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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6~161)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56>하루 2000자씩 40년간 ‘셰익스피어’ 번역한 량스치우(梁實秋) |제157호| 2010년 3월 14일
◀192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량스치우. 오른쪽은 경찰관이었던 부친. 량은 4년간 학비와 생활비가 보장된 국비유학생이었지만 좋아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까 봐 3년 만에 귀국했다. 김명호 제공
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초·중·고교 교과서에는 루쉰(魯迅)의 문장이 5편씩 실렸다. 5년 전부터 3편으로 줄어들더니 올해부터는 자본가의 부활과 화해 사회의 건설 때문인지 아예 없애버렸다. 대신 ‘반동문인’ 취급을 받던 영문학자 량스치우(梁實秋)의 글이 자리를 차지했다.
신중국 수립 이후 량의 책들은 출판이 불가능했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면 중국인이 아니었다. 루쉰과 마오쩌둥 덕분이었다. 량은 젊은 시절 루쉰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문학에는 계급이 없다”며 ‘정치의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있는 문학’을 경계했다. ‘사상의 자유’를 요구했고 ‘사상의 통일’을 반대했다. 좌익 계열의 작가들과도 필전이 그치지 않았다. 루쉰으로부터 “상가집에서 빈둥대는 자산 계급의 주구”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1927년부터 시작된 논쟁은 1936년 루쉰이 세상을 떠나면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내용은 별게 아니었지만 영향은 만만치 않았다. 항일전쟁 기간에는 전시수도 충칭에 머물며 “문학은 항일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진보적인 작가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혁명 진영과 자칭 진보인사들치고 량에 대한 험담을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오까지 나서서 ‘자산계급 문학의 대표 인물’로 낙인을 찍어버렸지만 ‘아사소품(雅舍小品)’을 연재해 전쟁으로 상처받기 쉬운 인성(人性)을 달랬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전쟁의 불구덩이 속에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량의 산문은 중국 현대 산문 중 최고의 출판 기록을 세웠지만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번역과 연애편지였다. 1930년 말 후스(胡適)가 교육문화기금회 산하의 번역위원회 주임을 맡아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셰익스피어전집』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1856년 선교사들에 의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찔끔찔끔 단행본들이 나온 적은 있었다. 거의가 엉터리였다.
(1940년대 중엽 상하이 최고의 여가수였던 한칭칭▶)
후스는 원이둬(聞一多)·쉬즈뭐(徐志摩)·천위안(陳原)·예궁차오(葉公超)·량스치우(梁實秋) 등 5명을 역자로 선정했다. 량은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시작은 했다. 한참 하다 보니 나머지 네 사람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원은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바빴고, 쉬는 연애에 정신이 없었다. 예는 글 한 번 잘못 썼다가 한밤중에 끌려가 얻어맞고 나오더니 대학에 있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며 정계로 투신했다. 천은 국제연맹 대표로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후스는 난감했다. ‘차나 한잔 하자’며 량을 불러냈다. 이날 량은 벽돌 반쪽만 한 찐빵 12개와 자장면 세 그릇을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스는 “번역을 너 혼자서 한번 해보라”며 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는 날 멋진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즈음 상하이의 한 상인 집에서 43년 후 량의 부인이 될 한칭칭(韓菁淸)이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량은 하루에 2000자씩 40년간을 셰익스피어와 씨름했다. 1948년 대만으로 나온 후에는 더위와 치질에 시달렸다. 펜을 놓고 일어날 때마다 의자에는 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다. 1970년 전집 40권이 완간되는 날 8년 전 세상을 떠난 후스가 그리워 엉엉 울었다고 한다. 자본가의 주구 소리를 들었지만 단 한 푼도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1974년 봄 량은 상처했다. 미국 시애틀에서 부부가 함께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건물에 매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인만 변을 당했다. 조강지처를 그리는 글들을 발표해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잠시였다. 우연한 자리에서 왕년의 상하이 가후(歌后) 한칭칭을 만나자 구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도 처음에는 답장을 보냈지만 점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에 1통은 기본이고 2통, 3통씩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 73세의 량은 부인 사망 10개월 만에 재혼에 성공했다. 량이 한에게 보낸 연애편지는 연령·수량·기간이 모두 범상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기네스 북에도 올랐다. <157>남양화교 출신 탕위, 당대의 지식인 후원한 ‘맹상군’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① |제158호| 2010년 3월 21일
▲1947년 겨울 난징(南京)의 황먀오쯔(黃苗子) 집 마당. 앞줄 왼쪽부터 청자룬(盛家倫), 장루이팡(張瑞芳), 위펑(郁風). 뒷줄에 딩충(왼쪽 둘째), 황먀오쯔(오른쪽 셋째), 진산(오른쪽 둘째)이 서 있다. 김명호 제공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의 일류 문화인들 거의가 전시수도 충칭(重慶)을 향했다. 공산당 근거지 옌안은 주로 젊은 축들이 줄을 이었다. 충칭은 도시 전체가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입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먹고 자는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들 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류당(二流堂) 당주(堂主)’로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20세기의 맹상군(孟嘗君)’ 탕위(唐瑜)였다.
