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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이사야서의 말씀 40,1-5.9-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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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 2서의 말씀 3,8-14>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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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8>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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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수도자라고 해서 다들 ‘에프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저 같이 적당, 적당히 사는 날나리 같은 수도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 수도자다운 형제들을 봅니다.
본업은 당연히 복음 선포요, 사목 활동입니다.
취미는 기도 생활입니다.
특기는 공부입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형제들의 영적 생활의 향상이나 수도회의 쇄신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역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잘 살까?’입니다.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고집하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 수도회가 쇄신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양한 눈요기 거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멀리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메뚜기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곤충입니다.
날개 떼어내고, 머리 떼어내고, 다리 떼어내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맛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식물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영양가가 없는 음식, 풀과도 같은 거친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들꿀 역시, 요즘 말하는 값비싼 석청이 아니라 당시 가장 소박하고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메뚜기와 들꿀이란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은 단순한 금육이나 검소한 식생활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지고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오시는 예수님께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평생 추구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의 세례 갱신 운동은 군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여긴 걸로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당시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즉시 이렇게 증언하며 크게 물러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당시 노예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 수십 번도 더 신발 끈을 묶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신발 끈 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니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두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 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 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 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평생 예수님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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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여러분은 지금 나이에서 20년만 젊어지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세요?
어떤 분은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분도 계실 테고,
또 어떤 분은 직업을 바꾸겠다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좀 더 여유롭게 살겠다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바램들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단 하루도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미래의 시간은 분명히 내게 현재라는 시간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결국 지금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갖는 것보다는
다가올 미래에는 후회하지 않을 준비를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볼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연주할 때마다
앞에 놓인 악보를 늘 미리 외워서 연주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한번은 연주회 직전에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은 오직 토스카니니뿐이었기에
할 수 없이 그가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지요.
바로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시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극복하기 위해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노력을 했고,
이러한 노력이 바로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하는 커다란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 나오지요.
오래 전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통해 예언된 사람으로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 나가 극기 생활을 하면서 성령으로 세례를 줄 구세주 메시아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로 회개해야 할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마 회개하지 않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나의 잘못을 지적받으면 각종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둘째,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나만 죄인이냐? 너도 그랬잖아. 아니 너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공격합니다.
셋째,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조금 있다가 성당에 나갈게. 그때 고해성사보고 뉘우치면 되지 뭐. 아직은 너무 일러.”라면서 죽기 전에 회개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참으로 많습니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는 모습으로는 결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즉, 제대로 된 준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이 역할을 이천년 전 세례자 요한이 하셨습니다.
이제 그 역할이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회개하면서 주님의 길을 닦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제2독서를 통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하는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말하는 것의 반대는 듣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레버위치)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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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스승이며 신랑이신 예수님!>
배우 옥소리씨는 남편 박철씨의 간통죄 고소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도 외국인 요리사, 연하의 오페라 가수 등 두 명의 남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옥소리씨도 남편 박철씨를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남편인) 박철은 억대 수익을 벌어도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룸살롱·술집·안마시술소에 다니면서 다 썼다. 여러 여자들과 함께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나와는 11년간 성관계가 10번에 그쳤다. (내가) 박철보다 죄질이 무겁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라면 죗값을 달게 받겠다.”
그리고 간통죄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도덕적인 사생활까지 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는 몇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간통죄가 헌법에 상응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람피우면 형법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박철씨가 더 잘못했다고도 하고
그래도 바람피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하여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지지만
어떤 부부들은 살면서 사랑이 더 성숙하기도합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결혼하는 순간이 완전한 사랑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고 서로 신의를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괜히 상대가 미워질 때도 있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두 부부가 함께 한 서약을 기억하며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감싸주려고 한다면
사랑이 더 성숙하는 것이고,
그 때 함께 한 약속을 저버리면
둘의 혼인은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그의 길을 닦기 위해 먼저 왔던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회개’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개란 본래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혼인한 사람의 경우라면 서로 함께 한 서약에 어긋나게 나가고 있다면
다시 방향을 바꾸어 그 서약한 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함께 했던 서약의 내용과 먼 곳으로 가려고 한다면
둘의 일치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라고 하면 왠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신랑은 요한인 것처럼 요한을 좀처럼 떠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예수님께 보내고 자신은 세상을 뜨려 합니다.
