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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리아나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이윤정
상추 그리고 노숙자들 / 수필. 이윤정 (시인)
바람이 몹시 부는날이였다 . 태풍정도는 아니였지만 보통날치고는 바람이 너무 불어 우리 매장에도 손님이 오지않고 썰렁했지만, 우리 매장에서 약간 우측으로 내가 가는 단골 미용실과 돈까스식당 바로앞노상에서 상추를 파는 아주머니도 마지막 떨이손님을 잡지못하고 쪼그리고 앉아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은 상추를 팔고 있었다.
나의 가게나 상추파는 아주머니나 손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매장안에서 바람을 맞지않고 손님이 없는 것이고, 상추파는 아주머니는 노상에서 쪼그리고 앉아 모진 바람을 맞고 동네 먼지는 다 뒤짚어 쓰고 있어 나는 그 앞을 지나다 말고, 서서 얼마나 상추가 남았는지 둘러 보았다.
해거름이라 그래도 거의 다 팔고 한 무더기에 천원하는 상추가 세 무더기 남겨놓고 몇 시간째 떨이를 못 하니 집엘 못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람이 많이 부네요." 나는 바람부는 날씨로 인삿말을 시작하였다 " 이거 세무더기(삼천원에치) 때문에 못 가고 있었어요. " " 아이구, 아줌마, 바람이 많이 부는데 이거 팔려다가 감기들면 약값이 더 들어가는 수도 있어요. "
오천원에 상추를 모두 다 싸 달라고 하니 "어이구 새댁이네는 (아들이 어려서 헌댁인 나를 새댁이라고...) 딸이 외국 유학나가고 아저씨는 지방에 계시고, 가족들이 모여 살지않아서 상추 먹을 사람이 많이 없을건데 이 많은 것을 다 어쩔려구요? " " 아, 동네 사람들하고 나누어 먹지요. 뭐가 걱정이겠어요. 야채 보다 더 싼게 없는데..."
그 작은 일로 나는 하루가 행복해져 콧노래를 불러가며 매장 문 닫을때까지 기분이 좋았고, 상추 아주머니는 바람을 맞지않고 일찍 집에 가게되어 기분이 엄청 좋아지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아주머니는 상추를 팔다가 한 봉지(2천원에치 정도)를 우리 가게에 몰래 가져다 놓고 가시기도하고 , 자꾸 그러시지 말라고 하니, 이제는 상추를 팔도록 가게앞을 배려 해 준 돈까스집에다가 내 몫까지 번번이 상추를 놓고 가셔서 날마다 식탁에는 상추가 올랐다.
상추 때문에 고기도 더 자주 먹고, 상추가지고 이웃에 나누어 주는 생색도 내고, 가게 앞 공원 노숙자들에게까지 상추가 갔다 .
물론 그 앞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준 돈까스 아주머니도 나와 같이 상추 선물을 매번 받았다.
상추 5천원에 한번 사고는 몇 만원에치 상추가 나에게 왔는지 모른다. 공으로 받은 상추가 더 많아지자 나는 다시 빚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아주머니의 야채선물은 식을 줄 모르고 줄기차게 이어져 결국 나는 우리 매장에서 파는 가방과 신발 옷을 한 보따리 드리는 것으로 겨우 그 아주머니의 상추에 응대 할 수 있었다.
그 상추아주머니뿐만 아니라 그 아주머니 바로 옆에서 노상에 포장을 치고 야채를 파는 부부도 팔다가 남는 야채는 다른 것과는 달라서 밤내 상하니 당일 다 소화를 해야한다면서 쫄쫄이고추며, 무, 배추, 오이, 애호박, 가지, 별별 것을 다 가져다 주셔서 야채는 시장에 가서 별로 사 오는 일이 없었다.
장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큰아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놓고 늦게 태어난 아들 얼굴만 안방에서 얼르고 있을 상황이 못 되었다. 마땅한 점포가 있는지 한 두 달간 차를 몰고 돌아다녀 점포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 모유를 먹이던 아들 젖을 급히 떼기위해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 와 먹고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려고 젖을 떼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그 때 무슨 용기로 첫돌이 갓 지난 늦둥이 아들을 등에 업고 험난하다는 장사를 할 마음을 가졌던지 실소가 나온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였으니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 나 자신 혼자 만 배불리 잘 먹고 잘 살자고 시작했던 일이라면 애 데리고 장사라는 것은 정말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장사가 되지않는 날은 안되어 걱정이고, 장사가 좀 된 날은 밤 늦도록 잠도 못 자고, 손님들이 입어보고, 후적거려 놓은 옷을 옷걸이에 걸고 마네킹에 옷 입히기, 매장 정리와 청소, 잠든 아이를 들쳐업은채로 운전해서 집으로 가면 집안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 정리를 하느라 밤이 언제 지나갔는지 잠 오는 눈을 비비다 보면 아침이 와 있기도 했다. 정작으로 도와 줄 수 있는 가족들은 멀리 가 있고, 어린 아들이 '내가 엄마를 도와 줄께, 나도 같이 장사할께 ' 하면서 옷을 같이들고 흔들어 놓아 도리어 일꺼리를 잔뜩 만들어 놓고 먼지를 먹고는 옷더미에서 잠이들었다.