탕위는 남양화교 출신이었다. 집안이 버마의 대자본가였지만 사업보다는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 문장도 신랄했다. 여배우 롼링위(阮玲玉)가 자살했을 때 ‘누가 롼링위를 살해했나’라는 글로 상하이를 뒤집어 놓았던 장본인이 탕위였다. 중공 총정치부 선전부장 판한녠(潘漢年)과 화남국 서기 샤옌(夏衍) 등 중공의 문화정책 담당자들과 친했다.
◀1943년 충칭(重慶) 시절의 탕위.
중일전쟁 기간 버마에서 윈난(雲南)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외부의 보급품이 중국에 유입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탕위는 랑군에 있는 형들에게 충칭에서 사업을 하겠다며 온갖 거짓말을 다해 돈을 타냈다. 대형 트럭 2대와 최고급 승용차에 뭔가를 가득 싣고 충칭에 와서는 차량들까지 처분해 버렸다. 원로 연극배우 뤼언(呂恩)의 회고에 의하면 자산가치가 은행을 하나 차려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탕위는 대형 거실이 딸린 번듯한 집을 구입한 뒤 요리사와 세탁부를 고용했다. 상하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문화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중국인이라면 애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사만화가 딩충(丁聰), 뭘 물어봐도 모르는 게 없었지만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음악가 청자룬(盛家倫), 여류작가 펑쯔(鳳子), 명(名)화가에 산문가였지만 지금은 서예가로 더 알려진 황먀오쯔(黃苗子), 왕런메이(王人美)와 헤어진 한국인 영화 황제 김염(金焰)과 훗날 결혼하게 되는 친이(秦怡), 왕런메이의 두 번째 남편이자 중국 발레의 초석을 놓은 현대무용가 다이아이롄(戴愛蓮)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화가 예첸위(葉淺予), 당시에는 경제학자였던 저우유광(周有光), 극작가 우쭈광(吳祖光), 우쭈광의 첫 번째 부인이나 다름없었던 미녀 연극배우 뤼언,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위문단으로 나왔다가 북한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총살당할 뻔했던 미남 배우 진산(金山), 홍색공주 쑨웨이스(孫維世)에게 남편 진산을 도둑맞은 장루이팡(張瑞芳), 장칭(江靑)과 한방에 하숙했던 죄로 문혁 시절 영문도 모른 채 온갖 고초를 겪었던 황먀요쯔의 부인인 여류화가 위펑(郁風), 시장경제의 제창자 우징롄(吳敬璉)의 모친 덩지싱(鄧季惺) 등이 상객(常客)이었다.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몰려 있다 보니 폭소가 그칠 날이 없었다. 한때 작은 사고 몇 건씩은 저질러 본 사람들이었다. 언제 무슨 말들이 튀어나와 웃음거리가 될지 몰라 여간 급한 일이 아니면 빠지려 하지 않았다. 다들 이류(二流)로 자처했다.
