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랭, 니콜라 푸케, 장 바티스트 콜베르, 레 추기경 폴 드 공니, 그랑 마드무아젤, 마르그리트 루이스 노를레앙, 콩데 가, 앙리 드 튀렌, 오이겐, 필립도를레앙, 라 발리에르 공작부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세비녜 후작부인, 라 파예트 백작부인, 스퀴데리 양, 라 로슈푸코 공작
쥘 마자랭. 본명은 줄리오 마자리니이다. 이탈리아의 페스치나에서 출생하여 로마의 예수회 학교를 졸업, 에스파냐의 마드리드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처음 군직에 있다가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1634년 로마 교황의 특별사절로서 파리에 머물던 중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에게 발탁되었고, 16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먼저 추기경에 임명되었으며, 1642년 리슐리외가 죽은 뒤에는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의 신뢰를 받았다. 이듬해 루이 13세의 사망으로 모후가 섭정이 되자 마자랭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리술리외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안 도트리슈가 그의 후계자인 마자랭을 재상으로 선택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애정 어린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안은 어떤 경우에라도 마자랭을 떼 놓지 않고 함께 다녔다. 리슐리외는 강하고 엄격했지만 마자랭은 화려하고 쾌활하며 부드러운, 외교관의 특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결코 그의 능력이 리슐리외에게 뒤진다는 것이 아니었으나 유연하고 부드러운 성품 때문에 사람들은 마자랭을 리슐리외만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도 프롱드의 난의 발단의 한 요인이 된다. 프롱드의 난 와중에는 마자리나드 라고 불리우는 마자랭에 대한 비방 팜플렛과 노래가 수도 없이 떠돌았다. 심지어 터키와 공모하여 유럽을 팔아먹으려고 한다거나 오스트리아로부터 2천 9백만 리브르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등의 소문까지 돌았다. 마자랭이 백성들의 생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프랑스를 위해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은 이유는 아마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비난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프롱드의 난 때문에 두 번이나 망명하긴 했지만 마자랭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재상으로써 훌륭하게 능력을 발휘하여 프랑스의 국위를 향상시켰다. 그의 외교적 능력은 프랑스에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1659년 피레네 조약이다. 30년 전쟁에 대한 개입은 리슐리외가 했지만 그 열매를 수확한 것은 마자랭이었다. 마자랭은 자신의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독일을 조각 내고 프랑스에 위협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피레네 조약에 따른 마리 테레즈의 결혼으로 이후 부르봉 왕가의 에스파냐 지배의 초석을 마련했다. (비록 그것이 많은 전쟁을 불러오긴 했지만)
외교적 승리 뿐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마자랭은 성공적으로 귀족들을 눌렀다. 프롱드의 난 이후 귀족들은 다시는 왕권에 도전하지 못했다. 마자랭은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카딸들을 대귀족들과 결혼시키는 방법으로도 그들을 복속시켰다. 올렝프 만치니는 수아송 백작과 결혼했고, 로라 만치니는 메르쾨르 공작부인이 되었다. 부이용 공작부인과 콩티 공비도 마자랭의 조카딸이다.
평생 재상을 두지 않고 친정을 했던 루이 14세이지만 마자랭 만은 대부의 예로서 존중했다. 어린 시절 그를 지켜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마자랭은 죽을 때까지 루이 14세에게 외교술과 정치 기술을 가르쳤고, 루이가 왕이 되기에 적당한 나이에 이르른 1661년 3월 숨을 거두었다.
16세기 초에 신분이 상승하기 시작한 앙주의 푸케 가문 출신으로 사법관인 아버지를 두었다. 3남 7녀 중 차남으로 성직계에 들어간 형 바이욘 주교 대신 장남의 역할을 했다. 니콜라를 제외한 모든 형제자매들은 모두 성직에 종사했다. 메스의 고등법원 참사관을 시작으로, 20세에는 파리 고등법원소속 청원 심리관이 되었다. 부유한 아내와의 결혼을 통해 많은 재산을 얻었으나 아내는 출산을 하다가 요절했다. 1650년 파리 고등법원의 검사장이 되었고, 1648년부터 마자랭과 친교를 나누며 그를 도왔다. 1653년 세르비앵과 함께 재무총감이 되어 왕국의 재정을 담당, 궁정의 경비를 자가자산으로 꾸리기도 하면서 왕실재정에 기생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세비녜 부인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평에 의하면 푸케는 매우 세련되고 지적이며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높은 지위와 주변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자랭이 죽고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보 르 비콩트 성에서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 보 성은 아름다움으로 화려함과 유명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그것을 구경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푸케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르 노르트, 르 브룅, 망사르 등의 건축가들을 발굴해 보 성을 짓게 했는데, 그러한 푸케의 탁월한 안목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건축을 위해 그들을 그대로 데려다 썼다는 점에서도 증명이 된다.
1661년, 국왕은 8월 17일에 방문하겠다고 푸케에게 전했다. 그러나 보 성은 아직 채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왕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시간은 한달 밖에 남지 않아 푸케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최선을 다해 국왕을 맞고 싶었다. 마자랭의 사후 재상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세기에, 콜베르, 르 텔리에 등과 같이 그도 재상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케는 보의 축제를 위해 재산의 3/4을 소비했다고 한다.
한달 만의 준비였지만 기적과도 같이 모든 것이 완벽했고, (심지어 몰리에르마저도 한달만에 <불쾌한 사람들>을 쓰고 공연준비까지 끝마쳤다.) 국왕이 도착하자 보 성의 화려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푸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극히 화려했으며 그 날의 축제는 연대기 작가들과 시인들에 의해 다투어 기록되었다. 수많은 분수와 불꽃들이 밤하늘을 장식하고 음악이 공기를 감쌌다. 푸케는 지극정성으로 왕을 모셨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마음은 차가워졌다. 이미 태양왕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있던 루이 14세는 일개 신하가 자신을 능가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의 거처였던 루브르는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에서 보 성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루이는 모후에게 "저 사람에게 자신이 먹은 것을 게워내게 할까요?" 라고 속삭였다.
이미 콜베르가 푸케를 몰아내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던 터였다. 콜베르는 국왕에게 푸케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몇 차례나 증언했다. 그리고 보 성의 축제는 그것을 생각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거기다가 국왕의 첫 애첩이었던 라발리에르까지 푸케가 자신에게 치근댄다고 이야기했다. 푸케의 실추는 시작되었다.
