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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마네무사와 세계의 만남, 견구사절단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중화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 용기 ... 멕시코·쿠바·스페인·로마…17세기 초 요동치는 세계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의 복원선. 배수량 500t, 길이 50m로 복원돼 ‘산 후안 뮤지엄’ 외부 도크에 전시돼 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드넓은 세계로 나아갔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견구사절단은 명목상 통상교섭과 선교사 파견 요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꿈을 싣고 떠나 먼 바다 건너에 희망의 씨를 뿌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흔적은 250년 뒤 이탈리아를 찾아간 이와쿠라 사절단의 눈에 띄어 곧 꽃을 피웠다. 견수사(遣隋使)·견당사(遣唐使)를 보내던 일본은 이로써 자신의 활동무대를 극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 조공과 책봉의 중화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문명권에 능동적으로 다가간 계기였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중화의 그늘을 벗어난 일본과 그늘에 안주한 조선은 운명이 갈린다.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돈키호테’라는 기사가 있다. 당시의 스페인은 그 [돈키호테]를 읽고 있었다. 사절단이 방문할 당시 스페인 국왕 펠레페 3세도 [슬픈 몰골의 기사] 애독자였는지 한 말씀을 남긴다. 어느 벤치의 젊은이가 깔깔 웃고 있는 걸 보고는 “저 친구는 미쳤거나, [돈키호테]를 읽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1권을 집필했으나 판권을 미리 팔아버려 10년 동안 궁색한 생활을 하다가 2권을 펴낸 때다. 10년 만인 1615년에 2권을 냈을 때이니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스페인을 왕복할 때 세르반테스는 마지막 퇴고를 하고 책을 출간 중이었던 셈이다. 하세쿠라는 펠레페 3세를 일본 오슈왕의 대사 자격으로 만난다.
스페인에서 로마로 눈을 돌려보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다가 교황청에 소환당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 콜럼버스가 찾아 헤매던 동양의 일본이란 나라의 칼 찬 사무라이들이 로마에 나타났다. 교황청이 권위를 찾아야 하는 시점에 맞춰 나타난 고마운 존재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국적인 사절에게 입시식(入市式)이라는 행사까지 성대하게 치러준다.
세계는 요동치고 있었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이슬람에 대한 실지 회복운동)로 1492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건설에 나서면서 부강해졌다. 1571년 세르반테스도 참전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제해권을 잡는다.
그러나 1588년 영국과의 칼레 해전에서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패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스페인이 17세기 초반 세계 최강국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세계의 ‘표준’을 만들던 대단한 국가였다. 그런 제국에 하세쿠라 일행이 간 것이다. 마드리드에 입성한 때는 1614년 12월, 당시 제국의 수도는 눈에 덮여 있었다. 일본은 그 이듬해 ‘세계의 서울’ 로마에 간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동북 오슈왕다테 마사무네와 그의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배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본 동북지방의 시골뜨기들은 바다 건너 이국땅 조선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고, 그로써 대외교섭 능력과 타 문명에 대응하는 책략을 깨우친다.
너울뿐인 태평양 너머가 무엇이 두려우랴
‘달 뜨는 포구’라는 뜻의 쓰키노우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의 출항지다.
그들은 규슈(九州)나 긴키(近畿) 지방의 서부 다이묘들에게는 한반도 남부 낙동강(김해 죽도)에서 왜성을 쌓으며 축성술을 배운다. 그들이 배운 최고의 가치는 해협을 건넜던 자신감이었다. 견구사절단의 부사(副使)로 하세쿠라가 발탁된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참혹한 전쟁의 땅 조선도 다녀왔는데 파도와 너울뿐인 태평양 저 너머가 무엇이 무서웠을까?
다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정화(鄭和)는 15세기 초반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7차례 원정을 떠난다. 주목적은 불안정한 초창기 정권의 강화 차원이다. 그가 타고 간 배의 실제 크기는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목조선의 길이가 역사상 가장 긴 150m라고 한다. 8000t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동원된 연인원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는 이에 비해 소박하다. 세 척의 배 중 제일 큰 배인 산타마리아호가 233t에 길이 30m 내외이고 동원된 인원은 120명이다. 그는 막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던 이사벨 여왕을 설득해 투자를 받는다. 정화의 함대에 비하면 초라하고 허름한 범선이다.