틈만 나면 저우언라이(周恩來), 랴오청즈(寥承志), 차오관화(喬冠華) 등과 함께 탕위의 집을 찾아와 한바탕 떠들어야 속이 시원하던 궈모뤄(郭沫若)가 이들에게 당호(堂號)를 선사했다. ‘일류인물 이류당(一流人物 二流堂)’, 세상에 이렇게 멋진 당호가 없었다. 당주(堂主)는 당연히 탕위였다. 모두 흡족해했다. 20여 년 후 거의 죽다 살아날 정도로 날벼락을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계속) <158> 극작가 우쭈광 집에선 저우언라이도 문화비평가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② |제159호| 2010년 3월 28일
▲1950년대 말 우파분자로 몰린 우쭈광, 딩충, 황먀오쯔(왼쪽부터)는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싼장(三江)평원인 베이다황(北大荒)에 끌려가 3년간 노동을 했다. 1961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세 사람. 김명호 제공
이류당(二流堂)이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 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공산당의 정책과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딩충(丁聰)이 “정객(政客)들의 치국(治國) 행위가 정치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라고 한 다음부터는 혁명이나 정치에 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옷이나 담요 따위를 들고 왔다. 말이 없던 린뱌오는 가끔 “죽을 끓이면 천하에 별미”라며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수확했다는 대추와 좁쌀을 들고 와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국민당 남방 집행부 주임 왕신헝(王新衡)도 툭하면 황먀오쯔(黃苗子)를 따라 이류당을 찾았다. 공산당 쪽 사람들이 더 붙임성이 있었다. 문화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좌경 유치병’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딩충은 증세가 특히 심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이류당에 모이던 사람들은 충칭을 떠났다. 원래의 생활터전인 상하이와 홍콩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관화(喬冠華)는 “이류당은 장차 베이징에서 할 일이 많다. 문화인들을 위한 살롱을 만들어 휴식할 장소를 제공해 줄 곳은 이류당 밖에 없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후일 중국의 초대 유엔 대표로 주목을 받았던 ‘백발의 노신사’ 차오관화도 당시에는 이류당에서 날을 지새우던 국제문제 평론가였다.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은 딩충의 열렬한 팬이었다. 1939년 딩충의 항일화전 전시장을 방문했다.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자 충칭에서 흩어졌던 문화인들이 수도 베이징으로 꾸역꾸역 몰려 들었다. 동작 빠른 연극배우 한 사람이 커다란 서구식 건물을 헐값에 구입해 세를 놓았다. 청자룬이 입주하자 황먀오쯔와 위펑 부부를 필두로 우쭈광(吳組光)과 신펑샤(新鳳霞), 천밍더(陳銘德)와 덩지싱(鄧季惺) 부부도 뒤를 따랐다.
우쭈광은 극작가에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누가 찾아오건 반갑게 대했다. 지척에 연극학원과 영화학원이 있었다. 공연장에나 가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던 미남·미녀들이 항상 집안에 바글바글했다. 우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평생 “위는 숙이고 아래는 꼿꼿하게 세워라”는 조부의 유언에 충실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거물들과 마주해도 주눅드는 법이 없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도 잘난 척 하는 법이 없었다.
작가 라오서(老舍)와 선충원(沈從文), 학생 시절 희곡 한편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차오위(曺禺),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과 청옌추(程硯秋), 마오쩌둥의 5대 비서 중 한 사람으로 마오의 도장을 관리하던 톈자잉(田家英), 서화가 치궁(啓功), 치바이스(齊白石), 황융위(黃永玉), 명배우 황쭝잉(黃宗英)의 두 번째 남편인 명 번역가 펑위다이(馮亦代), 천하의 기서(奇書) 『홍루몽(紅樓夢)』을 유려한 영문으로 옮겨놓은 양셴이(楊憲益)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상하이 상임부시장 판한녠과 선전부장 샤옌은 회의 참석차 베이징에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쭈광의 집을 찾았다. 저우언라이도 이곳에 오면 문화비평가로, 군사위원회 부주석 천이(陳毅)는 군인 정치가가 아닌 시인으로 둔갑했다.