한달 후 푸케는 국고를 횡령한 혐의로 낭트에서 총사대장 달타냥에서 체포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끌려간 그는 3년 후 철가면이 살았던 피네롤 요새로 끌려갔고 거기서 1680년에 생을 마감했다. 철가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수많은 설 중에 푸케가 철가면이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푸케의 재판 과정은 매우 불합리했으며 합법적이지 못했다. 어떤 증거서류도 피고에게 제시되지 않았으며 소송진행 중에 재판장을 경질하여 푸케의 적대자로 법정을 구성하였다. 법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푸케의 변호는 훌륭함으로 찬탄 받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판은 푸케를 제거하고자 하는 콜베르와 국왕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축재를 하고 공금과 사금을 혼동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푸케를 고발한 콜베르 조차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뛰어난 재정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푸케는 절대왕정을 확립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지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친구들은 그를 구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다. 푸케로부터 계속 구애를 받았으나 물리치고 결국엔 친구가 된 세비녜 부인도 푸케의 변호에 대한 찬탄과 함께 근심의 마음을 퐁폰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푸케의 부인(두 번째 부인)은 그 후 남편의 재산을 되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을 하여 국왕의 감탄과 함께 일부 재산을 돌려받았다.
장 바티스트 콜베르 (1619.8.29 ∼ 1683.9.6)
랭스 출생으로 마자랭에게 발탁되어 장관이 된 인물 중의 하나이다. 프롱드의 난 동안 망명한 마자랭의 대리인으로 일했다. 루이 14세의 친정 이후 재무총감 푸케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올랐다. '나의 봉사자' 라 불리며 루이 14세의 신임을 얻은 콜베르는 살아있는 동안 거의 재상과 같은 역할을 했다. 콜베르는 리슐리외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으며 따라서 리슐리외-마자랭-콜베르로 이어지는 내각은 일관성을 유지하며 프랑스의 국위향상에 공헌할 수 있었다.
콜베르의 업적은 다방면에 펼쳐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이 중상주의 경제정책이다. 그는 통제경제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금 보유량을 늘리는 것이 국가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공업을 장려하고 관세를 올렸으며 국영공장과 전매제도를 창설했다. 또한 길드조직의 재편성을 단행하여 필요한 인원을 필요한 생산부문에 할당하였다.
네덜란드와 영국을 모범으로 보았던 콜베르는 따라서 동인도 회사 등의 교역회사를 설립하고 식민지 교역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상업보다 관직에 더 관심이 있었으며 사업을 추진하던 콜베르가 1683년 사망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후 해외교역에서 영국에 뒤쳐지게 되었다.
육군을 개혁한 르 텔리에, 루부아 부자와 달리 콜베르와 그의 아들 세뉼레는 해군을 개혁했다. 루이 14세는 바다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콜베르는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베르사유의 호수와 운하에 소형 함대를 만들어 띄웠다. 소형이라고는 하나 배의 기능을 모두 갖춘 것들이었다. 콜베르의 기대대로 그 함대를 보고 감명을 받은 루이 14세는 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콜베르는 자신의 해군 계획에 왕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배의 건조공사 덕에 마르세유 뿐만 아니라 브레스트, 로슈포르, 툴롱이 확고한 군항으로 자리잡았다. 콜베르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1677년 116척의 전함과 83척의 소함정을 거느리게 되었다. 갤리선의 노잡이로는 죄수들을 사용했다. 또한 해안의 주민들은 3년에 한번씩 국왕의 배에서 복무해야했다. 물룬 보수와 혜택이 뒤따랐다. 유능한 해군 장교를 키우기 위한 노력 또한 행해져 이후 많은 활약을 하게 될 투르빌과 뒤켄 등의 유능한 장군들이 배출되었다.
콜베르의 또 하나의 업적은 재정의 건전화였다. 콜베르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유세를 공평하게 할당하기 위해 노력했고, 신분에 상관없이 걷을 수 있는 간접세를 선호했다. 그는 국가 재정에 회계제를 확립하고 수입과 지출을 평가해 예산제를 만들려고 했다. 콜베르의 노력 덕에 세수가 크게 늘고 어려움에 빠져있던 국가재정이 건전화되었다.
재정에 대한 콜베르의 노력의 가장 큰 적은 국왕이었다. 베르사유의 건설은 사실 콜베르가 부추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케를 실각시키기 위해 보 성의 화려함을 이용했던 것이 콜베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국왕이 베르사유에 한없이 돈을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콜베르의 생각으로는 파리에 있는 루브르 궁도 완성되지 못했는데 한낱 시골 별장인 베르사유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일로 느껴졌다. 베르사유에 들어가는 비용은 너무나 커서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간 해에는 국고의 가장 큰 지출인 네덜란드와의 전쟁비용과도 맞먹었다고 한다. 결국 1680년대 들어서는 겨우 균형을 이룩한 재정이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콜베르는 여러 번 왕에게 부탁하고 애원하고 비난까지 했지만 베르사유에 대한 왕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심지어 1683년 8월에는 오히려 콜베르에게 베르사유 작업에 든 비용이 너무 비싸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적반하장 격의 어이가 없는 비난에 콜베르는 충격을 받았다. 왕은 거기다가 루부아라면 더 잘 처리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루이 14세는 전쟁을 그만두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라는 콜베르의 계속된 요구가 지겨웠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총애도 줄어들어 철혈적 군국주의자인 루부아에게 더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항상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일했고, 일중독자라고 할 만큼 성실했으며 그런 충실함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콜베르는 이러한 비난을 듣고는 충격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만일 그 자에게 한 일을 신을 위해서 했더라면 적어도 두 번은 구원받았을텐데, 이제는 내가 어찌될지 모르겠구나."
그가 투병 중에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회한과 함께 1683년 9월 6일 콜베르는 사망했다.
