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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And Concept of Argentine Tango Music -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의 기원과 개요 - 08
Astor Piazzolla (아스토르 피아졸라, 1921 ~ 1992)
항구 도시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당시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감정이 고스란히 춤과 음악으로 분출돼 만들어진 아르헨티나발(發) 정의 문화 아이콘, 탱고. 이 단어를 듣고 혹자는 영화 ‘해피투게더’나 ‘여인의 향기’에서 배우들이 보여줬던 현란한 춤사위를, 어떤 사람은 낭만과 열정이 어린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 탕게로스를 떠올린다. 그렇다. 탱고는 ‘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다. 그러한 탱고를 춤에서 떼어내 ‘감상을 위한 음악’, 즉 누에보 탱고 Nuevo Tango로 집대성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이다. “나에게 있어 탱고는 발이 아닌 귀를 위한 음악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누에보 탱고는 춤이 아닌 음악 그 자체 울림을 위한 것이다.
"피아졸라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탱고의 거장이다." - New York Times
"그는 인기는 롤링 스톤즈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훨씬 오래 남을 것이다." - La Stampa
KATICA - ANIKÓ - FERENC - CSABA ILLÉNYI - Libertango
(카티카 - 아니코 - 프란시스 - 카사바 일레니 - 리베르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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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iazzolla - Libertango
Violin: Katica Illenyi . Cello: Aniko Illenyi . Violin: Ferenc Illenyi. Violin: Csaba Illenyi . Dohnányi Orchestra Budafok. Conductor: István Silló. Palace of Arts, B. Bartók National Concert Hall
아스토르 피아졸라 - 리베탕고 바이올린: 카티카 일레니
첼로: 아니코 일레니
바이올린: 페렌츠 일레니.
바이올린: Csaba Illeni. 도나니 오케스트라 부다폭.
차장: 이스반 실로. B. 바톡 국립 콘서트홀 예술의 전당.
피아졸라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친구들로부터 렝고(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선천적으로 오른쪽 다리가 뒤틀렸기 때문인데 그런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장애를 음악으로 극복하길 바랐던 아비의 심정이었을까. 10살의 어린 피아졸라에게 아버지는 반도네온을 사다준다. 이것은 피아졸라의 인생은 물론이고 훗날의 누에보 탱고를 탄생시킨 출발점이 되었다. 1929년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물려주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하였다. 1930년 그는 부모를 따라 유년기를 미국 뉴욕의 노동자 지역에서 보냈다. 이 당시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바흐, 슈만의 음악과 유행하던 재즈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길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주로 하던 탱고와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의 크로스오버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아졸라는 열세 살때 당대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고,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가르델은 그에게 '연주 실력은 훌룡하지만, 탱고를 양놈처럼 연주한다'는 평을 했는데, 그 당시 피아졸라가 재즈,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정확한 지적이었고, 나중에 피아졸라가 정통 탱고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수십년 후를 예언한 평이었다. 한편으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 실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El dia que me quieras)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자신의 연주 여행에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피아졸라의 아버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가르델과 그의 악단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피아졸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간다고 우겼거나 아버지가 허락했으면, 반도네온 대신 구름 위에서 하프를 뜯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고향으로 가족과 돌아오면서 피아졸라는 여러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르다로의 6중주단이었다. 이 당시 탱고는 빅 밴드 오케스트라가 주로 연주하였
기 때문에 이러한 실내악 탱고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피아졸라도 이후 이에 영향을 받아 실내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 17살 때,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해 당시 최고의 탱고 악단이었던 아니발 트로일로의 악단에 연주자로 들어간다. 피아졸라는 그 곳에서 월 240달러를 받으며 반도네온 연주 외에도 편곡, 피아노 연주 등을 맡으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본인은 '카바레는 매음굴이었다'고 회상하면서 그 시절에 대해 넌더리를 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숙소는 개판이었고, 여러 동료들 중 약 안 빨고, 여자랑 안 논 것도 그뿐이었다고 한다. 그가 익힌 음악들은 전통적인 탱고를 기반으
로 하되, 그 위에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시킨 음악. 그러나 당시 탱고 뮤지션들에게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난 마치 화성에서 온 외계인 같았다. 모든 탱고인들은 반도네온으로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는 날 미친 녀석이라고 했다"는 그의 회고는 당시 그의 외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행히 그는 이런 공격들을 가볍게 넘기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음악"이라고 지칭한 자신의 음악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편집증 환자라고 단정지은 비평가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늘어나던 젊은 지지자들은 피아졸라의 굳은 심지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상처받고 소심하게 주저앉았다면.. 탱고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리베르 탱고 Libertango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41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는 패기를 보였고, 루빈스타인은 이 부탁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고서는 '다 좋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음악이론이 부족했던 피아졸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쓰고는 협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럼에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사사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의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문학, 미술 등 교양을
쌓으면서 탱고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아내 데데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6년간 히나스테라에게 배우면서 첫 클래식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 피아졸라는 점점 기성 탱고 음악계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품 편곡을 놓고 팔리게 만들려는 트로일로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고, 피아졸라도 맘에 안드는 동료나 공연 와서 들으라는 음악은 안듣고 염장질이나 하던 손님들에게 폭죽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끝에 그는 1944년 트로일로의 악단을 떠나 1946년 자신만의 악단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르케스타 티피카'(이하 티피카)를 결성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립해나갔다.