(丁聪 讽刺画)
▲想脱贫,先上贡 ▲我要的是“精神食粮”
▲一枝独茂 ▲ 馋猫
황먀오쯔와 딩충이 왕스샹(王世襄)과 함께 우쭈광의 흉을 본 적이 있었다. 왕스샹은 평생을 놀기만 하다 보니 여러 분야에 대가가 된 당대의 기인이었다. 세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기억을 더듬어도 “먹는 것을 너무 밝히고 많이 먹는 것” 외에는 흠이 없었다. 우쭈광은 후식으로 세숫대야 크기만 한 그릇에 가득 담긴 바바오판(八寶飯)을 먹어 치우는 대식가였다. 게다가 미식가이기도 했다. 집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1954년 봄 베이징에서 문예공작자 회의가 열렸다. 국무원총리 저우언라이가 축사를 했다. 첫마디가 “이류당 사람들 빠짐없이 참석했습니까?”였다. <계속> <159>중국인이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매력남’ 왕스샹(王世襄)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③ |제160호| 2010년 4월 4일
◀1991년 7월 팡자위안에 있던 왕스샹(오른쪽)의 서재. 전형적인 중국 사대부의 서재로 일컬어진다. 책상, 의자, 화분 받침, 침상 등이 모두 명대(明代)의 것들이다. 현재 상하이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당대(唐代)의 불상과 다기들도 많았다.
우쭈광(吳組光)의 집 건너편에 쓰촨(四川)요리 집이 문을 열었다. 숙친왕(肅親王)의 막내딸이 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이라면 친언니는 한간(漢奸)으로 총살당한 동양의 마타하리 진비후이(金璧輝), 일본명 가와지마 요시코(千島芳子)였다. 왕녀(王女)가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인이 미혼이라는 것까지 알려지자 오후 서너 시부터 사람들이 뱀처럼 줄을 섰다. 쓰촨요리 집에서 각자 볼일을 마친 문화인들은 으레 우쭈광의 집을 찾았다. 우의 집은 완전히 ‘신(新)이류당’으로 변했다.
쓰촨요리 집 덕분에 우쭈광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우는 곯을 대로 곯았다. 꾀를 냈다. 유명한 식당이 없는 곳에 집을 한 채 구입해 상하이에 있는 부모를 모셔오면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겠거니 했다. 부친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고궁박물관 소장 문물들을 남쪽의 안전한 지역으로 옮긴 ‘고궁 문물의 수호신’이었다. 노인에게 인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인근에 이름난 식당은 없었지만 교통이 너무 편했다.
우쭈광은 골병이 들었지만 수확도 있었다. 쓰촨요리를 먹으러 왔던 왕스샹(王世襄)이 이류당을 제 발로 찾아왔다. 왕은 푸젠(福建)의 대대로 내려오는 망족(望族) 집안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영어가 유창했다. 부친은 외교관이고 모친은 평생 금붕어만 그린 중국 최초의 영국 유학생 출신 화가였다. 왕은 법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형사 재판을 한번 방청했다. “죄지은 사람들 앞에서나 큰소리치는 한심한 직업”이라며 생각을 바꿨다. 부모가 의과대학을 권했다. 입학해 보니 체질에 맞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는커녕 생사람 잡을까봐 겁이 났다.
◀문혁 기간인 1972년 후베이(湖北)성 셴닝(咸寧)의 57간교(干校)에서 노동 중인 왕스샹. 자연 속에서 소와 함께 있다 보니 항상 즐거웠다고 훗날 회상했다. 김명호 제공
개(犬)·비둘기·매·귀뚜라미 등을 데리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놀기만 했다. 곤충과 동물들이 친구였다. 가을에는 귀뚜라미 싸움에 넋을 잃었고 겨울에는 곤충들을 품에 넣고 다니며 우는 소리를 즐겼다. 매를 날려 토끼를 쫓고, 개들과 함께 오소리를 잡으러 다녔다. 아무리 놀아도 피로하지 않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비둘기를 멀리 날려 보낼 때는 내가 자유를 얻은 듯 통쾌했다.” 책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옌징(燕京)대학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이 부리부리한 매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등교하는 학생을 볼 수 있었다.
1939년 왕스샹은 모친을 잃었다. 야단칠 사람도, 감싸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니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모친이 그렇게 좋아하던 중국고대회화(繪畵)에 갑자기 정이 갔다. 5년에 걸쳐 ‘중국화론연구(中國畵論硏究)’를 완성했다. 70만 자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3년상은 너무 짧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모친에게 선물을 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살 것 같았다.”