콜베르가 남긴 업적은 위대했지만 동시대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세비녜 부인은 '보기만 해도 서늘한 사람' 이라고 콜베르를 평가했고, 기 파탱은 '대리석 인간'이라고 칭했다. 귀족들이 볼 때는 엄격하고 일 중독자인 콜베르 보다는 세련된 푸케가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콜베르가 죽고 난 뒤 과격한 루부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프랑스가 얼마나 많이 전화에 휘말리고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개인적인 거부감이 콜베르를 평가하는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태양왕 시대의 절대왕정은 콜베르의 노력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레 공작 가문에서 태어난 폴 드 공디는 성직자의 길을 걸었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신앙심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1643년 파리의 보좌 대주교가 되었다. 보좌이긴 했으나 대주교가 연로한 그의 큰아버지였으므로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자랭을 극도로 싫어했던 공디는 프롱드의 난의 시작인 1648년부터 군중을 이끌고 난을 주도했다. 1차 프롱드의 난의 실패 이후에도 롱그빌 공작부인과 슈브뢰즈 공작부인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며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2차 프롱드의 난 도중 레 추기경으로 서임해 주겠다는 안 도트리슈의 제안에 승낙함으로써 궁정으로 돌아섰다. 1654년 파리의 주교가 되었지만 프롱드의 난의 주모자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다 석방되었다. 1662년 주교직에서 사임하는 대가로 생 드니 수도원의 성직록을 받고 코메르시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 때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탁월한 증언인 『회상록』을 집필했다.
그랑 마드무아젤, 외 백작부인, 동브의 거만한 왕족, 몽팡시에 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렸던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은 루이 13세의 동생인 가스통 도를레앙의 딸이며 토스카나 대공비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의 언니이다. 어머니인 마리 드 몽팡시에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족이 된 그녀는 자신의 높은 신분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왕비가 될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왕비가 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사촌인 루이 14세를 가장 좋은 결혼상대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혼처를 모두 거절했다. 당시 영국 왕자로서 청교도 혁명 때문에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와 늙은 포르투갈 왕이 그녀에게 거절당했다. 찰스 2세를 거절한 것은 그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포르투갈 왕은 너무 늙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자랭은 가스통 도를레앙의 딸인 그녀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때문에 그랑 마드무아젤은 마자랭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프롱드의 난 때 끝까지 마자랭에게 적대했으며 파리 성벽 아래에서 위기에 빠진 콩데 공을 구출하기 위해 바스티유의 대포를 돌려 국왕군을 향해 쏘아대게 한 것도 그녀였다. 이 때의 사건에 대해 마자랭은 "이 포격이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 라고 말하며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가 될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걸 암시했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에서의 활약은 몽팡시에 양에게 그랑 마드무아젤, 즉 '여장부' 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인 가스통 도를레앙은 사이가 좋고 마음이 잘 맞아 유쾌한 부녀지간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롱드의 난이 실패로 끝난 뒤 망명했다가 1657년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살롱에 드나들면서 문화·사교 생활에 몰두했다. 세비녜 부인과도 친하게 지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신분이 높다는 걸 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감에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랑 마드무아젤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1669년 당시 사교계에거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왕에게도 총애를 받던 로죙 백작에게 반하고 만 것이었다. 로죙 백작은 그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그랑 마드무아젤은 주저하지 않고 로죙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이 선언에 궁정은 뒤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과감히 맞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결혼을 승인했던 왕이 결혼 이틀 전에 자신의 결정을 번복했다. 그랑 마드무아젤은 절망에 빠지고 로죙은 이것에 격렬히 반발하여 대들다가 칼을 부러뜨려 국왕의 면전에 집어던졌다. 그는 당장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푸케가 있는 피네롤 요새로 보내졌다. 그랑 마드무아젤은 슬픔에 빠져있었으나 로죙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국왕과 몽테스팡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멘 공작에게 동브의 지배권을 양도함으로써 10년이나 지나서야 로죙의 석방허가를 받아냈고 1681년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러나 어렵게 이루어진 그들의 사랑이었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결국 1584년에 헤어지게 되었다. 그랑 마드무아젤은 이후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다 1693년 사망했다.
가문의 내력인지 그녀의 동생인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의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 또한 충분히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자랭은 그녀를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2세의 아들 코지모(코지모 3세)에게 시집가게 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당시 친척인 샤를 드 로렌과 열애 중이었다. 그녀는 사촌인 루이 14세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면서 그 결혼을 거두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루이는 이미 늦었다며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1661년 15살의 나이로 토스카나로 시집가게 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피렌체로 가기 전부터 계속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떠날 때도 엉엉 울면서 떠났으며 머무는 마을에서 아침마다 미적대며 출발을 늦췄고, 아픈 척 하기도 했다. 도착해서도 대공의 보석을 몰래 꺼내 자기 시녀들에게 나눠주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고, 샤를 드 로렌이 방문하자 노골적으로 애정표현을 하기도 했다. 자기 보다 신분이 낮은 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계속해서 대공을 무시하고 철저히 싫어했으며, 사실 성격이 밝고 활달한 그녀와 내성적인 코지모 3세는 성격상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대공을 비웃고 욕했다.
피렌체에서 온갖 말썽을 피우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던 그녀는 두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취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감히 프랑스 왕족의 딸보다 앞서려 한다면서 시어머니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와 다투었으며 극심한 사치를 일삼았다.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거듭된 탄원에 결국 루이 14세는 마르세유 주교를 파견해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떤지 알아보게 했다. 마르세유 주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코지모 3세와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1674년 드디어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코지모도 아내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별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좋았다.
토스카나를 그렇게 싫어했지만 그녀는 토스카나에서 많은 재산을 들고 갔다. 처음에 있기로 했던 몽마르트르 수도원에서는 얼마 있지 않아 나와 베르사유로 들어갔다. 그녀는 도박을 즐기고 짙은 화장에 가발을 썼으며 정부를 여럿 거느렸다. 또한 프랑스 궁정에서 코지모 3세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만들어내고 그를 적나라하게 조롱했다. 그러면서도 돈이 궁했으므로 대공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늘 써야했다.
새로 임명된 수녀원장이 감히 자신의 행동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한손에는 도끼를, 한손에는 총을 들고 그녀를 쫓아다녔다. 이 사건 이후로 그녀는 생 망데로 갔고 거기서 파계승을 정부로 삼았다. 생 망데에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바람나 도망간 수녀원장 대신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4년 후 언니 그랑 마드무아젤이 죽어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대공에게 돈을 보내라는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토스카나를 떠난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며 대공을 다시 안 본다는 것만으로도 아무 불만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는 76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6∼19세기 초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콩데라는 이름은 ‘콩데 쉬르 레스코’라는 옛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초대 콩데 공 루이 1세는 방돔 공작의 다섯째 아들이며 종교전쟁 초기에 위그노 교도의 군사지도자였다. 그의 손자 앙리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리슐리외, 마자랭 두 재상의 신임을 얻어 앙기엥에 영지를 획득, 앙기엥 공이라 이름하였다.