단순 비교이기는 하지만 15세기까지만 해도 동서양의 힘의 크기는 아직 동양 쪽에 기운다. 문제는 대항해시대 이후에 힘의 균형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일대의 사건이다. 1492년의 일이다.
1613년 일본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주군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아 길고 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의 배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는 배수량 기준 500t에 전장이 55m다. 단 한 척의 항해였지만 울림은 크다. 쓰네나가는 주군의 꿈을 안고 거친 바다로 나섰다. 폭풍우가 몰려와 배가 요동이라도 칠라치면 천주를 향해 기도를 해가며 신산고초의 항해 끝에 3개월 뒤 태평양을 건너고 신세계에 당도한다.
정화의 대함대는 그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명나라의 위상을 세우고 아프리카에서 진귀한 동물인 기린·코끼리·사자 따위를 싣고 돌아오면서 사람들의 눈요기에 기여는 했지만 그 뒤로 해금정책을 펴며 바다로부터 멀어진다. 그들의 목적은 권력의 과시와 안정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바다의 세계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한 모험가 콜럼버스는 신대륙에 닿는다. 바하마제도에 도착해 서인도로 착각하고 ‘지팡구’라 불리던 일본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네 차례 더 대서양을 건너온다. 그가 이룩한 세계사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황금을 찾기 위한 ‘폭력의 세계화’, 바야흐로 그 시발점이었다. 부지런히 세계를 돌아다닌 해양세력에게는 축복이 쏟아진다. 이질적인 인간들을 순진하게 접대한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한다. 세계는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하고 대륙 간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한다.
과시형 해상활동, 욕망의 신대륙 발견, 꿈을 찾아 드넓은 세상으로 떠난 항해…. 이 세 가지 도전을 보면서 조선은 어느 유형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마도 중화의 명나라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세쿠라가 활동하던 시기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조선통신사를 보낸다. 소중화의 과시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가 문명을 전해준 그들은 벌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음에도.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 선명(船名)의 유래는 세례자 성 요한과 관련이 있다. 1617년 3월 13일 멕시코의 에스파냐 총독으로부터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등장하는 이 선명은 나중에 배 건조에 참여한 스페인 사람 비스카이노 일행과 다테 마사무네가 에도에서 만나던 날(1611년 6월 24일)이 마침 세례자 성 요한의 명절이어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다테 마사무네는 스페인 비스카이노와 막부의 지도 협력을 얻어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를 건조했다. 조선에 필요한 재목은 모두 센다이 번 지역에서 벌목해 외판과 갑판에 사용했다. 히가시번사고(東藩史稿)에 의하면 목수 800명, 대장장이 600명, 잡역 3000명의 인력을 쓰고 약 45일 걸려 건조한다. 2년 전에 발생한 대형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번의 경제 활성화에 이 선박의 건조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90년에 펼쳐진 복원 운동에 따라 당시 항해 선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중앙의 마스트는 정산공치가기록(貞山公治家記)으로 따지면 32.43m다. 위 갑판 주변은 지름 90㎝이다. 전체 길이는 48.80m에 이른다. 재료는 미송(美松)을 쓰고 있다.
출항지 쓰키노우라(月浦)는 우리식으로 풀면 ‘달 뜨는 포구’다. 오시카(牡鹿) 반도의 중간 부근이다. 고이데지마(小出島)가 방파제로 작용해 태풍이 와도 그다지 파도가 일지 않는다. 수심이 충분하며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에 직접 이르는 장대한 구로시오(黑潮) 해로가 앞바다까지 다가온다. 태평양 항해의 출범지로서 최적의 모양새다.
