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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불신앙(민20:1-13)-2024.7.14
믿는 자의 불신앙이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말입니다. 왜냐면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는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이른바 취사선택형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믿는 자들도 어떤 일이나 사건 앞에서 도저히 믿음을 가진 자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는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믿는 자의 불신앙’이라는 말은 구원을 좌우하는 불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구원을 상실할만한 불신앙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구원과는 상관없을지라도 특정한 사건에 대해 불신앙적인 행동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의 불신앙적인 생각이나 행동 하나가 내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무서운 독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잘못된 생각 하나가, 혹은 의미 없는 행동 하나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도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송받는 아브라함도 불신앙적 태도를 취한 때가 있었지요. 창세기12장을 보면 가나안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자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믿음을 가진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바로 왕에게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정말 비겁한 행동이었지요. 굳이 변명하자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입니다(창20:12). 그래서 누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심은 아닙니다.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둘러댔던 것이지요. 그러자 바로 왕이 아브라함을 처남으로 생각해서 후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약대까지 얻었습니다. 세상말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인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돌려받게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믿음의 조상이라고 추앙받는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우리가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아무도 큰 소리를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흠과 점과 티가 있거든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랑할 것이 없고, 교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겸손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눈을 피해 범죄 할는지 아무도 알 수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넘어질는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비록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우리는 누구나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질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1) 모세의 불신앙
본문은 모세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일생에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불신앙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므리바 물 사건입니다. 사건이 터진 곳은 가데스입니다. 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출애굽기17장에 나오지요. 르비딤의 물 사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출애굽기17장의 르비딤의 물 사건과 민수기20장의 가데스의 물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 아닌가 혼동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혼동하는 이유는 두 사건이 모두 다 므리바(다툼)라는 별칭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르비딤의 물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시내산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물이 없자 목이 마르다고 모세에게 난동을 부립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한 반석을 지시하시고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백성들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사 죄사함의 생수를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대로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날 무렵 이스라엘은 다시 신광야 가데스라는 지역에 진을 쳤습니다(1절). 가데스는 그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를 뽑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그들은 돌고 돌아 다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문제가 터졌습니다. 그곳에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공박합니다. 말이 공박이지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퍼붓습니다.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를 통과했던 사실을 다 잊어 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비수를 찌르는 듯한 말을 토해낸 것입니다. 이런 악한 곳으로 자기들을 인도하였느냐고 말입니다(5절).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그런 말을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입니다. 출애굽한지 얼마 만에 출애굽1세대가 불평하던 것을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이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답습이나 하듯이 말입니다. 이는 사람이 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습성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 줄 아십니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나 혹은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 아니면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끊기가 어려운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아주 작은 습관 하나를 끊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던가요? 순교하는 것보다 힘들지 않던가요?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저 습관을 버리려면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죽어서나 버릴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맞습니다. 죽으면 끝이 납니다. 죽으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처방전은 이렇습니다.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8절). 반석을 치지 말고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취한 것입니다. 사실 이번 물 사건은 지팡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거든요.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으로 우리는 당시 모세의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상당히 마음이 상해 있음을 엿볼 수 있지요.
역시 우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집했습니다. 총회로 모이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책망합니다(10절).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어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나가도 너무 나갔습니다. 물론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러겠습니까? 어언 40년 가까운 세월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당시 모세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모세가 사고를 쳤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 있던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쳤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입니다. 마치 40년 전 므리바에서 한번 사용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팡이를 내리친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경험했던 방식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지팡이를 내리친 것은 모세의 불신앙적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정의로운 분노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결정적인 불신앙의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2) 믿는 자의 불신앙적 요소
우리는 이 시간 모세를 통하여 믿는 자의 불신앙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고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불신앙을 촉발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자기감정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양떼를 자기 스스로 이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먹이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시는 양떼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일 뿐인 것이지요.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를 자기 양떼라고 생각하는 순간 죄악의 올무에 빠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목사에게 주시는 경고일는지 모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야 할 책임자들이기 때문이지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이지 않고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꼴이 아니라 독을 먹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목양을 위탁받은 설교자가 자기감정을 실어 양떼를 먹인다거나, 혹은 다른 목적을 갖고 양떼들을 겁박하거나 책망하며 다그치면 안됩니다. 그 순간 설교자는 자기 개인적인 감정을 분노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누구누구를 깐다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이것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비속어입니다. 설교자가 누구를 깝니까? 만일 설교를 통해 특정인을 까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의 설교자가 아닙니다. 물론 설교를 듣고 누구를 깐다고 오해하는 자도 건강한 성도가 아닌 것이지요.