콩데 가의 이름을 떨친 것은 다음의 루이 2세로서 그는 19세에 이미 30년 전쟁에 종군하였고, 22세에 에스파냐군을 로크루아에서 무찔러 패주시킴으로써 대 콩데라고 불렀다. 그 후 티옹, 프라이부르크, 뇌르틀링겐, 랑스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튀렌과 더불어 당대의 가장 유능한 군사지도자로 꼽힌다.
동생인 롱그빌 공작부인 안 주느비에브와 콩티 공 아르망이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을 편들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리던 롱그빌 공작부인은 단호히 프롱드 진영을 택했고 당시 임신 중이었으나 포위된 파리의 국무회의 중앙 거실에서 파리 행정관들과 평민의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파리 시장이 즉석에서 대부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콩데 공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일어났다. 결국 1차 프롱드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아이러니하게도 국왕군을 이끌던 콩데 공 때문에 2차 프롱드의 난이 발생했다.
이것에는 롱그빌 공작부인과 슈브뢰즈 부인의 음모가 한 몫 했다고 위에서 서술한 바 있다. 1차 때는 갈라섰던 삼남매가 한 진영으로 뭉쳤다. 그러나 결국 모든 프롱드는 진압되고 콩데 공은 1651년 스페인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1659년 루이 14세에게로 돌아왔다. 루이 14세는 1667년 그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위임함으로써 예전의 자리를 되찾게 했다. 통풍에 걸린 그는 1672년 군에서 물러나 자기 소유의 샹티이 성을 꾸미는 데 힘을 쏟았다. 역시 망사르와 르 노르트가 일을 맡았다. 1686년 콩데 공이 죽고 난 후 추도사에서 보쉬에는 "욕심도 없고 가식도 없으며 허영도 없고 행동할 때나 쉴 때나 항상 명예로운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것에는 루이 14세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콩티 가는 콩데 가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으로 대 콩데의 동생이자 롱그빌 공작부인의 오빠인 아르망 드 부르봉이 시조이다. 아르망은 프롱드의 난에 가세한 귀족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보르도에서 반란정부를 이끌기도 했다. 프롱드 파였던 세비녜 부인도 결혼 후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난이 끝난 후 형처럼 떠나있다가 1653년 왕의 곁으로 돌아왔고 마자랭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는 루이 아르망과 프랑수아 루이, 두 아들이 태어났다.
앙리 드 튀렌 (1611.7.14 ∼ 1675.6.27)
부이용 공작 앙리의 차남으로 15세에 군인이 되어 리슐리외의 인정을 받았다. 30년 전쟁에 종군하여 1640∼1643년 에스파냐 군을 격파하였으며, 플랑드르와 라인강 대안의 여러 성을 공략하였다. 콩데 공과 함께 당대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었던 그는 부하들과 가까이 지내며 사전에 전투 준비를 꼼꼼히 하여 귀족들 뿐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사교계에 군림하였던 롱그빌 공작부인을 연모하여 프롱드의 난에서는 당초 프롱드파에 가담하였으나, 난이 실패하자 에스파냐로 도망쳤다가 1650년 체포되었던 콩데 공이 풀려나자 1651년 파리로 돌아왔다. 제 2차 프롱드의 난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콩데 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튀렌은 궁정군의 총사령관으로서 1658년 뒨 전투에서 콩데 공이 지휘하는 에스파냐 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튀렌은 루이 15세의 상비군의 교육을 전담하고 군대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1667년 플랑드르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에스파냐 군을 제압하였고, 1672년의 네덜란드 전쟁에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나, 전선을 시찰하던 중 대포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군사적으로 위대했을 뿐 아니라 지식과 신앙심에 있어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젠 드 사부아 카리냥, 즉 프린츠 오이겐은 사부아 카리냥 가의 수아송 백작과 추기경 마자랭의 질녀 올렝프 만치니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의 조상들은 사부아 공작들로 나중에 시칠리아 왕, 사르데냐 왕이 되고 종국에는 전 이탈리아의 왕이 된 데 비해 어머니 쪽은 이탈리아의 귀족뿐 아니라 모자 제조공, 시종, 미천한 직공들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수아송 백작 부인은 왕의 마음에 들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부인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태양왕 루이 14세가 오이겐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왕은 극구 이를 부인했다. 어쨌든 루이 14세는 자기 혈육이라는 이 불쾌한 소문을 수치스럽게 여겨 지나칠 정도로 그의 야망을 견제했다.
이 때문에 오이겐은 20년간 파리와 베르사유에서 불명예스러운 시절을 보낸 뒤 완전히 프랑스를 떠나, 투르크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던 레오폴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683년 그가 최초의 전투에서 투르크에 포위된 빈을 구하고 두각을 나타내자 이듬해 레오폴트 1세는 그에게 용기병 1개 연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이제는 어느 무엇도 이 젊은 천재가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를 승리로 이끈 것은 비단 그의 뛰어난 전략만이 아니라 그의 부대에 넘치는 활기였다. 그리하여 그는 누차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군 고위 지휘관으로 승진한 그는 29세의 나이에 야전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를 7번 치렀다. 젠토·페테르바로드·베오그라드에서 승리함으로써 투르크로부터 헝가리를 단번에 모두 지켰고 절친한 친구인 말버러 공작과 함께 블렌하임에서 바이에른과 전독일군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토리노에서 싸워 이겨 북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다. 또한 오우데나르데와 말플라크 싸움에서 네덜란드를 이겼다. 그는 단지 스페인만을 내주었는데, 이는 황제 카를 6세가 정치적으로 우매했기 때문이었다.