1565년 마젤란에 이어 세계 일주에 성공한 스페인 신부 안드레스 데 위루다네타가 필리핀의 세부 섬부터 북동무역풍을 피해 북위 40도 근처까지 북상했다가 구로시오 해류를 타고 아카풀코에 다다랐다. 이로써 아카풀코와 일본 근처의 태평양 해역 사이 항로가 열렸다.
쓰키노우라에서 출범한 산 후안 바우티스타도 이 항로로 태평양을 왕복했다. 이시노마키시 와타노하(渡波)에서 가자코시고개(風越峠)의 터널을 쭉쭉 뻗은 삼나무 사이로 바다를 향하며 산길을 달린다. 언덕 곳곳에는 애기동백 꽃이 빨갛게 피어 있다. 언덕을 내려가서 모모노우라(桃浦) 어항을 지나 돌출한 끝에 쓰키노우라가 있다. 태평양을 향해 남동쪽으로 뻗은 오시카 반도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가면 견구사절단이 출항한 쓰키노우라 입구가 나온다.
안내판에 등장하는 문구가 심상치 않다. ‘남만(南蠻) 우물….’ 스페인 사람 비스카이노 일행이 이 우물을 마시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400년이 넘은 우물은 그저 흔적뿐이다. 인적마저 드물었다. 포구 바깥쪽 섬들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해 파도는 잔잔하다. 하지만 이 허름한 어항이 강력한 기운을 가진 역사의 산실임을 깨닫는다. 우물을 지나 해변이 끝나는 지점의 벼랑길을 오르면 ‘支倉六衛門常長解纜地碑’라는 비석이 서 있다.
‘달 뜨는 포구’에서 닻 올린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
도고 헤이하치로는 일본 합함대사령장관으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비문은 도고 헤이하치로(東平八)의 휘호다. 1922년에 건립했다. 메이지 일본 해군을 이끌고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를 격파한 그도 ‘희망을 찾아 바다로 나간 땅’으로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람(解纜)’이란 닻줄을 풀다는 뜻이다. 나는 오히려 온몸을 칭칭 휘감았던 강력한 사슬을 풀어낸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습과 인습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해양으로의 도전과 모험을 향해 스스로 탈각(脫殼)한 당시의 일본을 떠올렸다.
1613년 10월 28일 휘영청 보름달 빛을 받아 쓰키노우라에서 돛을 올린 지 3개월 뒤 산 후안 바우티스타는 태평양을 넘어 아카풀코에 도착한다. 상투를 틀고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아카풀코에 상륙했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의 휘호.
멕시코와의 교역만을 바라는 도쿠가와 막부와 다테 마사무네의 다른 목적, 엇갈리는 소테로와 비스카이노의 말. 당혹스런 멕시코 부왕(副王: 현지 총독 격)은 일본의 태평양 진출을 문제시해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귀국을 금한다. 그리고 일본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유혈 소동이 발생한다. 무사히 끝났지만 사절 일행은 검을 몰수당한다.
아카풀코 충돌사건의 보고를 받은 멕시코 부왕은 재빨리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처벌한다”는 포고를 내지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사절 일행은 검을 빼앗겼다. 대우 개선의 보증과 함께 하세쿠라 등 10명 정도의 상위 인물을 제외하고 귀향 때까지 무기를 맡겨야 했다.
일행은 이어 멕시코에서 쿠바의 아바나를 거쳐 스페인에 상륙한다. 세비아에 있는 알카자르 궁전은 사절단이 묵은 최고의 숙소였다. 유럽에서 이 사절단은 어디에서나 ‘일본 최초’를 기록했다. 스페인에서의 투우 관람, 기상 악화로 잠시 들른 프랑스에서 알몸으로 요에 누워 잔 일도 모두 ‘일본 최초’였다.
코를 푸는 데 수건을 사용하는 프랑스인들은 화지(和紙)로 코를 푸는 사절단의 종이를 얻으려고 소동도 일으킨다. 늘 젓가락을 지참하고 서양요리를 먹었다. 젓가락으로 먹은 서양요리의 맛은 어땠을까. 이색적이고 다양한 세상을 봤을 뿐 아니라 유럽에 동양의 매력을 발산하고 다녔던 셈이다.
