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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신랑이 온다!
마태복음 25:1-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52주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력의 끝 주일의 이름은 ‘영원한 주일’이다. ‘그리스도 왕 주일’이라고도 불린다. 영원한 주일에는 우리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을 추모한다.
교회력을 가리켜 ‘하나님의 달력’이라고 부른다. 내가 맨 처음 그렇게 불렀다. <색동기도>의 특징은 ‘공동체가 고백하는 절기별 기도’이다. 교회력을 강조하였다. 책 뒤표지에 일곱 절기의 기도 특징을 한 구절씩 뽑았다.
하나님의 달력은 52주 동안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단순반복이 아니다. 원을 그리며 나선형으로 전진하고 있다. 교회력의 일곱 매듭은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창조절’로 이루어졌다.
나는 교회력 보급을 하나로 사명으로 여긴다. 기다림 초나, ‘날마다 십자가’ 52주 달력 보급은 색동교회 사명이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맞춘 하나님의 달력이다. 대림절 첫째주일을 기점으로 출발하고, 대림절을 기다리는 영원한 주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경건한 사이클이고, 거룩한 순환이다.
그리스도교는 시간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창조 후 물질세계가 아닌, 시간을 축복하셨다. 그것이 안식일이며, 한 주간 7일이며, 절기들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때’이며,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를 반복하면서 역사는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1)
교회력 마지막 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으라”이다. 본문은 천국비유이다. 예수님은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씀을 시작하신다.
오늘 245장 ‘저 좋은 낙원 이르니’를 불렀다. 천국찬송이다.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천국과 지옥은 현대인에게 가장 낡은 이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종말의 순간이 있다. 모르고 맞기에 언제나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날을 마음으로 미리 예비하려는 시간이 영원한 주일이다.
평생 쿨(cool)하게 살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역시 갑자기 죽어 베드로 앞으로 갔다. 베드로는 평생 쿨 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존중하여 천국과 지옥 중에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는 아주 쿨 한 태도로, 천국과 지옥 양쪽 모두 가 보고 선택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천국에 가 보았다. 모두 밝은 얼굴로 찬양하는데, 행복해 보였다. 다만 좀 지루해 보이더라. 이번에는 지옥에 가보자고 하였다. 기대 밖에 네온이 반짝 거리고, 멀리 카지노광고판도 있었다. 여자들이 손짓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마음이 설레었다. “역시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그래서 결단하기를, 지옥으로 가겠다고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천사가 그를 지옥으로 안내하는데, 그런데 아까 보던 지옥과는 느낌이 달랐다. 어두침침하고, 역겨운 냄새도 나고, 몸부터 거리낌이 들더라. 그가 물었다. “왜 아까 보던 지옥과 여기 지옥은 다릅니까?” 그때 천사가 말하길, “아까 본 지옥은 관광 비자로 가는 곳이고, 지금 가는 지옥은 영주권자가 가는 곳이라네.”
천국 비유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로 시작한다. 흔히 열 처녀 비유라고도 부른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
여기에서 열 처녀는 들러리일 것이다. 이런 들러리를 옛날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열두 하님’이라고 부른다. 혼인을 할 때 새 색시를 돕던 열두 명의 하님이 있었다고 한다. 몸 하님, 함 하님, 경대 하님, 폐백 하님, 시겟박 하님, 족두리하님 각 한 쌍씩이었다.
유대 풍속에 혼례는 저녁에 신랑이 신부집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등잔은 신부 들러리들이 갖춰야 할 필수품이었다. 그 등불을 밝혀 신랑을 맞이하고, 혼인을 진행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신랑의 도착이 계속 미루어져 자꾸 늦어지는 것이다.
뜻밖의 사정은 예고 없이 발생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콘티를 짜고, 예행연습까지 했지만 펑크는 엉뚱한 데서 난다. 사람이 준비한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은 없다. 세상에! 코로나19로 지금 결혼을 앞둔 모든 신랑신부들은 근심으로 가득하다.