오이겐은 그처럼 험악한 시기에 가장 격렬한 교전을 치렀고 극도로 체력을 소모시키는 행군을 감행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내린 결정은 전사(戰史)의 기록 가운데 매우 과감하고 성공적인 것이었다. 24번의 전투에서 군사적 지휘력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것은 바로 그의 지혜였는데, 그는 군사적 승리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생각할 만큼 지혜로웠다. 그는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피정복민들의 보호자였으며 창조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평화를 꽃피워 나가도록 노력했다.
39년이라는 생애 동안 계속해서 황제군을 이끌고 사베 강에서 롬바르디아로, 티롤 지방을 거쳐 다시 바이에른과 라인 강 연안으로, 투르크에 대항해서 다시 한번 헝가리로, 그리고 다시 플랑드르로 진격했다. 그 덕분에 13번이나 부상을 당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수많은 적과 싸울 때도 '뿌리 깊은 오스트리아의 악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적과도 싸워야 했다. 그는 3명의 황제, 즉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를 섬겼는데 생애 마지막에 가서야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버지이고, 둘째는 형제, 셋째가 주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베오그라드점령(1718)은 그가거둔 가장 유명한 승리였다. 이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대담하고도 위험한 대형으로 군대를 포진시켰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도시의 포위공격을 중지하라고 꾀하면서 4배나 강한 군사력으로 오이겐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는 투르크 군대로부터 후퇴하라고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탄원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병사들은 질병으로 10명당 1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지에 머물렀고, 한밤중의 짙은 안개 속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낮에 안개가 걷히자 그는 투르크군을 전멸시켰다. 수많은 포로를 잡고 투르크의 야영지 모두를 장악한 그는 순식간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뛰어난 전과를 쌓은 그는 기진맥진하여 1736년에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군사적인 영예에다 과학적·예술적·문학적 관심을 들추어 그를 높이 평가하고자 했다. 비록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문학적 관심은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자기 서재에 있던 수만 권의 책(대부분 빈 국가문서고에 보관) 중 어느 것도 여러 번 사용했던 흔적이 없고 그가 책읽기를 소홀히 한 이래 200년 이상 전혀 펼쳐지지 않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과 회화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그의 궁전을 짓고 꾸미게 했지만 당시 대군주들이 했던 것 이상으로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황제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뛰어난(사실상 초인간적인) 재능을 제외하면, 우스꽝스러운 계략들을 즐긴다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필립스부르크 포위에서 라인 강의 흐름을 바꾸어서 프랑스 진영으로 통하게 하려는 생각을 하고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베오그라드에서 그는 도시 위쪽에 닻을 내렸던 오스트리아의 소함대를 여러 운하를 통해 이동시켜 갑자기 도시 아래쪽에 출현시켰다. 그는 또한 사병들의 유치한 장난에도 열중했는데 적들을 희생물로 만들어버리는 결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정치만큼이나 관심을 쏟았던 대상은 재정으로, 공공재산뿐 아니라(그는 제국의 재무대신이었음) 자신의 재정에도 관심이 많아 25길더를 가지고 오스트리아에 와서 약 2,500만 길더의 재산을 남길 정도였다.
필립 도를레앙은 루이 14세의 동생으로 여자 같은 성품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마자랭은 그러한 왕제의 성격이 제 2의 가스통 도를레앙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흡족해했다. 그는 영국의 찰스 1세와 앙리에트(영국 명 헨리에타) 왕비의 딸이자 찰스 2세의 동생인 영국 공주 앙리에트와 결혼했다. 앙리에트 왕비는 그의 고모이므로 사촌 간이라 할 수 있겠다. 시집 온 후 왕비 마리 테레즈를 누르고 궁정의 주도권을 쥐고 이끌었으며 루이 14세의 사랑을 받았던 앙리에트는 그러나 자신의 시녀였던 라 발리에르에게 왕의 사랑을 빼앗기고 만다. 또한 라 발리에르의 뒤를 이어 왕의 애첩이 될 몽테스팡도 그녀의 시녀였다. 하지만 몽테스팡은 앙리에트와 싸우고는 왕비의 시녀로 들어갔다. 앙리에트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대비해 영국과의 우호를 확인하기 위한 외교적 이유로 영국에 건너가서 오빠 찰스 2세를 만났다. 앙리에트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돌아왔으나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필립은 앙리에트의 사후 새로 부인을 맞아들였는데 새 신부는 팔라틴 공녀였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앙리에트와는 달리 팔라틴 공녀는 남자같이 투박하고 뚱뚱했다고 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내 몹집은 괴물처럼 뚱뚱하다. 정사각형처럼 네모지기까지 하다. 피부는 누릇누릇한 붉은색이고 머리카락은 온통 잿빛이 되었다. 코는 두 뺨과 마찬가지로 천연두 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입은 커다랗고 치아도 고르지 못하다. 이것이 내 아리따운 얼굴의 생김새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에 와 있던 영국의 버킹엄 공작은 팔리틴 공녀가 왕제비라고 불리는 걸 보고는 앙리에트를 떠올리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라틴 공녀는 왕에게 잘 보이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던 당시 귀족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성을 가지고 세태를 비판한 사람이었다.
여자같은 왕제와 남자같은 왕제비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자아냈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잘 맞았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결국 각방을 쓰긴 했지만) 맹트농 부인을 싫어하는 것도 똑같았다.
필립 도를레앙은 평생 보석과 장식, 남자애인들, 그리고 생 클루 성에만 신경을 썼다. 형과 유일하게 닮은 취미가 성을 꾸미는 것이어서 그의 생 클루 성은 항상 베르사유와 비교되었고(규모는 비교할 바가 못되었지만), 그것에 대해 루이 14세와 필립은 늘 서로 경계하며 질투했다.
1661년에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라 봄 르블랑 드 라 발리에르는 왕제비의 시녀로 들어갔다. 당시 왕은 왕제비와 연애 중이었는데. 루이즈가 왕이 그녀를 알지도 못했을 때부터 그를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녀에게로 마음이 쏠렸다. 루이즈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작은 천연두 자국이 있었고 눈썹은 숱이 많았으며 입은 너무 컸고 치아도 고르지 못한데다가 쉽게 감추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쪽 다리를 절었고 목도 없다고 할 만큼 짧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팔라틴 공녀는 "그녀의 시선에는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이 담겨있었다. 몸가짐은 소박했다. 다리를 약간 절기는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도 그녀에게는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생토록 변하지 않을 왕을 향한 그녀의 감동적인 사랑은 왕의 마음을 흔들었고, 곧 그의 첫 정부가 되었다. 루이는 1664년 그녀를 위해 베르사유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마법에 걸린 섬의 향연' 이라는 축제를 베풀었다. 또한 1667년에는 공작부인의 작위를 수여했다. 그녀는 항상 겸손하고 얌전했으며 왕의 정부가 된 것을 죄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했다. 세비녜 부인은 "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정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공작 부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작은 제비꽃" 이라고 라 발리에르를 표현했다. 그녀는 왕과의 사이에 5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살아남은 것은 베르망두아 백작과 블루아 양 둘 뿐이었다.