사절 일행이 직접 교섭선인 스페인 국왕이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다가 세비아에서 환영을 받고 있던 때 일본에서는 막부가 그리스도 교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처벌을 단행했다. 신망이 높았던 그리스도교인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포함한 많은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148명을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고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없애는 사건이었다. 1614년 11월의 일이었다.
쓰키노우라를 출범한 지 2년이 지나 이들은 드디어 로마의 땅을 밟는다. 도착하자마자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직접 장도의 노고를 치하 받는다. 1615년 10월 29일 로마 입시식을 마치고 5일 후 바티칸 궁전에서 교황을 알현한다.
많은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세쿠라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며 일본어로 사명(使命)을 진술한 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書狀)을 건넨다. 고국에서 그리스도교 탄압의 소식은 당도하며 로마 교황청은 겉으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절단의 의도에 응하지 않는다.
투우 관람하고, 젓가락으로 서양요리 맛보고
남만우물, 쓰키노우라의 스페인 사람들이 인근 막사에서 생활하며 선박을 건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절은 고난의 귀로에 들어선다. 1616년 1월7일 로마를 떠난 사절 일행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도 박해 실태, 선교사 소테로의 신용 실추부터 마드리드에 들리지 않도록 하는 지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세비아로 내쫓긴다. 소테로와 하세쿠라는 국왕에의 탄원, 스페인 각 부처와의 절충에 분주하지만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의 속에 귀도에 오른다.
1616년 9월30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는 아카풀코로 향했다. 두 번째 태평양 횡단이다. 막부로부터 냉대를 받은 답례 대사 산타 가타리나와 사형을 면제받은 선교사 등을 승선시키는 한편 다테 마사무네의 교역선이라고 하는 복잡한 사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항해는 운 나쁘게 폭풍우를 몇 번이나 만나서 마스트가 부러지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와 5개월 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아카풀코에서 이들은 다시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로 마닐라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으로 마닐라에 2년을 더 머물던 일행은 스페인에 배를 양도하고 나가사키를 통해 센다이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22일이었다. 쓰키노우라 출항 후 실로 7년에 이르는 여행이었다.
다테 마사무네의 [견구사절기]. 이탈리아 역사학자가 시피오네 아마티의 이탈리아어판 저술이다
다테 마사무네에 귀국 보고를 한 하세쿠라의 그 뒤 행적은 사료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탄압을 개시한 마사무네로 인해 하세쿠라가 믿음을 버리라고 권고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진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세쿠라는 2년 후에 병으로 죽었지만 장남인 간사부로 쓰네요리가 동생과 하인 등이 그리스도교 혐의를 받으면서 참죄에 처해졌고 급기야 멸문(滅門)에 이른다.
선교사 소테로는 일본 전도의 열정을 누를 길 없어 1622년 일본에 잠입하지만 곧 체포돼 2년 후인 1624년 호우코바루(放虎原)에서 화형에 처해져 순교한다. 센다이에 있는 절의 하세쿠라의 묘 옆에는 소테로의 현창비(顯彰碑)가 서 있다. 12월의 어느 한 낮 누군가 갖다 놓았는지 싱싱한 국화가 놓여 있다. 드넓은 해양을 넘나들던 다른 국적의 두 사람은 죽어서 하나가 됐다.
멸문지화로 막 내린 ‘영웅’의 집안
센다이성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의 동상. 스페인식 갈레온선을 건조해 태평양을 횡단시킨 센다이번의 제1대 번주다.
약 250년 동안, 게이초견구사절의 존재는 잊혀졌다가 1873년(메이지 6년)에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의 사절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서장을 발견하면서 드디어 실체가 드러난다. 이어 센다이현 난학자들의 노력으로 견구사절단의 면모가 하나씩 밝혀진다. 묻혔던 진주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를 학습장으로 사용한 250년 후 자손들의 손으로 말이다.