신부의 들러리는 마을에서 나무랄 데 없는 처녀들이었다. 그러나 생리적으로 찾아오는 졸음은 어쩔 수가 없어, 열 명 모두 피곤한 나머지 맥이 풀려 잠이 들고 말았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들러리들의 무책임함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약함과 고달픔을 이해하는 따듯한 눈빛으로 다가서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의 실수, 무능함, 연약함을 다 용납하신다.
이윽고 한밤중에 높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황급한 목소리였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 잠든 열 명의 처녀는 반사적으로 동시에 깨어 일어났다.
‘저기 신랑이 온다!’는 긴박한 소식에 열 명의 처녀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다섯 명의 처녀는 곧 등잔의 불을 높이 올리고 신랑을 맞으러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처녀는 이미 불꽃이 사그러들고 있어 등불을 밝히고 나설 처지가 못 되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다오”라고 청하였지만,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냉담한 대답뿐이다. 피차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
결국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가게에 다녀온 사이 신랑은 도착하였다. 그리고 잔치집 문은 안으로 잠겼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 라는 다섯 처녀의 간절함은 잔치의 소란함에 파묻혀 외면당하고 만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
미련한 다섯 처녀란 남을 빗대어 예를 들었을 뿐 사실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다. 여러 가지 변명이 가능할 것이다. ‘인생이 피곤하고 여유 없이 살다보니 여분의 기름을 준비할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신랑이 늦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변명은 별 효과가 없다. 잠이 든 것은 양해 할 수 있다. 그러나 등잔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고 신신당부 하신다.
2)
주님은 이미 어두워져가는 우리의 역사를 향하여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곧 다가올 그 때에 “일어나라! 너의 등불을 밝혀라”고 말씀 하실 것이다. “저기 신랑이 온다!”는 외침을 쫒아 등불을 높이 들고 주님의 강림을 예비할 자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외침은 그리스도교신학의 핵심 주제의 하나인 종말론적 각성을 일깨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와 함께 ‘달란트의 비유’, ‘최후의 심판’ 등 종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의 종합판이다. 그래서 24-25장을 마태의 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기 오는 신랑’은 종말론적인 사건의 절정,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한다. 따라서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소명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종말은 마지막, 곧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 즉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
예전에 독일 베를린 근처에 있는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일이 있다. 이 수용소는 수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나치의 만행이 남아있는 생생한 역사현장이었다. 수 만평에 이르는 넓은 땅에는 각종 수용시설과 처형장, 화장설비 그리고 생체 해부를 위한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시설은 다름 아닌 인간성을 포기한 혐오시설들이었다. 그곳은 지난 세대 대표적인 절망의 상징이었다.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수용소 입구의 망루에 있는 둥근 시계였다. 아마도 그 시계의 위치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물렀을 곳이었다. 누구나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는데, 죽음의 종착역에 도착한 포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운명의 시각이었을 것이다. 망루의 그 시계는 실물시계가 아니라 다만 시계 그림이었다. 본래 그 자리에 있던 시계를 떼어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시계 그림만 그려져 있었는지는 모른다.
망루 양면에 그려진 시계는 11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로수용소에 잡혀온 사람들, 자유로운 삶을 빼앗긴 사람들, 유대인들, 집시들, 정신장애인들, 공산주의자들, 저항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 누구나 예외없이 고개를 들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몇 시 인가?”
그들은 비록 수용소의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사실 측정하고자 했던 것은 자기를 사로잡은 절망의 시간이었다. 운명의 시계처럼 정지된 절망의 공간에서 “우리의 희망은 과연 몇 시 인가?”라고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나는 수용소를 다녀온 이후 오랫동안 그 ‘11시 05분’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왜 11시 05분일까? 수첩 앞에 ‘11시 05분’이라고 써놓고 두고두고 생각하였다. 그 시각이 오전일까, 아니면 한밤중일까? 그리고 나는 내 나름의 결론을 찾아내었다. 11시 05분은 종말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바로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라는 외침이 있는 한 밤중, 바로 그 때와 일치하고 있었다.
그 때는 모두 졸음에 빠져 넋을 잃은 시간, 대부분의 인간이 피곤함에 지쳐 선잠에 든 시간을 의미하였다. 역사도 희망을 잃고 파멸로 빠져드는 시간, 성경에 따르면 그 시간은 ‘도둑이 담을 넘을 때’(마 24:43)요,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할 때’(마 24:48)며, ‘저기, 신랑이 올 때’(마 25:6) 였다.