Rastrelli Cello Quartett Piazzolla - Oblivion
(라스트렐리 첼로 4중주 피아졸라 -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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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26V_CeC2ak
티피카 악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알리며 그의 지지자를 모으던 피아졸라는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버르토크,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실내악 위주로 창작하였는데, 1945년에는 그의 작품 번호 1번 '현악 합주와 하프를 위한 모음곡'이 초연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인정한 첫 탱고곡 '엘 데스반데(El desbande)'도 내놓지만, 당시만 해도 피아졸라는 탱고보다는 클래식을 더 좋아하였다. 아니, '반도네온 들고 밖에 돌아다니기 쪽팔리다'고 했을 정도로 탱고를 반쯤 혐오하였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탱고 좆까, 나도 스트라빈스키 될거야!!'같은 심정으로 살
았다고. 한편으로 그의 악단 티피카도 열성 팬들을 모으긴 했지만 댄스 반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페론 부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처럼 권력을 휘두르면서 악단에도 페론 가카 찬양의 압박이 악단 안팎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페론주의자였던 피아졸라도 본인이 흑역사로 인정한 '아르헨티나 공화국'과 '페론 찬가'를 연주해야 했고, 후자는 본인이 직접 작곡해야 했다. 이후에도 계속 페론주의자들의 압박에 시달려온 피아졸라는 결국 본인의 탱고에 대한 무관심, 정치적인 압박, 인기 부족에 시달린 끝에 티피카 악단은 1949년 망해버렸다. 이후 피아졸라는 객원 멤버로 연주에 참
여하거나 영화음악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한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51년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곡(Sinfonía Buenos Aires)'으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정통 관현악 편성에 반도네온 두 대를 추가했기 때문에,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초연 무대에서 청중들이 '야! 클래식 연주하는데 반도네온 소리 좀 안나게 하라!'며 난동을 일으켰지만, 이 곡으로 파비안 세비츠키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클래식 작곡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어필할 수 있었다. 1953년에는 소편성 관현악을 위해 작곡한 신포니에타 Sinfonietta를 발표했는데, 이 곡의 악보를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에게 보낸 뒤 배우러 오라는 답장을 받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불랑제와 처음 대면한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작곡한 클래식 작품들의 악보를 보여주고 시연했는데, 그녀의 평은 '다 좋은데 말이야, 니 음악에 감정이 안 실린 것 같은데….'였다. 불랑제는 한편으로 피아졸라의 자작곡들에서 뭔가 특이점을 찾았는지, 피아졸라에게 클래식 외에 다른 음악도 한 적 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이 탱고를 했다고 밝히기 싫어서 계속 말을 돌리고 우물쭈물했지만, 결국 자신이 탱고 연주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자작 탱고 중 그나마 자신이 있던 승리(Triunfal)를
연주하자 그녀는 이게 진정한 피아졸라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클래식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탱고는 그냥 생계 수단으로만 여겼던 피아졸라로서는 이를 계기로 탱고 음악가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이후 파리 유학 시절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는데, 특히 불랑제에게 상당히 엄격하게 배운 대위법과 푸가 작곡은 이후 피아졸라의 여러 클래식 지향 작품에서 매우 자주 응용되었다. 파리 재즈 클럽들에서 재즈 연주를 들으며 그 영향도 받았고, 이후 자신 만의 실내악단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또한 연주 스타일도 고쳐 반도네온을 앉아서 연주하는 대신 의자를 밟고 서서 연주하였다.
본인이 말하길 앉아서 연주하면 늙어보이고, 서서 연주해야 관객과 눈을 맞추고 소통할 수 있다고. 이러한 사소한 변화마저 후대의 탱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파리 시절 생각했던 실내악단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빅 밴드를 앞세운 탱고와 달리 실내악을 중심으로 했을 뿐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넣어 기성 탱고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아니라 그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예술성을 주로 하고, 성악을 뺐으며, 재즈를 도입하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시도로 본국에서는 논란에 휩싸인다. 아르헨티나에서 비
난 세례를 받던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도 해체하고 반 강제로 뉴욕으로 건너가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편곡이나 댄스단 반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 와중에 1959년 아버지의 부고 소식까지 접하며 최악의 시기를 맛보게 되는데,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걸작을 하나 내놓았으니 그것이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 이다. 아버지는 피아졸라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1959년 10월,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 피아졸라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게 된다. 알려진 바로는 당시에 피아졸라는 고국으로 돌아갈 경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 비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타지에서 외로이 홀로 써내려간 곡이 바로 이 음악이다. 뉴욕에서도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채 피아졸라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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