왕스샹은 가출했다. 허난(河南)·산시(陝西) 일대를 떠돌았다. 린후이인(林徽音), 량스청(梁思成) 부부와 함께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건축물의 실태를 조사하며 고증을 통한 고대건축의 연구에 매달렸다. 이류당이 있는 충칭(重慶)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이류당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왕스샹의 집 팡자위안(芳嘉園)은 베이징의 대표적인 전통가옥이었다. 우쭈광의 집에서 이류당 사람들과 알게 된 왕은 황먀오쯔, 위펑 부부, 만화가 장광위(張光宇)에게 팡자위안으로 이사올 것을 권했다. 문화부 부부장 샤옌(夏衍)과 딩충의 집도 지척에 있었다. 샤는 이들의 대장이었다. 팡자위안은 신이류당의 새로운 집결지로 탄생했다.
왕스샹은 음식의 대가였다. 남의 집에 가서도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 그가 만든 국수와 야채요리는 천하의 별미였다. 비결을 물으면 “좋은 자료를 고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된다. 가급적이면 남보다 먼저 시장에 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 왕은 새벽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왕스샹은 중국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던 중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5개월 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계속) <160>장징궈를 ‘내 동생’이라고 불렀던 랴오청즈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④ |제161호| 2010년 4월 11일
▲신화사(新華社) 사장 시절 담배를 피우다 부인 징푸춘(經普春)에게 들킨 랴오청즈가 부하 직원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 당시 신화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김명호 제공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不)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三不) 정책을 고수했다.
82년 7월 25일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는 인민일보를 통해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에게 보내는 ‘즈장징궈신(致蔣經國信)’을 발표했다. “그간의 증오를 털어 버리고 다시 합작의 길을 모색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가서(家書) 형식의 편지였다. “나이가 들면 지난날이 더욱 그리운 법, 요원하기만 한 남쪽 하늘 넋 잃고 바라보느니, 너만 괜찮다면 당장 짐을 꾸려 네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겠다”며 “땅끝까지 가서 파도만 도둑질하면 그곳에 내 형제가 있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면 은혜와 원한 모두가 물거품”이라는 루쉰의 시(詩)까지 한 구절 인용했다. 말미에는 노부인(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대신 문안인사를 전해 줄 것을 청하고 팡량(方良:장징궈의 부인), 웨이궈(緯國:장징궈의 동생)와 조카들의 안부를 챙겼다.
랴오청즈는 대만총통 장징궈를 공개적으로 “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랴오는 황포군관학교 서기의 아들이었고 장은 교장 장제스의 아들이었다.
◀1980년 9월 루쉰 탄생 100주년 기념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건배하는 랴오청즈(왼쪽)와 딩충.
장징궈는 두 살 위인 랴오청즈를 잘 따랐다. 형도 없었지만 친형(兄) 이상이었다. 랴오만 보면 먼발치에서부터 형이라 부르며 달려갔다. 랴오는 장이 잘못해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응석을 심하게 부려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소년답지 않게 낙천적이고 대인의 풍도가 있었다.
랴오청즈는 어렸을 때부터 쑨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의지가 강하고 감성이 풍부하고 매사에 낙관적인 대혁명가들 틈에서 성장했다.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운 단어가 ‘혁명’이었다. 16세 때인 1924년 여름 국민당에 입당했다. 이 최연소 당원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저 애는 당을 잘못 선택했다”고 말하는 청년당원들이 많았다. 만화 솜씨가 뛰어나 선전화를 도맡아 그렸다. 이듬해 봄 소년 장징궈는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랴오는 국민당 우파의 사주를 받은 자객의 손에 부친을 잃자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국민당에서는 퇴출당했다. 당에서 쫓겨난 국민당의 성골(聖骨)은 공산당에 입당해 일본·독일·네덜란드·소련을 오갔다. 모스크바에서는 장징궈와 재회했다. 장은 소련 공산당원이 돼 있었다.
랴오청즈는 감옥과 인연이 많았다. 정식으로 여섯 차례 감옥 생활을 했다. 그중 4번은 외국의 감옥이었다. 일본에서 세 차례 다녀왔고 네덜란드에서도 감옥 밥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두 차례 영어의 몸이 됐다. 장제스는 무슨 핑계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랴오를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한번은 직접 관저까지 불러 달랬지만 랴오는 부동자세를 한 채 끝까지 대답을 안 했다.