그러나 공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받은 바로 그 해에 왕은 몽테스팡 후작부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공공연하게 왕이 몽테스팡을 데리고 다니고 그녀를 위해서 연회를 베풀자 라 발리에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샤이오 수녀원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왕은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왕은 이미 공식 애첩인 라 발리에르를 추문을 가리기 위한 바람막이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밤 라 발리에르의 방을 가로질러 몽테스팡의 방으로 가곤 했다.
1674년 라 발리에르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르멜 회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4월 21일 착복식을 거치고 수녀원에 들어간 그녀는 30년 넘는 세월을 그 곳에서 보내고 생을 끝마쳤다. 아들인 베르망두아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슬피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울었어야 할 것을 지금 와서 죽었다고 울다니......"
그녀에 대한 동시대인의 평은 매우 좋았다. 그녀 자체도 선량했지만 아마도 사악하다고 낙인찍힌 몽테스팡 부인과 매우 대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과 우아함, 순박함을 칭찬했다. 팔라틴 공녀는 라 발리에르는 아주 깔끔했지만 몽테스팡은 추잡한 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비녜 부인은 라 발리에르가 있는 생 자크 가의 카르멜 회 수녀원으로 여러번 그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프랑수아즈 아테나이스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 라는 긴 이름을 가진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뤼삭 레 샤토의 성에서 샤랑트 공 모르트마르 공작의 딸로 태어났다. 1660년 왕제비의 시녀가 되었고 그 후 1663년 비고르 총독의 아들인 몽테스팡 후작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앙 드 공드랭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국왕은 결혼을 승낙해주지 않았었다. 루이 14세는 매우 높은 귀족인 모르트마르 공작과 맞서고 싶지는 않았으나 몽테스팡 가문이 프롱드의 난 때 프롱드 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탐탁치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국왕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러나 얼마 후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왕제비와 다투고는 왕비의 시녀로 들어갔다. 왕비 마리 테레즈는 활달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몽테스팡 후작 모두 낭비벽이 심했던 데다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빚더미에 올라앉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스팡 부인은 곧 국왕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1667년에 라 발리에르를 몰아내고 애첩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자리를 12년 동안이나 유지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마리 테레즈는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몽테스팡 후작 부인의 미모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싫어하던 팔라틴 공녀마저도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겸손하고 조용했던 라 발리에르와는 달리 몽테스팡은 화려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금발에 육감적인 몸매와 매력적인 입매, 고른 치아, 섬세하기로 유명한 손을 가진 그녀를 보고 외국 대사들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세비녜 부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의 극치였고, 그녀의 몸치장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같았으며 그녀의 활달함은 그녀의 몸치장과 같았다." 라고 썼다. 루이 14세도 그녀의 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몽테스팡 후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아내를 정말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내에 대해 질투하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고 특히 왕과 아내를 공유하는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하던 그 시대에 여기저기에서 왕을 욕하고 다니며 분통을 터뜨리는 몽테스팡 후작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심지어 그는 다윗왕의 구절을 인용하며 왕에게 직접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왕의 분노를 산 몽테스팡 후작은 결국 에스파냐로 피신해야만 했다.
12년 간 왕의 사랑을 받으며 멘 공작, 벡생 백작, 툴루즈 백작, 투르 양, 블루아 양 등 8명의 아이를 낳았고 베르사유 옆에 아름다운 클라니 성을 지어 소유하게 되었지만 몽테스팡 부인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루이는 바람기가 짙어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퐁탕주 양, 루르 백작부인, 외이에 부인, 안 드 로앙 샤보 수비즈 등 여러 여자들에게 한눈을 많이 팔았다. 불안해진 몽테스팡은 점쟁이를 찾았다. 당시 파리 시내에서 유명한 점쟁이는 라 부아쟁이라는 여자였다. 몽테스팡 부인은 그녀에게서 사랑의 묘약을 구입하고 아이들의 목을 베어 나온 따뜻한 피로 마법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1671년 라 부아쟁이 체포되었다. 그녀의 체포는 프랑스 상류 사회에 많은 충격을 가져왔다. 라 부아쟁은 많은 귀족 들에게 사랑의 묘약이나 독극물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서 독약을 사 남편을 독살한 여인도 많이 있었다. 라 부아쟁의 집에서는 2000구의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마법의 의식을 위해 희생된 아이들이었다. 체포된 라 부아쟁은 자신의 고객 이름을 댔고 그 중에는 푀키에르 후작, 뤽상부르 원수, 폴리냑 자작 부인, 루르 백작부인, 비비온 공작부인, 브렝빌리에 후작부인, 부이용 공작부인, 수아송 백작부인 등이 있었다. 끝의 두 여인은 마자랭의 질녀이기도 했다. 또한 라 부아쟁은 수아송 백작부인과 루르 백작부인, 폴리냑 자작부인이 라 발리에르가 사랑받고 있던 시절 그녀의 자리를 뺏기 위해 그녀를 독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그 말을 들은 국왕은 분노했다.
1680년 2월 29일 라 부아쟁은 마녀로서 화형 당했다. 그러나 그 것은 더 큰 사건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를 살릴 희망에 입을 다물고 있던 라 부아쟁의 딸이 모든 것을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몽테스팡 후작부인이었다. 라 부아쟁의 딸은 몽테스팡 부인이 마법의 약을 지어가서 국왕에게 먹였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알몸으로 배 위에 아이의 따뜻한 피를 받고 그 피로 성체 배령을 하는 마법의 의식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국왕과 왕세자의 우정, 왕비의 퇴출, 국왕의 은총의 획득 등을 기원했다고 증언했다.
