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 탱고]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가? 435분은 [사탄 탱고]를 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영화를 보는동안 두 번의 인터미션이 있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영화는 밤 10시에 끝났다. 그리고 1955년생인 헝가리 출신의 벨라 타르 감독이 관객들 앞에 섰다. 그는 검은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키가 훤칠했고 수염을 길렀으며 어깨를 둥그렇게 구부렸다.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몸짓같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이 거친 세계로부터 상처 받고 죽거나 떠난다. 왜소한 개인과 거대한 세계가 만나면 언제나 패배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는 염세주의적 독백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야말로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하는 이 감독의 말을 신뢰한다면, 그의 영화는 상처받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위한 몸짓일 것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벨라 타르 감독의 회고전을 마련했다. 그의 장편영화 9편과 3편의 단편영화가 한 자리에 모였다. 145분의 런닝타임을 갖고 있는 [베크마이스터스 하모니즈](2000년)는 단 39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1컷당 평균 4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간다. 정신없이 빠르게 바뀌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속도에 익숙한 우리들이, 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고문받는 것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즐겁게 그 고문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벨라 타르가 보여주는 삶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우리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특별할 것 없는 삶이 펼쳐진다. 특별한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펼치는 그의 목소리의 나직한 톤이며 롱테이크로 연결되는 세계 재구성의 방법론이다.
[사탄 탱고]는 [누군가 알고 있다][거미의 기능] 등 총 12개의 소제목이 붙은 장면들로 되어 있다. 6 걸음 전진하고 6 걸음 후진하는 모던 탱고의 스텝을 영화 구성으로 차입한 것이다. 넓게 펼쳐진 헝가리의 대평원에 자리 잡은 농장이 [사탄탱고]의 배경이다. 그곳은 이 세계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거점의 변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되어 있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나가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식이 그곳을 세계의 변두리로 만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그곳은 곧 세계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사탄탱고]의 인물들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영화의 첫번째 컷은 멀리서 카메라가 농장을 바라보는 것이다. 농장에서는 소떼들이 이쪽 저쪽으로 이동한다. 검은 땅은 질컥질컥하게 젖어 있다. 카메라는 가끔 그 소떼들을 따라서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이동한다. 그뿐이다. 그 첫번째 샷은 11분이나 지속된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소떼들의 발굽 소리와 울음소리, 그리고 음울한 바람소리뿐이다. 마치 관객들을 자신의 영화문법에 적응시키려는듯한 [사탄탱고]의 첫번째 롱테이크는, 진흙처럼 뒤엉킨 우리의 더러운 삶이 이 세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흑백 필름이지만 음영의 선명한 대립보다는 낡고 오래된 느낌이 화면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평원 여기저기 듬섬듬성 떨어져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속이고 도둑질을 하며 이 답답한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마치 메시아가 다가오듯, 그 마을을 떠났던 이리미시아스라는 인물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린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어쩌면 희망의 빛을 줄지 모른다는 것, 이것은 전형적인 메시아의 출현에 다름아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실은 고도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기다림의 자세가 중요한 것과는 달리, 벨라 타르 감독은 이리미시아스의 존재를 인서트 샷을 통해 반복되는 이미지로 등장시킨다. 그는 텅 빈 마을길을 걸어 오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불면서 버려진 신문지나 빈 깡통같은 쓰레기들이 그가 걸어가는 쪽으로 소리를 내며 흩날린다. 메시아의 출현이라기보다는 어
떤 불길함의 전조처럼 보인다.
[사탄 탱고]는 7시간 15분에 이르는 영화 전체가, 마치 사악함으로 가득찬 사탄이 스텝을 밟으며 탱고를 추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화면은 더디게 진행되지만,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각 장면들은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역동성을 확보한다. 탱고가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의 전반부가 끝나갈 무렵이다. 돈을 땅에 묻고 물을 주면 돈나무가 열린다는 오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돈을 땅 속에 묻은 소녀는, 얼마후 그 돈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오빠는 소녀를 구박한다. 소녀는 먼지 쌓인 다락방에서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에게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쥐약을 넣은 우유를 먹여 고양이를 살해한다. 죽은 고양이를 한 손에 들고 마을로 나가보지만 그 누구도 소녀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 추적추적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린다. 마을 술집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어코디언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잊게 하는 것은 알코올과 춤 뿐이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흐느적거림이다. 오빠 등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그래서 그 누구에게서도 관심 받지 못한 소녀는, 결국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에게 쥐약을 먹인 것처럼 자신도 죽음으로 이르게 한다. 소녀의 죽음으로 끝나는 전반부가 소비극이라면, 그 이후 이리미시아스의 등장과 함께 전개되는 이야기는 대비극의 형태로 확산된다. 소녀의 개인적 죽음이 마을 전체의 비극적 몰락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전개되던 이야기의 파편들은 점차 서로서로 연결고리를 확보하면서 입체적 구조를 띄게 되고, 하나의 사건은 다른 시각으로 보여지면서 역동성을 확보한다. 서로 떨어져 있던 인물들 사이에는 상상력의 교량이 확보되면서 우주적 질서를 회복한다.
헝가리 출신 작가 라즐로 크라즈나호르카이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 탱고]는, 그 긴 시간동안 어떤 이야기 할 것인가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느린 영상,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길게 찍힌 롱테이크샷, 그리고 들리지 않게 들리면서 관객들의 심리적 압박을 시도하는 째깍째깍 반복되는 초침소리 등, [사탄탱고]의 시청각적 요소들은 이야기의 산문적 구성이 주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의 인물들은 느리고 느린 목소리로 방안에서 노트에 기록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마치 숨이 끊어질듯 이어가는 더딘 호흡으로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으며 자신이 본 것을 소리내어 말하고 그것을 노트에 적는다. 보이는 것과 활자로 기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영상으로 다시 찍는 것 사이에 어떤 간극이 존재하는가.
[사탄 탱고]는 시각적으로 물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은 비는, 우리들이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땅을 오염시키는 대표적인 물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대지의 흙과 뒤섞이면서 세계를 질컥질컥한 진흙탕 구덩이로 만든다. 그 속에서 벨라 타르의 인물들은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진흙은 기독교의 신이 인간을 만든 태초의 생명력 넘치는 물질이지만, 벨라 타르에게 그것은 세계의 더러움과 숙명적인 존재의 비극을 상징하는 물질이다. [노스탤지어]나 [안드레이 루볼료프]의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나오는 물이 더러움과 죄를 씻어내는 정화의 물이라면, 벨라 타르 감독의 물은 사악한 현실을 더욱 추악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사람들이 서 있는 땅을 오염시키는게 비라면, 알코올은 불타는 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더러운 세계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리고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힌 춤을 춘다. 벨라 타르에게 탱고는, 소외된 인간이 그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몸짓의 상징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시아스가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좀도둑이며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리미시아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메시아의 임무를 짊어지려고 한다. 그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도시로 나가지만 더러운 진흙과 소떼들의 목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삶이 달라질 것인가? 과연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에서 이전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벨라 타르 감독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탄 탱고]는 흑백 화면이지만, 사물들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비바람과 짙은 안개가 사물과 사물 사이, 인물과 사물 사이, 그리고 스크린과 관객 사이를 흐른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들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