복장이 터진 장제스는 다시 데려다 가두라고 하면서도 몸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지시했다. 석방되는 날 저우언라이가 직접 가서 인수했다. 국공합작 시절이라 가능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저우의 부인은 대성통곡했지만 랴오가 싱글벙글하는 바람에 김이 빠졌다.
공산당에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장정 도중 따로 공산당 중앙을 차린 장궈다오(張國燾)는 랴오를 반혁명으로 몰아 당적을 박탈하고 총살을 결정했다. 랴오를 살린 것은 만화였다. 선전화를 그릴 사람이 없었다. 수갑을 찬 채 선전화를 그리며 장정을 마쳤다.
랴오청즈는 신중국 수립 후 저우언라이와 함께 이류당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고위층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만화가 딩충과는 키·식성·성격 등이 비슷했다. 특히 낙관적인 성격은 판에 박은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이름보다는 ‘샤오랴오(小廖)’와 ‘샤오딩(小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161>반우파 운동의 狂風에 맞선 우쭈광·신펑샤 부부 일류 인물들이 만든 이류당⑤ |제162호| 2010년 4월 18일
▲1950년대 중반 자녀들과 함께한 우쭈광·신펑샤 부부. 신펑샤(왼쪽)는 여섯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른 당대 최고의 평극(平劇) 배우였다. 김명호 제공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정변이 발생했다. 주동은 생명과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다 요절한 민족시인을 추앙하던 지식인 조직 ‘페퇴피 서클’이었다.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전임 총리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의 복벽”이라고 단정했다. 무력을 동원해 진압해 줄 것을 소련에 강력히 요구했다.
헝가리 사태는 마오쩌둥에게 경종을 울렸다. 하루아침에 헝가리 공산당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베이징·상하이·우한 등 대도시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학생집회가 간간이 열렸다. 헝가리 사태의 초기와 흡사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승리하자 일부 동지의 의지가 쇠퇴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신은커녕 지위와 명예에만 눈이 벌겋다. 앉았다 하면 먹고 입는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누가 얼마를 더 받고 덜 받는 타령이나 해대는 것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며 본격적인 당(黨) 내 정풍운동(整風運動)을 전개했다. 관료주의도 호되게 비판했다. “관료주의는 금품이나 받아먹고 시치미 떼는 부패한 것들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군중을 대할 때 좋은 말로 하는 법이 없고 매도할 궁리만 한다. 문제가 발생해도 달려가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타도돼야 마땅한 것들이다.”
이어서 ‘반우파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부장급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 50여만 명이 우파로 낙인이 찍혔다. 문화부 부부장 중 한 사람이 ‘문예보’에 장편의 글을 발표했다. 제목이“이류당 우파 소집단을 철저히 분쇄하자”였다. 이류당에 출입하던 문화인 거의가 된서리를 맞았다. 베이징 영화제작창은 전체확대회의를 열어 ‘반혁명 우파분자’ 우쭈광(吳祖光)을 성토했다. 문화부 부부장이 우의 부인 신펑샤(新鳳霞)를 호출했다. “네 남편은 정말 나쁜 놈이다. 태도를 분명히 해라.” 신은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부장은 당일 배포된 인민일보를 내밀었다. 우파분자인 남편과 이혼하고 공산당 입당을 자청한 여인의 결단을 찬양하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바로 이거다. 좀 보고 배워라.” 신은 주저하지 않고 거절했다. “당은 지식분자들을 개조한다고 했다. 남편을 개조시키면 될 거 아니냐.” “개조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가능하다.” “아주 먼 곳으로 보내겠다.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도대체 얼마 동안을 기다리겠다는 말이냐?” 신은 평극(平劇)의 주인공 이름을 거론했다.