요한은 일부러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교회의 참 신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자 예수님께 이렇게 따집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혼인방의 아들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과 혼인하여 신방에 함께 있는 신부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참 신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 번은 감옥에 갇혀있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제자들은 요한을 찾아가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계시던 분이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바로 그분인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6-30)
요한은 끝까지 유일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로 모든 이들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끝까지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혼인한다고 해서 일부다처제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이 모든 신자들에게 똑같은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처럼
각 개인은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의 신랑을 위한 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시간은
당연히 성체를 영할 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신부이냐에 따라 그 일치의 정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의 성체를 영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을 배반하고 신랑을 돈과 맞바꾸었습니다.
이는 겉으로만 한 집에 산다고 해서 부부가 아니라
서로간의 신의를 잘 지킬 때에만,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그 분과 온전히 한 몸을 이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의 서약과 같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서약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동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피로 그녀를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그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이곳을 ‘동산’이라고 표현합니다.
죄로 인해 잃게 되었던 에덴동산에 다시 아담과 순결해진 하와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순결한 창녀로서 신약에서의 또 다른 교회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하며 그녀를 부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하셨는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뜻은 사랑한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써 온전히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참 신랑으로서 우리 앞에 우리의 각자 이름을 부르시며 서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뿌니!”, 즉 ‘스승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한 신부로 보지만
그 신부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언제까지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닮아가야 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라 하십니다.
따라서 순결한 신부가 되기 위해 매 순간 돌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이고 그분의 모범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결한 신부가 되지 않으면, 즉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모범대로 살지 않으면
가리옷 유다처럼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성경을 묵상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우리의 신랑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매 순간 그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 로마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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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길이 고르지 않다고 주님께서 못 오실까?
곧은길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올 마음이 없으실까?
그것이 물리적인 길이라면 고르지 않다고 주님께서 못 오시거나
길이 곧지 않다고 오실 마음이 없으실 리 없을 것입니다.
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오고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길이란 그야말로 소통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나
복음에서 얘기하는 주님을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그 무엇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그것이 죄라고 얘기하고 있고
따라서 길을 닦는다는 것, 그 무엇을 제거한다는 것은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우리의 첫 번째 죄는 무엇일까요?
오시겠다는 주님의 전갈조차 받지 않는 죄가 아닐까요?
오실 길 준비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아야 하는데
전갈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갈을 받지 못함은
주님께서 전갈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겠다는 신호와 전갈을 계속 보내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파를 계속 보내지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함과 같습니다.
아니 주파수를 맞추려 하는데도 맞추지 못함이 아니라
다른 전파에 나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오는 방송보다 세상 얘기를 전해주는 방송이 훨씬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다른 사람은 재미없다고 안 보는 평화 방송을 채널 고정하고 보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상당수는 가끔 보던지 아예 안 봅니다.
두 번째 죄는 수신기 불량입니다.
주파수는 주님의 방송에 맞추어놓았지만 수신기가 영 불량입니다.
수신기 성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안테나도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전파가 지지직대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듭니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아도 나의 안테나는 주파수를 맞춰놓은 그 전파만을 감지하고 수신해야 하는데
나의 안테나는 감지 능력이 떨어지고 다른 전파도 같이 수신하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표현을 한다면 영적인 감수성이 영 시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인 감수성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갈망을 간절하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의 말씀에 익숙하도록 감수성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강의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워싱턴에서 뉴욕을 기차로 오르내렸습니다.
어느날 필라델피아에서 사람을 태우고 다시 기차가 뉴욕을 향해 가는데
그때 저의 귀에 작게 얘기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습니다.
한국말이었습니다.
굶주렸다가 오래간만에 듣는 한국말이 그렇게 반갑고
익숙한 한국말을 듣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제가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한국 사람들이 저 뒤 멀리서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까이서 얘기하는 영어는 신경 쓰고 들으려고 해도 잘 들리지 않는데
저 멀리서 얘기하는 우리말은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감수성도 이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리울 정도로 갈망이 간절하면 작은 소리도 들립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듣고픈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낯선 것들이 아닙니다.
전에 나와 친했던 친구가 그립고,
나를 사랑한 어머니가 그리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말처럼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주님의 말씀도 늘 옆에 있는 익숙한 것이면서도 늘 그리워 갈망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옆에 있어도 늘 그리워하는 영적인 감수성,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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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주님 오실 날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광야에 본격적으로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하는 대림 2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주님의 길을 닦으셨습니까?