새벽이 되어 해가 뜨기시작하고,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하는 주변 배달음식점 사람들과 "벌써 일어났느냐" 는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
상추파는 아주머니 옆에서 장사를 하면서 상추 한가지만 파는 아주머니가 부럽기도 했다 . 자식들에게 쫒겨나 자식도 없는 노숙자, 장가도 못 가서 자식이 없는 노숙자들, 은행가서 월말이면 세금 입금 할 걱정없고, 가게세 낼 걱정없고, 자식걱정없는 그들, 사람들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하는데, 일에 파 묻혀서 죽을 것 같은 내가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세상은 참 공평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몇 사람 역활을 해야만 하고, 수십가지 종류의 상품을 파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고, 상품 구입, 상품판매, 경리 송금,육아, 살림 모두 내가 해야 되는데 , 노숙자들은 술 마시는 일 하나만 1년내내 하고, 상추 파는 아주머니는 상추 한가지만 신경쓴다. 벌여놓은 일들이 오죽했으면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종업원을 두고도 해 보았지만 차차 한명씩 정리를 하고 나 혼자 하는것이 속편해서 좋았다.
잠시 힘든 세월 그렇게 흘러 갔지만, 참으로 많은 인생 경험과 공부를 했다
공원에서 노숙하는 노숙자들의 생태도 전에 알지 못하던 부분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노숙자들은 날마다 술에 취해서 돌아다니면서 싸움을 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눈과 얼굴이 물 먹은 솜처럼 퉁퉁부어 곧 죽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다가도 몇일이 지나면 다시 멀쩡 해지곤 하는데 그러다가 정말로 길에서 죽은 노숙자도 있었다.
주변 상인들의 말을 죽어도 안 듣는 노숙자들, 상인들을 괴롭히는 마치 양심도 없고, 앞뒤가 없고, 경우도 없고,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노숙자들이 내 말만은 아주 잘 들었다. 그들은 늙고 젊고를 떠나서 모두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무거운 것을 옮겨야 하거나 가게에서 못을 쳐야 하거나 , 여러 사람이 잠시 필요 할 때는 노숙자들이 모두 달려 와서 기쁜 마음으로 도와 주고갔다. 또한 내가 문을 닫고 집으로 가려고 불을 끄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 가게를 기웃거리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고 도둑이라고 싸우기도 했다.
지나가던 행인은 "당신이 뭔데 시비냐? " 고하면 " 우리 누님의 가게다 . 어쩔래? " 라고 하는 것이였다.
울 작은 둘째딸은 " 엄마 , 제발 저 사람들이 자기들 맘대로 엄마한테 누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해봐요. " 라고 부탁을 했다.
동네 상인들은 나를 노숙자의 대모이고, 우상이라고 놀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노숙자를 동네 공원에서 추방해야하는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노숙자를 사람취급도 하지않았고, 집집마다 노숙자하고 싸움이 붙어서 자주 시끄러웠는데 노숙자와 마찰이 없이 잘 지내는 나는 상인들의 눈에 가시였다.
노숙자들은 자기들끼리도 날마다 붙어서 칼이나 몽둥이나 날카로운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고래고래 싸우는데 사람들은 감히 무서워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하고, 경찰들도 주민들의 신고가 들어가면 현장에 와서 타이르고만 가거나, 칼을 휘두르며 피범벅이되게 싸워도 파출소로 태워갔다가 몇 시간만에 다시 풀어놓곤 했다
노숙자들은 거의 다 알콜중독자들이며, 날마다 술을 먹는 일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술에 취해사니 자기들끼리나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죽기살기로 싸우는데 아무도 그들을 말릴 수 없어 속수무책일 때에 내가 나가서 " 어이, 이게 무슨 일이래? " 하면 " 아이구, 죄송합니다. 또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누님 조용히 할께요. "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통에 길가던 사람들은 " 저 여자는 도대체 뭘까? "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노숙자들이 시끄럽게 난동을 부리면 사람들은 조용히 좀 시켜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내가 장사라는 것을 시작했다고 하자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웃음을 참지 못해했다 . 그도 그럴것이 일일이 이문과 계산을 따지고 살아보질 않았던 나하곤 너무 맞지않다는 것을 이미 주변에선 너무 잘 파악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는일에 나는 뭐든 내가 손해보고 살자는 주의였고, 손해 보는 것이 이득을 보는인생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사람 중의 하나였디.
손님에게 외상을 주지 말자는 각오를 했지만 그 철칙을 지키기란 블가능했다. 인상이 좋다싶으면 고액의 물건도 외상으로 척척 줘버리고 , 덤으로 주는 것이 너무 많았고, 장사꾼인지 봉사원인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렇게 어수룩하게 장사하는 바람에 한번 온 사람들은 자동단골이 되었다 .