센다이시박물관 소장 국보 게이초견구사절 관계 자료 가운데 ‘로마시공민증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상’, ‘로마교황바오로 5세상’ 세 점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게이초사절 관계 자료는 약 400년 전에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유럽에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일행이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것들로 합계 47점에 이른다.
그중 위의 세 점이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아 등재가 이뤄졌다. 이 박물관에는 당시 사절을 따라 통역으로 마드리드에서 로마까지 수행한 로마의 역사학자 시피오네 아마티가 쓴 이탈리아 판 [다테 마사무네 견구사절기]와 이를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책자가 있다. 본문 31장부터 마사무네와 선교사 소테로의 만남부터 사절 파견에 이르는 경위,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을 알현한 일의 전말이 적혀 있다.
이와쿠라(왼쪽 셋째) 사절단. 12개국 구미 시찰단은 메이지 4년부터 메이지 6년까지 일본 과도정부에서 유럽과 미국에 파견됐다.
저자가 동행한 후반부의 기술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지만 전반부의 일본에 대한 기술과 스페인 도착까지의 경과에 대하여서는 소테로로부터 들어 적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사절이 로마 체재 중에 나온 기록이어서 그들의 동향이 얼마나 세상에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다.
게이초견구사절은 지금의 센다이·오슈(奧州)부터 세계에 눈을 돌린 획기적인 외교 교섭이었지만, 그 후 그리스도교 금교령과 쇄국정책에 의해 해외에로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막혀 버렸다. 그러나 오슈의 땅에 싹튼 선진성, 진취적 기상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부터 다양한 형태로 싹튼다.
표류하다가 세계 일주를 이룬 쓰다유(津太夫), 견구사절단을 과학적인 눈으로 파악한 오쓰키 겐타쿠(大槻玄)와 개국을 부르짖은 오쓰키 반케이(大槻磐溪) 등의 난학자 그룹, 다른 번에 앞서 선구적으로 만든 양식 범선 가이세이마루(開城丸), 1960년의 견미사절단(見米使節團)을 수행하며 항미일록(航米日錄)을 저술한 타마무시 사다유(玉左太夫),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인정받아 뉴욕 부영사 등의 외교관을 맡은 도미타 데쓰노스케(富田鐵之助), 1893년 기아에 허덕이던 이누이트들을 구하고 알래스카의 성자로 칭송받은 프랭크 야스다(安田恭輔) 등이 견구사절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들이다. 아울러 세계로 통하는 다양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은 이 사절단을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의 심벌’로 받들고 있다.
희망이 없어도 도전했던 그들은 돈키호테
일본이 우리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기존의 가치에 함몰하지 않고 틀을 깨부수며 드넓은 세계를 향했기 때문이다. 통신사를 보내며 조선이 우쭐대고 있을 때 사무라이들은 해양을 항해했고 로마의 시내를 사무라이 복장으로 행진했다.
그들의 꿈은 실패했지만 우리에게 말한다. “희망이 없더라도 도전하라.”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이야기는 250년의 세월을 묻혀 있다 깨어나 150년 넘게 되살아났다.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꿔라.” 그들은 돈키호테였다.
일본 동북지방의 겨울은 4시 반이면 어둑해진다.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역 앞에서 35년째 스시를 만들어 파는 후키즈시(富喜壽司)의 오오바히데오(73·大場英雄)씨에게 쓰네나가를 물었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7년간의 오랜 생활을 견뎠지요. 영주의 명령을 받아 멀리도 다녀왔어요.” 그러자 사이타마 출신이라는 손님이 나선다. “막부도 아니고 센다이번이 파견한 게 정말 대단해요.”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구로시오 해류 속에서 자란 태평양산 뱅어 무침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TV는 일본에서 봄이 제일 먼저 오는 남국의 가고시마(鹿兒島)현 다네가시마(種子島) 우주센터를 비춘다. ‘쓰바메’라는 인공위성 발사 준비하고 있다. 이름도 ‘문명의 봄’을 가리키는지 제비라는 뜻이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동아시아에서 우주 굴기(屈起)를 한다. 견구사절단의 후예들은 조총의 전래지에서 우주와 소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