한 밤중인 11시 05분, 바로 그 시각은 절망의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깨우는 구원의 외침이 있는 때가 아닐까?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등잔의 기름은 충분한가?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는 고백교회 지도자 마틴 니멜러 목사도 갇혀있었다. 그 역시 오랜 수용소 생활 속에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어떤 죄수가 니멜러 목사를 알아보고 사인을 보냈다. 감시 속에 진행된 짧은 산책시간이었다. 그 죄수는 니멜러 목사 곁을 지나치면서 손가락으로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다’라는 네 글자 라틴어 사인을 보낸 것이다.
마틴 니멜러 목사는 이 막막한 수용소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삶의 용기와 희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는 처형 직전, 연합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어, 전후 독일교회의 재건을 위해 일한 감독이 되었다.
3)
우리는 절망에 대해 말할 때 ‘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절망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또는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말도 쓴다. 그러나 ‘바닥을 쳤다’는 말은 희망적이다.
심지어 끄트머리와 마지막이란 절망의 언어조차 희망의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말 ‘끄트머리’는 끄트(끝)이며 동시에 머리(처음)란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우리말 ‘마지막’은 본래 ‘맏이맏’이 변형된 말로, 여기에서 ‘맏’은 맏아들, 맏배 하듯이 처음을 뜻한다. 그러니 끄트머리와 마지막은 끝이며 동시에 시작이며, 나중이며 동시에 처음인 셈이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가장 절망적인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앞이 캄캄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만일 내가 삼 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이란 유일한 소원이 있었다. 그는 사흘을 삼등분하여 자신을 삶을 바꿔준 인생의 스승 앤 설리반과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하였고, 아름다운 노을과 먼동이 트는 광경과 보석같은 밤하늘을, 메트로폴리탄과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도시의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싶었다.
그는 셋째 날 자정이 되면 영원한 밤이 다시 자기에게 올 것임을 잘 안다. 그러면서 “당연히 그 짧은 삼 일 동안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어둠이 내게 닥쳐올 때서야 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한 채 내버려두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볼 수 없는 헬렌 켈러는 볼 수 있는 우리를 향해 한 가지 요령을 가르쳐 준다. “내일 눈이 갑자기 멀게 될 것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라!” 그는 우리를 향해 “볼 수 있으면서 비전이 없다면? 참 끔찍한 일이다”라고 안타까워한다.
나는 헬렌 켈러의 충고야 말로 ‘끝을 시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천국비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하나님의 달력은 ‘교회력 끝주일’이요 동시에 ‘영원한 주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교회력은 끝도 시작도 없는 듯하다. 다만 하나님의 달력은 그 분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때, “그 날과 그 때”(13)가 있을 뿐이다.
내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지난 주에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황현산)을 읽었다. 황현산은 그가 날린 트위터에 “담배끊기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나는 18번을 끊었다”고 썼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렵구나 싶었다.
날마다 내게 주어지는 시간은 얼마나 쉬운가? 너무 쉬운 존재여서 늘 낭비를 한다. 장-밥티스테 마리 비안니는 평범한 사제였다. 생전에 그는 겸손과 지혜, 희생적인 봉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사실 이 세 가지 덕목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장-밥티스테 마리 비안니 신부가 모든 사제들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참회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법입니다.” 늘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결심이 새로운 삶을 낳는다.
오늘부터 다음 주일까지 하나님의 달력을 새로 거는 기간이다. 우리의 인생을 희망으로 설계하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달력은 거룩한 순환을 반복하면서, 진보한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중에서 처음으로,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아간다. 시간은 자주 막다른 벼랑에 선 인간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존재에 대해 일깨워 준다.
이제 교회력을 다시 시작한다. 새로운 시간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가?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새로운 달력에서 희망의 메신저로 부르신다. 희망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희망의 전달자, 사랑을 기대하기보다 이미 사랑의 배달부로 살아가기를 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달력과 언제나 동행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