내가 남는것이 없으면 단골이 온다는 것도 하나 알게 되었다. 그런 단골들로 인하여 고생은 되었지만 계속 장사를 해도 밥은 먹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애초에 몇 년간만 하겠다고 처음부터 정하고 시작한 일이였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단 하루도 시를 쓰지않는 날은 없었고, 간단한 일기도 기록했다. 예술을 향한 열정은 좀처럼 식지않았다. 더 해야 될 일도 많았고, 주변에서는 왜 그 고생을 하느냐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장사꾼으로 만족하고 장사꾼으로만 남을수는 없단 생각으로 가게를 접으려고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고 있던 중에 때마침 어린 아들이 가게 앞 차도로 뛰고 놀다가 지나가던 승용차 바퀴에 발이 끼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가게 앞에는 차도이며 차도를 건너면 공원이라서 아들은 매장에서 공원으로 뛰어다녀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를 여러번이더니 기어이 사고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
아들이 급히 달려나가 차에 발이 끼는 장면을 나는 목격하였고, 아이는 놀라서 입술이 새카맣게 까무라치다가 잠시후에서야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승용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부친 제사를 지내로 경상도로 내려가던 육군장교였다. 차에 친 우리 아들을 안고 가까운 정형외과로 달려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 병원에 들어서자 영문을 모르는 간호사는 차를 몬 사람과 차에 친 아이가 너무 얼굴이 많이 닮아 아이아빠인 줄 알았다.
엑스레이를 촬영했지만 아이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측에 의하면 아이의 겨울슬리퍼 앞부분이 길게 나와서 슬리퍼만 차에 물리고 발가락은 차에 닿질않았다고 한다.
신발이 차 바퀴에서 빠지지않았으니 아이가 발을 다친것으로 알고 너무 놀랐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의 발등으로 차 바퀴가 굴렀거나, 발끝이 조금이라도 물리면 뼈도 부서지고 바로 박살이 나는데 천만다행이라고 하였다. 운전자는 놀라게 해서 죄송하니 아이 과자를 사 주라며 병원비 외로 수표를 주는 것을 억지로 돌려보냈다. 나도 운전을 하는 사람이고 막무가내로 달려 나간 우리측의 잘못이 더 크므로 나는 돈은 필요없고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내 의사를 밝혔다.
병원에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와, 가게에 들어간 권리금을 조금이라도 받고 가게에서 빠져 나오려 그 동안 버티었던 나는 거금의 권리금 전액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부동산에 내놓았고, 곧 그런 조건의 임자를 만났다 .
사람이 여러가지 직업을 가져보아야 세상을 안다는 말을 나는 정말 경험했고, 믿는다 . 이런 저런 직업을 가진 사람의 힘든 것도 알고, 좋은 점도 알고,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심정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가게 운영 외에도 그 이전에 나는 나이에 비하여 여러가지 직업을 가져 보았다. 한우물을 파는 한가지 직업을 가졌다면 한 분야에서 성공할 확률이 많이 높아지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는 없다.
물론 간접경험이라는 것도 있긴 하지만 자기가 몸소 겪는 것 하고 일부를 아는 것 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본다 .
남들이 볼 때는 나는 무슨 사연으로 어린 아들을 업고 장사를 하는가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하였다. 돈이 있어 보이는 인상인데 더, 더, 더 돈을 벌려고 ? 아니면 너무 돈이 없어서 먹고 죽을 것도 없어서 ....?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들게는 보이지 않는 밝은 얼굴 표정을 보고 손님들은 왜 내가 아들을 싸 업고 장사를 하는지 의문에 쌓였다 .
가게를 그만 두는 바람에 그 이후 상추아주머니와의 끝없는 선물 공세도 끝이났다 .
가게에서 빠져 나오는 이삿날도 그 무법천지세계 싸움꾼들인 노숙자들은 내 심부름을 해 주고, 짐도 날라주고, 여러가지 도와주고는 못내 서운한 듯 우리 아들에게 몇 천원씩을 쥐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아들 간식을 주면 노숙자들이 같이 달라붙어서 먹고, 아들 앉아서 놀도록 돚자리 깔아 놓으면 노숙자들이 같이 앉아 놀거나 아예 돚자리를 노숙자들이 차지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었다 . 아들은 한 동안 술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노숙자가 되는 것으로 알았다.
힘들었지만 참 좋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다시 하라면 이젠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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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부모들의 모습 일텐데 쯔쯔쯔.....................감상 잘하고 갑니다.노래도 좋구요
노래가 몇 시간씩 들을 수 있는 여러곡이랍니다 . 뒤로 갈 수록 더 좋은 노래들이 있어요.
선생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으므로 공감하며 잘 감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때로는 돌발적으로 급변하기도 하고 우호적이던 사람이 느닫없이 적대감으로 무장하고 나서기도 해서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때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저도 동네 놀이터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잘 지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이 동네 노인분들을 괴롭히길레 말렸더니 언제 봤냐는 듯 욕설을하며 삿대질을 하던걸요. 끔찍한 동영상은 아니 본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좋은 날 되시오소서.
저 밑에 사진 안 본 것으로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동영상이 아니고 영상입니다 . 우호적인 사람도 돌발적으로 변하는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 언제 봤냐고 달라지면 참 황당한데 저도 그런 사람 많이 보았지요. 문단에도 상당 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세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