“왕바오촨은 쉐핑꾸이를 18년간 기다렸다. 나는 28년을 기다리겠다.” 부부장은 발끈했다. “당장 나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 부부장은 훗날 묘한 말을 남겨 당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신펑샤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내 깐에는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신펑샤는 톈진의 빈민굴 출신이었다. 문맹이었지만 노래를 잘했다. 여섯 살 때부터 목소리 하나로 가족들을 부양했다. 천하의 기재(奇才) 우쭈광을 만나 글을 깨쳤다. “내게는 너무 과분했지만 우쭈광은 하늘이 보내준 유일한 선물 이었다. ”결국은 여배우 뤼언(呂恩)과 동거 중이던 우를 손아귀에 넣은 당대 최고의 평극 배우였다.
하다 보니 신(新)이류당 당주가 되었던 우쭈광은 1958년 봄 500여 명의 우파분자와 함께 베이다황(헤이룽장성 북부, 현재의 싼장평원 일대.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했지만 당시엔 황무지였다)행 새벽 열차를 탔다. 그날 따라 눈이 내렸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늦게 결혼한 딩충은 출산을 앞둔 부인 선쥔(沈峻)을 병원에 둔 채 황먀오즈, 여류작가 딩링(丁玲)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났다. 딩충과 황먀오즈는 벌목장에 배치받았다. 체격이 우람한 사람들은 고생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키 작은 덕을 단단히 봤다. 여러 명이 나무를 운반할 때 어깨가 나무에 미치지 않았다. 타고난 재주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이다황(北大荒)문예를 편집했다.
문혁 초기에도 4인방은 “중국의 페퇴피 구락부”라며 이류당을 정조준했다. 최종 목표는 저우언라이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저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홍위병들에게 “문인들이 모이던 곳이다. 조직이 아니다. 이류당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온갖 흉악한 용어가 이류당 사람들의 이름 앞에 다시 난무했다.
*評劇 별명으로 붕붕희(蹦蹦戱), 평강방자희(平腔梆子戱), 당산낙자 (唐山落子), 낙자희 (落子戱), 평강방자희(平腔梆子戱)라고 하며, 약칭 평희(平戱)이라고도 한다. 중국 북부에서 유행하는 극종의 하나다. 청대 말기 하북성 난(灤)현 일대 노랫가락 小曲인 "대구 연화락" (對口蓮花落, 2인 연화락)의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하북성 농촌지역에서 유행하였는데, 나중에 당산(唐山)에 들어와서 "당산낙자(落子)"로 불리었다. 1920년대 쯤 동북지방에서 유행하였는데, 수많은 여배우도 나타났다. 1930년대 이후 평극은 경극·하북방자 등 희극의 영향을 받아 날로 발전하였으며, 李金順, 劉翠霞, 白玉霜, 喜彩蓮, , 愛蓮君 등의 유파가 나타났다. 1950년 이후, "小女婿(작은 사위)", "유교아(劉巧兒)", "화위매(花爲媒 꽃 중매인)" "양삼저고장(楊三姐告狀)", "진향련(秦香蓮)" 등 레포터리는 전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평샤(新鳳霞), 魏榮元 등 명배우도 나타났다. 지금까지도 화북·동북 일대에서 유행하고 있다
신펑샤(新鳳霞)가 주연한 평극 '劉巧兒'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 중양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主演: 新鳳霞 / 張德福 / 張淑琴 / 薛恩厚 / 劉桂榮 / 新鳳妹 導演: 伊琳 製作公司: 長春電影製片廠 1942年,陝甘寧隴東地區的人民,在政府的倡導下,實行婚姻自主。農民劉彥貴的女兒劉巧兒由父母包辦,自幼許配給趙家莊的柱兒,但從未見過面。在一次勞模會上,她愛上了勤勞俊秀的小夥子趙振華。地主王壽昌垂涎巧兒貌美,厚金許給劉媒婆,叫她從中撮合。劉彥貴貪圖錢財,便答應把女兒嫁給王壽昌,並騙女兒說趙柱兒是個二流子,提出解除女兒與他的婚約。一日,劉巧兒去合作社送線,被王壽昌糾纏,並告訴她馬上就要迎親,劉巧兒知... |
첫댓글 하루에 2000자씩 40년간 세익스피어와 씨름했다니 이걸 믿어야 하나!? 凡人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일이겠지.
하방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저렇게 평화로운 모습이라니...大人이네.
암튼 결과물이 나왔으니....
나도 王世襄의 인생관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네~ㅎ
나같은 소인이 가질만한 크기는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