국왕은 심한 충격을 받았고 그녀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몽테스팡을 내 쫓지 않고 왕궁의 테두리에서 살게 했다. 항상 궁정에 있으면서도 무시하는 것이 루이 14세의 복수였다. 그는 공식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사람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를 무시했다. 세비녜 부인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이 14세가 몽테스팡 부인을 가혹하게 대한다고 썼으며 뷔시 백작은 국왕이 몽테스팡 부인을 경멸하는 듯이 대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세월이 10년이 지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몽테스팡 부인은 파리의 생 조제프 수도원에 들어가 17년 후 66세의 나이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국왕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으며 몽테스팡 부인의 아이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그녀를 위해 지어진 클라니 성은 버려져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프랑수아즈 도비녜는 재산 한푼 없는 고아였다. 그녀는 1652년 앉은뱅이 시인인 폴 스카롱과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60년 미망인이 되었다. 몇 년 후 몽테스팡 부인과 친분을 쌓게 된 그녀는 몽테스팡의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임명되게 되었다. 국왕은 아이들의 성의껏 키워준 공을 인정하여 그녀를 맹트농 후작부인으로 서임해 주었다. 곧 왕은 그녀의 높은 학식과 냉철한 두뇌, 그리고 미덕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그녀가 왕의 마음에 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몽테스팡의 실추 이후 루이 14세는 종교적 미덕으로 가득 찬 맹트농 부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화려한 여인들에게 이제 진저리를 내게 되었으며 종교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어했던 것이다.
국왕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궁정은 당황했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하자마자 왕이 맹트농 부인과 비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생시몽은 그 일을 "역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라고 서술했다. 맹트농 부인 스스로도 "내 인생은 하나의 기적이다." 라고 말했다.
맹트농 부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우울해지면서 울곤 하는 왕을 늘상 달래주어야 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그녀가 해야할 일이었다. 또한 밤에는 아직도 정욕이 왕성한 왕의 상대를 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부아 공작의 딸이자 국왕의 손주 며느리가 된 어린 부르고뉴 공작부인 마리 아델라이드의 애교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1915년 루이 15세가 죽기 직전에 맹트농 부인은 생시르로 떠났다. 몽테스팡 부인보다도 더 인기가 없었을 그녀였기에 왕이 죽은 뒤에 변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리 드 라뷔탱 샹탈, 즉 세비녜 후작부인은 셀스 베닝 드 라뷔탱과 마리 드 쿨랑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라뷔탱 가문은 부르고뉴의 유서깊은 가문이었지만 쿨랑주 가문은 오베르뉴 지방의 부르주아 가문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된 그녀를 할머니인 유명한 잔 드 샹탈(비지타시옹 생트 마리 수녀원을 설립한 사람. 성녀로 시성되었다.)이 외가에 맡겼다. 쿨랑주 집안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 상당한 교육을 받은 그녀는 1644년 앙리 드 세비녜 후작과 결혼했다. 세비녜 부인은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공디 가와 레 추기경과 인척이 되었다. 또한 파리의 최상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콩데 저택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뷔시 백작인 사촌 오빠 로제 드 뷔시 라뷔탱, 샤티용 공작부인, 그랑 마드무아젤, 라 로슈푸코 공작 등 프롱드의 난의 주동자가 된 인사들과 친교를 나누었다.
1646년 딸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가 태어났고 1648년에는 아들 샤를이 태어났다. 남편 세비녜 후작은 미남이었지만 바람기와 낭비가 심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는 수많은 연애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중 유명한 미인이자 맹트농 부인과 오랫동안 같은 방을 쓰기도 했던 니농 드 랑클로와와의 연애는 세비녜 부인을 파멸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운 결말로, 앙리 드 세비녜 후작은 1651년 결국 여자 때문에 벌인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미망인이 된 그녀에게는 많은 구혼자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푸케였다. 그 외에도 콩티 공, 튀렌 자작, 로앙 샤보 공작, 바셰 후작 등이 그녀의 열렬한 예찬자들이었다. 그러나 세비녜 부인은 자녀들의 양육에 치중하겠다는 결심으로 재혼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살롱 문화가 발달하였고 많은 문인들이 그곳에 모여 지적 교류를 하고 작품을 발표했다. 세비녜 부인도 '푸른 방' 이라 불렸던 유명한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 같은 곳에 드나들면서 자신의 이탈리아 어 선생이었던 질 메나주, 그리고 샤플랭, 라 파예트 부인, 마들렌 드 스퀴데리 양 등을 만났다. 또한 코르네유, 부알로 데프레오, 보쉬에, 라신, 뱅스라드, 부르달루 등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작품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딸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는 아름답게 성장해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자주 국왕과 춤을 추며 특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여 왕을 냉담하게 대했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라 발리에르나 몽테스팡과 같은 결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23세에 그리냥 백작과 결혼해서 프로방스로 떠났다. 세비녜 부인은 딸과의 이별에 슬퍼했지만 덕분에 그녀의 가장 중요한 서간문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와 그리냥 백작(프랑수아 아데마르 드 몽테유) 사이에서 마리 블랑슈, 루이 프로방스, 폴린, 장 바티스트 등의 자녀가 탄생했다.
아들 샤를은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와 우아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스로 "너무나 매력적이라는 말은 나같은 사람한테 쓰는 말이야. 아버지!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미남으로 만들어놓으셨나요?" 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친절하고 유쾌한 성품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그는 젊은 시절 왕실 근위대 소위를 역임했다.
아버지처럼 여인들을 유혹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그는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니농 드 랑클로와와 사귀기도 했다. 1638년에 샤를은 관직을 팔고 브르타뉴에 있는 영지로 내려갔으며 거기서 1648년 모롱 양과 결혼했다.
세비녜 부인은 서간 문학에 있어 최고봉으로 꼽히며, 파리 사교계의 생활, 영지에서 체류한 일, 독서의 감상 등 약 l,700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읽으면 당시의 궁정과 사교계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한눈에 알 수 있으며 각 인물들에 대한 그녀의 평가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들은 그녀의 사후 『서간집』(1726)으로 출간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딸에게 보낸 것이지만, 레 추기경, 라 파예트 부인 등 친구에게 쓴 것도 있다. 스퀴데리 양은 세비녜 부인이 말하듯이 글을 쓴다며 칭찬했다. 한정된 독자와 살롱을 의식한 반 공개적인 성질을 가진 이 편지들은 섬세하고 인상적인 필치에 의하여 고전주의적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지성과 상상력이 넘치는 모성애의 기록인 동시에 17세기 후반기 사회의 충실한 거울이기도 하다. 훗날 특히 18세기의 서간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끊임없이 그녀의 편지들을 참고했으며, 그녀를 진정한 사상적 스승으로 흠모했다.
