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하장생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장생[황지지역] 아래에 있다고 하장생인데 나중에 하장성으로 변했다. 장생의 중심은 황지 지역이었고 황지를 장생이라 하였으나 황지는 상장생면의 소재지로 작은 촌락 지명인 황지가 더욱 알려지면서 장생이란 지명은 쓰지 않게 되었고, 대신 하장생으로 부르던 이곳이 그냥 장생(장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장생(長生)이 장성(長省)으로 변하게 되었는 데, '生'과 '省'은 다같이 '생'으로도 발음되는 글자로서 '장생'과 '장성'은 같은 뜻으로 장승(長丞)을 의미하는 말이다. 옛날 성역 태백산을 알리는 장승(長生, 長 , 長丞)을 태백산 아래 곳곳에 세웠기에 장생이라 한 것이다. 장성의 자연촌락을 보면 하장성, 계산, 뒷뜰의 3개 자연 촌락을 합쳐 장성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다. 1940년 황지에 있던 상장면사무소를 하장성으로 옮겨온 뒤 상장면 소재지로 상장면의 중심이 되었다가 1960년 장성읍으로 승격되면서 장성읍 소재지가 되었고 태백시로 개청되면서 장성동·화광동·계산동으로 행정구역이 갈라졌다. 그후 1996년 12월 10일 화광동과 계산동이 일제의 잔재 동명이라 하여 장성동을 장성1동으로, 화광동은 장성2동으로, 계산동은 장성3동으로 변경하였다.
ㆍ도리터 ― 장성규폐병원이 있는 공화동 터가 도리터이다. 옛날엔 황지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금천동 어귀의 다루바 우에 부딪쳐 진등쪽으로 빙돌아 흘렀다. 물이 돌아 흐르므로 도리터라고 하는데 지금의 물길은 일제때 진등 위에 장성광업 소건물을 짓고, 그 앞으로 도로를 내기 위해 직선화한 것이다.
ㆍ살대목 ― 협심동 맞은편 장성시장 아래쪽이다. 높이 10여m, 길이 수십m 정도 되는 길다란 바위가 산중턱에 있는 것이다. 그 모양이 살대[화살대]처럼 길고 곧게 생겨서 살대목이라 한다. 또는 살대는 설대로서 설대는 담뱃대라는 말도 되고 긴 바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살대목 아래로 굴을 뚫어 설무실골 어귀로 35번 국도가 통하게 되어 있다.
ㆍ새볕뜨리 ― 태백초등학교와 장성3동 아파트촌 일대를 새볕뜨리라 한다. 문곡동의 사배로 넘어 가는 사배재[새볕 재]아래에 있는 땅이라고 사배뜨리[四拜坪]라고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해 새볕뜨리 또는 새별뜨리라고 부르게 되었 다.
ㆍ소란평지 ― 새볕뜨리 윗쪽 장명사(長明寺)가 있는 넓고 편편한 곳이다. 소나무가 많이 있는 안쪽의 평지(平地)이 기에 소란 평지라 한다. 소란은 솔안[松內]에서 온 말로 소나무가 많은 안쪽의 평지라는 말이다.
ㆍ사배재 ― 소란평지 뒤쪽에서 문곡동 사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어느때 도승(道僧)이 동자승(童子僧)을 데리 고 태백산을 가다가 이 고개 위에서 장성(계산)쪽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엎드려 절을 네 번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이 왜그러느냐 고 물으니 "너도 어서 절을 하여라"하며 이 곳에 앞으로 흑면장군(黑面將軍)이 수만명 나올 산세라서 두 려워 절을 한다고 하였다. 과연 수백년 뒤에 장성광업소에 흑면장군[광부]이 수 만명 나와 석탄을 캐며 수 만명을 먹여 살리고 한국경제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니 그 도승의 예언이 맞았다고 하겠다. 광부들이 석탄을 캐니 얼굴과 온몸이 검고, 톱 도끼를 멘 모습이 어찌 흑면장군과 다르랴. 도승이 절을 네 번 한 고개라 해서 이 고개를 사배재 (四拜峙)라 한다. 사배재가 변해서 새별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
ㆍ그미[우금이 또는 우구미] ― 우금산 8부 능선에 만 여평에 달하는 땅이 푹 꺼져서 우묵하게 생겼는데 우구미라 한다. 흡사 닭의 둥우리같이 생긴 지형인데 이곳에 용흥사(龍興寺)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우물에 물이 말라버려 30여년 전 없어져 버렸다. 땅이 우묵하게 깊숙이 꺼져 있기에 우긋하다의 '우' 또는 '우구'와 '미[뫼]'가 합쳐 우그미 혹은 우구미라 부르게 되었다. 우금산(于今山)은 우구미의 한자 표기이다. 우구미에서 30여년전 신흥동에 살던 최 영희라는 어린 소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이야기가 전해 진다.
ㆍ범바우 ― 호암동 둥글바우 건너편 강가에 있는데 바위의 형상이 흡사 범과 같아서 범바우(虎岩)라 한다. 범바우는 모두 2개인데 하나는 뒤쪽 산중턱에 있다. 둘 다 그 모양이 포효하는 범과 닮았다. 전하는 말에 옛날 태백산을 지 키던 장수가 범 두 마리를 데리고 순행을 하였다. 장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두 마리의 범이 서로 싸움질을 하 였다. 어디 갔다 온 장수가 싸움을 말리다가 우금산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산신의 노여움으로 모두 돌이 되었 는데 장수는 물 가의 장수바우가 되었고 범 한 마리는 강가에, 또 한 마리는 산중턱에서 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ㆍ비와야폭포 ― 장성여자중학교 앞 하천 건너 양지마을 끝에 높이 약 40m의 석회암 절벽이 있다. 평소에는 그냥 깍아지른 절벽이지만 비만 오면 그 절벽은 멋진 폭포로 변한다. 장마때는 흰 비단폭을 늘어놓은 것 같은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비가 와야 폭포가 되므로 비와야폭포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약 40여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해학적 인 분위기가 풍기는 이름이다. 그 전에는 그냥 보쿠라고 불렀다. 보쿠는 폭포의 이 지방의 방언이다. 겨울이 되면 40여m의 거대한 빙폭이 형성되어 3∼4개월 유지되는데 가히 일품으로 인근에서는 비할 곳이 없다.