아마 이들은 모두 마음에 상처를 가진 자들일 것입니다. 마음에 쓴 뿌리를 가진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반드시 내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속칭 그렇게 특정인을 염두해 두고 까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치료가 필요하고, 그렇게 듣는 성도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불신앙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감정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그 순간 자기감정에 충만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40년을 이끌어 온 자기 백성들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될까라는 상실감이 모세로 하여금 분노의 감정으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순간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분노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분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분출시키느냐가 관건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4장26절과 27절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사람이 화를 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도 분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을 낼지라도 분을 삭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부득불 분을 냈다면 해가 지기 전까지 풀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분노가 내안에서 둥지를 틀고 내 영혼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사실 내가 한번 욱하고 내었던 작은 분노가 큰 분노로 전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저녁내 곰곰이 생각해보니 괘씸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금방 처리하지 못하면 분노가 다른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전염성 때문이지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분을 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분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분노할 줄 아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감정 없는 생명체가 없듯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라는 감정은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가 내 영혼을 잠식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가 내 영혼을 장악해 버리거나, 더 큰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작은 분노가 큰 분노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는 순간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막아낼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분노의 발화지점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발화지점을 상식적인 선에서 예측할 수 있다면 충분히 사고를 막을 수 있을 텐데 분노의 게이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에요. 분노의 게이지가 언제 폭발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본인도 자기감정을 잘 모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사람의 분노의 발화지점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분노의 폭발지점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사실 현대인들은 사소한 것에 쉽게 분노합니다. 아주 유치한 것을 가지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분노의 공격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운전하는 자들은 자주 경험합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사소한 것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진짜 무서운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어떤 분노를 표출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화를 내고 금방 후회할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때 내가 한번만 참았으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분노하다가 하나님께 회개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의 불신앙적 행동인 것이지요. 모세도 인간인지라 이런 불신앙적인 행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과격한 성품을 가진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민12:3). 그런데 모세가 분노한 것은 지난 40년의 세월에 대한 자기보상적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직까지도 불평하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아쉬움과 억울함에 대한 보상심리 차원에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신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모세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서운함이나 억울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행동을 가볍게 다루지 아니하셨습니다. 매우 준엄하게 다루셨지요.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제한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모세는 이번 일에 있어서만큼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거나 축소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만큼은 모세가 믿음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다가도 어떤 일에서만큼은 자기기분이나 감정으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지요.
저도 자주 그런 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무슨 일이 터지면 내 생각이나 마음을 우선시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생각으로 결정하곤 합니다. 결과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내 영혼이 입는 타격이나 손상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한번 넘어지고 나면 두 번 세 번 넘어질 확률이 많아집니다. 예컨대, 명절에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보통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나 혼자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난처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좋은 것이 좋다는 마음으로 제사행위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한번의 실수가 우리 믿음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한번의 실수로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한번의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내가 입게 되는 신앙의 데미지는 상상보다 큽니다. 생각보다 오래가기도 합니다.
회복하는데도 엄청난 영적인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스러운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에 대한 상실감이 생각보다 오래간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인은 잘못된 불신앙적인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다만 내가 그런 행동을 억제하고 조심한다고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막아주시는 주님께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주님을 구하여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이루는 삶입니다. 새 언약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친히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3) 불신앙의 결과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입국을 거절하셨습니다. 물론 모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하나님을 친구삼아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만 율법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신 것이지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자극시킨 것이 있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몽니를 부린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물을 주는 것처럼 시건방을 떤 것이지요.
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기가 물을 줄 수 있는 자인 것처럼 건방을 부린 것이지요. 이것이 율법의 속성입니다. 율법의 얼굴입니다. 율법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자기들 스스로의 힘이나 의지나 열심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해버리는 것이지요. 무시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은 행위신앙이요, 복음은 은혜신앙입니다. 율법으로는 한 사람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모세의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모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으리라는 착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또 다른 율법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우리가 불신앙적인 행동을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절대적인 불신앙이 아닌 이상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쪼잔하고 옹졸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의 한순간의 잘못으로 우리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무지한 판단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인간은 아무도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항상 긴장감 속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으로 인하여 불신앙적인 결함을 드러낼까봐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서 말입니다. 만일 그런 불신앙적인 태도 하나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영향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의 아주 작은 불신앙적 행동하나가 내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인은 불신앙적인 행동이나 판단에 신중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짐을 믿으시고 날마다 그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승리하십시다. 반드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날마다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는 믿음의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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