 거두고 듣는 것을 어기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마음을 바루려고 한다.’ 한다면, 이는 바로 이단(異端)의 일이요, 우리 유가(儒家)의 일이 아니다. 하물며 ‘마음이 있지 않다’는 것은 또한 ‘마음이 보는 것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마음이 듣는 것에 있지 않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라는 것을 말한 것이니 어찌 정(靜)이 몸속에 있다고 하겠는가. 《혹문》에서 말한 ‘본연’과 ‘본체’도 이 마음의 의리를 가리켜 말했을 뿐이고, 맹자가 말한 ‘본심’도 역시 인의(仁義)의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찌 정(靜)에 대해서만 한 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이 발(發)하기 이전에 체(體)가 치우치지 않으니 참으로 바르다고 할 수 있고, 이미 발(發)한 뒤에 용(用)이 각각 온당한데 유독 바르다고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래서 《장구》에 용(用)을 가지고 부득기정(不得其正)의 정(正) 자를 설명하였으니, 주극리(朱克履)가 말한 ‘오로지 용으로 말했다[專以用言]’라는 것이 바로 그 뜻을 제대로 안 것이다. 휘암(徽庵)이 비판한 혹자의 설은 바로 운봉(雲峯)과 정암(整菴)의 뜻이다. 휘암이 혹자의 설이 틀렸음을 강력히 변론한 것은 온당하니, 운봉과 정암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휘암의 설도 병통이 없을 수 없는 듯하니 성(誠)의 형통과 회복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은 온당하지 않다. 또 혹자의 ‘사람의 마음이 몸속에 있지 않다’라는 설을 그르게 여겨서 반드시 ‘마음이 보고 듣는데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듯하다. 대개 마음이 몸속에 있지 않으면서 보고 들을 때에 있을 수 있는 이치는 없다. 오직 이 혹자의 뜻은 단지 ‘정(靜)이 몸속에 있다’고만 말하고 안에 주재가 되어 밖에 응하는 이치를 통하여 볼 줄 몰랐으니 과연 혹자의 말이 잘못이다. -
경이직지(敬以直之) - 경전에서 경(敬)을 말하지 않았으나 《장구》에서 그것을 드러냈으니 정심(正心)의 중요한 법을 제시한 것이고 후학을 깨우치는 뜻이 지극하다. -
경지체용(敬之體用) - 원집에 보인다. -
[주-D001] 오기(吳起)가 …… 것 :
오기는 전국 시대 위(魏)나라 출신의 병법가로, 오자(吳子)라 일컬어진다. 증자(曾子)에게 배우고 노(魯)나라 임금을 섬길 때,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자 노나라는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아내가 제나라 여자라는 것 때문에 의심을 하자 자기 아내를 죽여 충성심을 보여서 노나라 장군이 되었다. 《史記 卷65 吳起列傳》
[주-D002] 기와 폐간 :
《대학장구》 전6장에 “소인이 한가로이 거할 때에 불선한 짓을 하되 하지 못하는 짓이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 겸연쩍게 그 불선을 가리우고 선함을 드러내나니, 남들이 자기를 보기를 자신의 폐부를 보듯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小人閒居, 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3] 증자왈(曾子曰) :
《대학장구》 전6장에 “증자가 말씀하시기를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무섭구나!’라고 하였다.[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4] 심부재언(心不在焉) :
《대학장구》 전7장에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5] 대학통고(大學通考) :
명나라 때의 학자이자 문신인 고헌성(顧憲成, 1550~1612)의 저술이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창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림선생이라고 불렀다. 저서에 《소심재찰기(小心齋札記)》, 《경고장고(涇皋藏稿)》, 《고단문유서(顧端文遺書)》 등이 있다.
[주-D006] 오계자(吳季子) :
주자의 문인인 오영(吳英)을 가리킨 듯하다.
[주-D007] 황금을 …… 것 :
제(齊)나라 사람이 시장의 금방에서 황금을 움켜잡고 도망가다가 관리에게 붙잡혔는데, 그 관리가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어째서 그랬는지 묻자 “오직 황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列子 卷八 說符》
[주-D008] 고전 …… 것 :
전국 시대 위 문후(魏文侯)가 “나는 예복을 입고 고전 음악을 들으면 졸려서 자리에 누울까 염려스럽고, 정(鄭)나라와 위(魏)나라 음악을 들으면 재미가 있어 피곤한 줄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禮記 樂記》
[주-D009] 밥을 …… 것 :
삼국 시대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같이 밥을 먹었는데, 조조가 자신의 포부를 알아차리고 있는 사실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주-D010] 주공천(朱公遷) :
원(元)나라의 학자ㆍ문신으로, 경전백가(經傳百家)와 예악율력(禮樂律曆) 등 다방면에 정통하였고, 건주 학정(虔州學正)을 지냈다. 저서에 《사서통지(四書通旨)》와 《사서약설(四書約說)》이 있다.
[주-D011] 성(誠)의 …… 주장한다 :
성(誠)은 진실한 이치나 마음을 가리키며,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춘하추동 변치 않는 천도(天道)를 말한다. 통(通)은 양(陽)이 동하는 것이고, 복(復)은 음(陰)이 정하는 것으로, 이 내용은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보이는데, “원형은 성의 통이고 이정은 성의 복이다.[元亨, 誠之通. 利貞, 誠之復.]”라고 하였다.
[주-D012] 주극리(朱克履) :
원(元)의 학자 주공유(朱公儒)로, 주공천의 백형(伯兄)이다.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