라 파예트 백작부인 (1634.3.18 ∼ 1693.5.25)
1634년 3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난 마리 마들렌 피오슈 드 라 베르뉴는 세비녜 부인과 마찬가지로 질 메나주를 스승으로 모셨다. 어려서부터 철학, 그리스 어 , 라틴 어, 이탈리아 어 등 고등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21세 때 라파예트 백작과 결혼하였다. 낮은 작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상류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문학살롱에서 그녀는 높은 교양과 재능을 인정받았고 많은 사교계 인사들과 문인들을 만났다. 『잠언집』의 저자인 라 로슈푸코와의 만남은 이러한 만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의 깊은 우정은 프랑스 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우정의 하나로 남았다. 세비녜 부인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라 파예트 부인은 왕제비 앙리에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궁정에서 벌어지는 음모들을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뛰어난 판단력, 그리고 솔직함은 그녀가 소설적 서술에서 혁신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라 파예트 부인은 역사와 고담소설을 좋아하였으며, 항상 진실을 존중하였다. 나중에 그녀의 비서가 된 문인 스그레는 ‘진실을 무엇보다도 좋아한 사람’이라고 라파예트를 평한 바 있다. 28세 때 발표한 실록소설 『몽팡시에 공작부인 La princesse de Montpensier』(1662), 에스파냐를 무대로 한 소설 『자이드 Zayde』(1670) 등이 있으나, 대표작은 익명으로 발표한 『클레브 공작부인』(1678)으로, 연애심리의 진실을 묘사하여 프랑스 심리소설의 전통을 창시한 불후의 걸작이다. 이 소설은 발표하자마자 큰 호평을 얻었으며 파리 사교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문학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세비녜 부인은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옹호했다. 이 후 몇 달 동안 세비녜 부인과 뷔시 백작이 나눈 편지에는 그 소설에 대해 주고 받은 의견과 그 소설에 의해 야기된 논쟁의 반향들로 가득차 있다.
50년 후에 볼테르는 "교양인들의 풍습과 자연스런 연애가 우아하게 묘사된 최초의 소설을 쓴 사람은 라 파예트 백작부인이다. 그녀 이전에는 그다지 사실성 없는 사건들이 과장된 문체로 쓰여졌다." 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그전까지 호평의 받았던 기사도 정신에 물들어 있는 소설(예컨대 스퀴데리 양의 작품과 같은)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소설에서 보여준 실감나는 정열의 묘사와 냉철한 심리분석의 대비는 바로 작가 자신의 인품의 투영이라고 일컬어진다. 라 로슈푸코가 그녀의 창작에 어떻게 협력했는가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이다. 사후에 간행된 작품으로는 『탕드 백작부인』(1724) 『1688∼1689년에 있어서의 프랑스 궁정의 기록』(1731) 『앙리에트 공비전』 등이 있다.
마들렌 드 스퀴데리는 르아브르 출생으로 극작가인 조르주 드 스퀴데리의 동생이다. 교육을 많이 받은 17세기의 위대한 문학가 중 한 사람으로 오빠를 따라 파리의 살롱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의 단골 손님으로 그 곳에서 폴 펠리송, 장 샤플랭, 발랑탱 콩라르, 질 메나주, 도비냐크, 퓌르티에르 등 유명한 지식인들을 많이 만났다. 퓌르티에르는 그녀에게 '마레 낭자'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중에 자기 집에도 살롱을 개설, 거기서의 회화·담론을 소설로 묘사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소설을 많이 썼는데, 라 파예트 부인의 소설과는 달리 사실성의 한계를 벗어날 듯 말 듯한 모험들, 이루지 못한 사랑, 복잡한 구조를 담았다. 그녀의 소설들은 인간 본성에대한 관찰과 생생한 인물 묘사 등으로 오노레 뒤르페의 『아스트레』에 의해 시작된 정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르타멘, 또는 키루스 대왕』(10권, 1649∼1653)은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빌려 콩데 공과 롱그빌 공작부인 들 랑부이예 저택에 출입하던 사교계 인물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켜 당시 사교계 명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어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마들렌 자신은 사포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클렐리, 로마 이야기』(10권, 1654∼1661), 『아르탁상드르』등도 실존인물을 모델로 쓴 소설인데, 이후로는 이런 모델 소설은 사라진다.
라 로슈푸코 공작 (1613.9.15 ∼ 1680.3.16)
마르시야크 공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는 명문 귀족의 아들로 전통에 따라 군복무를 마친 후 궁정에 돌아갔다. 순정다감한 성질의 소유자로 자주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들어, 루이 13세의 왕비가 계획한 반 리슐리외의 음모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 롱그빌 공작부인의 연인으로 프롱드의 난에서는 1650년 귀족들이 체포되고 난 후 반란군의 지휘를 맡고 싸우다가 파리 성벽의 전투에서 목에 중상을 입었다. 콩데 공에 대한 신의 때문에 1652년 프롱드 당원들에게 제안된 사면을 거부한 라 로슈푸코는 1년 동안 룩셈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한 후에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포기하고 독서와 지적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는 스퀴데리 양의 살롱이나 사블레 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면서 라 파예트 부인, 세비녜 부인과 친구가 되었다. 라 브뤼예르는 그에 대해 "사교계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 교육받고, 통찰력과 섬세함을 두루 갖춘 사람" 이라고 평했다.
1663년 『잠언집』의 초고를 친구들에게 읽혔을 때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격렬했다. 잠언집의 머리말은 “우리의 미덕이란 가장 자주 위장되는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장세니즘 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인간적 미덕에 대한 주장을 일소에 부치면서 인간이란 신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초판은 1678년의 제5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정정 ·추가 또는 삭제가 가해져 504개의 잠언이 실려지게 되었는데, 간결 ·명확한 문체로 인간 심리의 미묘한 심층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