ㆍ설무실골 ― 장성터널 옆에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깎아지른 암벽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많은 곳이 다. 옛날부터 암벽과 바위 밑에 기도처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며 맑은 물과 시원한 샘이 많은 곳이다. 설무실의 설은 바위를 의미하는 뜻과 설무 자체가 살무→살만→샤만[무당]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바위가 많은 골짜기 안 에서 무속 행위가 많이 행하여 졌기에 설무실이라 불렀다. 실은 골짜기라는 뜻인데 설무실골하면 중복되게 부르는 말인 것이다. 공기가 좋고 맑은 샘물이 많아 장성 일원의 사람들에게 좋은 산책로를 제공하는 곳이다.
ㆍ박달배리 ― 하장성에서 메밀뜨리로 가는 사이에 깍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리로 35번 국도가 나 있다. 옛날에는 깍 아지른 벼랑으로서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벼랑 곳곳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박달배리라 한다. 배리는 벼루에서 온 말로 강가의 벼랑을 이르는 말이다. 또는 박달배리가 있는 산이 박월산(朴月山) 곧 박달산이므로 박달 산 아래에 있는 배리[벼랑]라 해서 '박달배리'라고도 한다.
ㆍ들돌버덩 ― 태백중학교 아랫쪽 성도레미콘이 있는 곳이다. 옛날 그 곳에는 넓은 밭이 있었고 밭가에는 '들돌'이란 돌이 있었다. 그 돌은 강물에 닳아서 빤질빤질하며 둥글어 타원형으로 생긴 것이었다. 장성에서 동점으로 가는 나그 네들이 마감나드리를 건너와서는 그곳에서 잠시 쉬게 되는데 그때 모여 선 사람들이 이 바위를 들어 보며 힘 자랑 을 하였다고 한다. 누가 많이 높이 들 수 있는지 내기도 하며 힘 자랑을 하고는 한번 으시대 보고 두물 나들이를 건너 동점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돌을 들돌[들어올리는 돌]이라 하였고 들돌이 있는 버덩[벌판]이라고 들돌버덩이라 하였다. 그 돌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였는데 무게는 약 100㎏ 정도 되었다고 하며 20여년 전만해도 밭 가에 있었다고 한다.
ㆍ메밀뜨리 ― 하장성과 동점 사이에 있는 제법 넓은 들이다. 수 만 평의 논과 밭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낙동강 수계 에서 가장 상류쪽에 논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옛날 이곳에서 메밀을 많이 심었으므로 메밀들[메밀뜨리]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무사히 난을 면했다하여 면한 들[免坪] 혹은 면뜰이 라 하였는데 그 말이 부르기에 좋지 않다 하여 메밀을 많이 심어 먹는 고로 메밀뜨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뜨리 는 들이란 말이다. 20년전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데 불에 탄 무쇠솥이 나왔다. 솥뚜껑을 열어보니 메밀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솥은 수백년이나 땅 속에 묻혀 있어서 녹이 많이 쓸었고 메밀씨는 탄화된 상태로 2말 정도되는 분량 이었다. 추측컨대 옛사람들은 씨앗을 남겨두는 풍습이 있었다. 본인은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 다. 그러면 뒤에 다른 사람이라도 그 씨앗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밀뜨리의 땅 속에서 나온 메밀씨도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ㆍ용궁묘 ― 동점 구무소의 전설에 나오는 엄종한(嚴宗漢)이라는 사람의 무덤이다. 엄종한은 구무소에서 고기를 잡다 가 실족하여 물에 빠져 용궁에 갔다 온 사람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흰 떡이 변한 백병석(白餠石)으로 부자가 되었 었는 데, 시집간 딸이 그 돌을 훔쳐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 사람이 죽어서 묻힌 무덤이 바로 용궁묘인데 메밀뜨리 건너편 등골 안쪽 속등에 있었다. 40여년 전 강원탄광에서 석탄을 캐느라고 등골 지하로 굴진을 하는 통에 등골일 대의 지반이 내려 앉았다. 물론 용궁묘 부근의 땅도 꺼져 내려갔다. 강원탄광에서 엄씨 후손에게 이장(移葬)해 갈 것을 요구해 경북 봉화군 대현리로 옮겨갔다. 전설에 나오는 인물의 무덤이 있던 골짜기라는 점에서 등골은 의미가 깊은 골짜기라 하겠다. 일설에는 등골의 절터에 있던 절이 엄종한을 추모하는 사당형식의 절이었다고 한다.
ㆍ탑밭 ― 메밀뜨리 아래쪽 하천 건너편이다. 지금은 강원탄광에서 폐석을 버려 탑밭은 폐석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35년 전 폐석을 버리기 전에는 수천평의 밭이 있었는데 그 밭 가운데에 돌담이 있었고 돌담 가운데에 삼층탑이 있 었다. 탑이 있다고 그 일대를 탑밭이라고 하였다. 이 탑의 기단석은 폐석 더미 속에 묻혀버렸고, 상부의 탑신은 묻 히기 전에 장명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