광야는 어디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이, 우리 마음이 광야입니다.
이 삶의 광야에, 마음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대림시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이 어찌 대림시기에만 국한 되겠습니까?
평생 인생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살아서만 수도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 예외 없이 주님의 길을 닦는 ‘평생 수도자(修道者)’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닦는 이 주님의 길을 통해서 오십니다.
수도원 정문에서 수도원 주차장까지 똑바로 난 넓고 긴 길이 상징하는 바,
바로 주님의 길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아 이 길을 따라 수도원에 오고 주님도 방문하십니다.
이 길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 삶의 광야에는, 마음의 광야에는 이런 길이 있습니까?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평생 작업입니다.
계속 가꾸고 돌보고 닦지 않으면
온갖 잡초 우거진 잡초 밭이 되어 마침내 길도 사라집니다.
주님의 길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바로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주님의 길을 잃어버려, 또 길 닦기를 포기해 절망에 방황입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주님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평생 여정의 우리 삶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대림 2주일,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자 오늘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길을 닦습니까?
이 시간 주님의 길을 닦는 구체적 삶의 방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옛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열리기 시작하는 주님의 길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구체적 후속조치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므로 주님의 길을 닦습니다.
몇몇 사람이 아닌 전 주민들의 회개는 바로 공동 회개의 축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개인 회개도 좋지만 공동 회개는 더욱 좋습니다.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를 통해 함께 회개하고 용서 받으니
주님의 길을 닦는 데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의 다음 시적 표현들 역시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뜻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빈부의 골짜기, 남북 간 골짜기, 영호남 간 골짜기, 지역 간 골짜기, 계급 간 골짜기 등
모든 골짜기들은 사랑의 나눔으로 메워지고,
교만의 산과 언덕들은 겸손으로 모두 낮아지며,
탐욕으로 거칠어진 마음은 온유의 평야가 되는
구체적 회개의 실행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골짜기들이
사라진 유토피아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동녘에 환히 떠오르는 빛나는 태양처럼,
회개의 실행으로 낮아진 이런 공동체의 지평선 위에
환히 밝아오는 주님의 영광이요 이를 바라보는 우리들입니다.
철저히 회개한 자만이 회개를 촉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모범입니다.
그의 단순 소박한 고행의 풍모가
그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줍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
회개의 가장 믿을 만한 표지이자 열매는 겸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그의 겸손이 감동적입니다.
“나보다 더 큰 이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위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통해
새삼 주님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회개의 겸손이 있을 때 비로소 참 자기를 발견함을 깨닫습니다.
중요한 건 한 번이나 몇 번의 회개가 아닌 평생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이래야 주님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길을 닦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끊임없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가는 도반들에게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삭막한 광야 시대,
많은 사람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충고와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 평화입니다.
두려움과 불안, 갖가지 마음의 상처로 약해진 이들 얼마나 많습니까?
이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위로와 평화를 얻고자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이사야 서두 말씀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해야 진정 이웃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빠진 값싼 동정이나 연민의, 순전히 인간적인 위로는 별로 도움이 못됩니다.
다음 고린토 후서 말씀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또한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가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공동 회개에 공동 용서의 은총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받아 영육이 치유되어
새롭게 살아나는 은총의 공동 전례 시간입니다.
이렇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받아
그대로 이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것,
아마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셋째, 끊임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은 평생 과정입니다.
무한한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긴 것 같으나 짧은 인생이요 짧은 것 같으나 긴 인생,
참고 깨어 기다리며 꾸준히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일화처럼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내의 대가이신 하느님의 인내를 본받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느님이자 기다림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부족함과 나약함에 좌절함이 없이
매일 새날을 주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참 재미있는 게 우리를 기다리는 주님이시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과 우리들,
보통 관계가 아닌 서로를 깊이 갈망하는 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언약에 따라,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주님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주님 성탄을 기다리는 희망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항구히 주님의 길을 닦게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삶의 광야, 마음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데 항구하도록 합시다.
구체적으로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요, 서로를 위로하는 삶이요,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면서 주님의 길을 닦도록 불림을 받았으니
거룩하고 신심 깊게 살면서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성탄의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 성베네딕도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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