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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용히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딘가 톱니가 맞지 않는 듯하고 뭔가 하나 빠져 있다는 허전한 느낌이 안 드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이야기 성립의 조건과 구실을 제공하지만 철저하게 소외되고 무시되는 주변인으로서의 두 인물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창녀 얼굴에 칼을 그어댄 죄로 목에 현상금이 붙은 두 명의 카우보이입니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이들 두 명의 카우보이는 이상할 정도로 소외되고 잊혀집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어쨌든 이들 두 사람 때문에 시작되죠. 이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고 맙니다. 마을 보안관 리틀 빌의 편파적인 법 집행에 분노한 창녀들이 이들의 목에 현상금을 거는 순간부터 이들은 용서받을 수가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죄의 대가를 사망으로 치러야만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 두 사람이 보안관 리틀 빌로부터 경미한 처벌만 받은 채 곧바로 사면됐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리틀 빌은 법의 집행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이나 휘두를 줄 아는 후안무치한 위인일 뿐입니다. 공권력을 남용하기 일쑤인 보안관으로부터의 편파적인 사면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설득력도 발휘하지 못하며, 결국 법 제도에 대한 불신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리틀 빌은 '법이라는 이름의 문명'이 가져다 주는 제약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써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마따나 사람들에게 '불만(discontent)'과 좌절감만 잔뜩 심어주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죄에 대한 완전한 응징과 복수를 통해 심리적 만족을 꾀하는 것을 규범으로 여기고 있는 서부/무법/비문명 지대의 사람들에게 법/문명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면/제약은 결국 분노를 사게 되고, 이 억눌린 분노는 마침내 윌리엄 머니라는 늙은 총잡이의 형상으로 '귀환'하여 상대로 하여금 그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극적인 해소에 이르게 됩니다. 즉, 다시 말해서 죽을 죄를 지은 두 명의 죄인은 살해당함으로써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고, 공권력을 남용한 보안관/권력자는 철저히 분쇄돼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이야기 흐름상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인물은 역시 창녀 얼굴에 칼질을 해 댄 한 명의 카우보이와 공범인 그의 동료 카우보이, 이렇게 두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법으로부터는 용서를 받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법으로부터 소외된/억눌린 인간의 감정/불만에게까지 용서를 받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영화 타이틀을 항상 주인공과 결부시켜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죠. 2. 보안관 자택의 천장은 왜 아무리 수리를 해도 비가 오기만 하면 물이 줄줄 새는 걸까? 건물은 문학이나 영화에서 하나의 상징 또는 메타포로 곧잘 등장합니다. 문학의 경우 잘 알려진 예로서 보르헤스(Jorge L. Borges)의 몇몇 단편이나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에 등장하는 건물들-특히 도서관-을 들 수 있겠는데, 이 경우 건물은 상징이나 메타포의 수준을 넘어 아예 그 묘사된 건물 구조 자체가 작가의 철학을 유형화(有形化)하는 데에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 등장하는 악질 보안관 리틀 빌의 자택 역시 이러한 범주의 건물-상징 또는 메타포이자 작가의 철학의 유형화로서의 건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 나오는 보안관의 자택은 보안관 자신이 손수 목재를 날라 와 지은 목조집입니다. 그런데 보안관의 집 짓는 솜씨는, 그의 조수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틈만 나면 빈정거리며 흉보고 있듯이, 그야말로 형편없어서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의 집 천장에선 영락없이 물이 줄줄 샙니다. 즉, 보안관의 자택은 보수가 시급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안관이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는 씬이 제시되기도 하지요. 영화에서 시종일관 언급되는 이 엉성한 보안관의 집-심지어 보안관은 머니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기 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이는 영화에서 보여 주는 보안관의 캐릭터와 연결시킬 때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앞서 1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보안관 리틀 빌은 법의 테두리를 간신히 넘지 않는 선에서 아주 교묘하게 공권력을 남용하는 야비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원래 법이란 게 만인을 만족시켜 줄 수도 없는 것이고,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법 제도라 할지라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가 인간인 이상 허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리틀 빌처럼 야비한 인물에 의해 법이 집행되고 있으니 마을에 보안관이 있고 법이 있어도 무법 지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비가 새는 보안관의 집이 의미하는 바가 밝혀집니다. 즉, 결코 완벽할 수 없는 법 제도의 한계와 허점의 메타포라는 것. 보안관 집의 누수 현상은 따라서 법 제도에 기초한 정치 권력의 누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법의 집행자인 보안관/권력자는 이 누수 현상/법 제도의 허점을 극복해 보려고 자신의 집을 수리하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해 보지만, 그 자신 절대로 공명정대한 인물이 될 수 없는데다 집 짓는 솜씨마저 형편없고 보면 결과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인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메타포를 통해 자신의 철학 내지 장르의 규범이랄까 하는 것의 유형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대관절 무슨 말이냐?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시대는 아무래도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이른바 무법 시대였습니다. 서부극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서부극에 무법자들이 등장하고, 결투가 벌어지고, 복수하고, 피를 흘리는 시각적 컨벤션이 반복되는 건 당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서부(the West)는, 이미 구조주의자들의 서부극 분석을 통해서도 밝혀졌듯이, 법 제도와 문명 그리고 동부(the East)에 대한 대립항 또는 도전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한 자>에 나오는 비가 새는 보안관의 집은, 서부가 갖는 대립항으로서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그간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사용해 왔던 모든 규범/컨벤션을 총집결시킨 상징적 유형화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트우드는 비가 새는 보안관의 집이라는 얼핏 사소해 보이는 듯한 보조 장치로써 서부극 장르 전통에 의해 구축된 서부의 생리-법과 문명을 거부하는-를 단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얘깁니다. 나아가 이는,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서부극으로 출세하여 결국 그때까지도 서부극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한 늙은 성격파 배우가 이제는 쇠퇴해 가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바치는 소박한 '결산 보고'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한 주인공 윌리엄 머니는 과거 악명을 날리던 잔인한 총잡이/무법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무법의 서부 시대도 -쇠퇴해 가는 서부극 장르처럼-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무법자는 우스꽝스런 영웅의 모습으로 신화화되어 -이는 극중에서 '잉글리쉬 밥'이라는 영국인 총잡이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저 옐로 저널리즘의 추적 대상으로나 그 가치를 발휘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머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노쇠한 한낱 늙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 제도가 정착했으며 서부의 사람들도 점차 문명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은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가 그러하듯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피해를 당한 약자에게 결코 심리적 만족을 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이 가져다 주는 제약에 불만을 갖게 되고, 원수에게 철저하고 무자비한 복수가 가능한, 그럼으로써 완벽한 심리적 만족을 꾀할 수 있었던 법률 이전의 시대-무법 시대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됩니다. 이 향수에 부응하여 우리의 이스트우드는 철 지난 서부극의 히어로로, 돌아온 총잡이 머니로 비 내리는 서부의 음산한 밤거리에 재등장합니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귀환 the return of the repressed"이라는 것. 하지만, 비록 우리의 이스트우드/머니는 노쇠하긴 했어도 프로이트가 말한 신경증(Neurosis)처럼 왜곡되고 병적인 몰골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돌아온 늙은 총잡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무대 전면에 등장하여, 법을 집행하는 허점투성이의 문명인들에게 법을 집행하려면 똑바로 하라고 일갈하면서 법을 오용하는 악당들을 철저하게/무자비하게/통쾌하게/후련하게 응징해 버립니다. 응징의 효율 면에서 법은 도저히 무법의 그것을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트우드/머니는, "여자들(그러니까 극중 창녀들)에게 또 손대면 다시 돌아와서 애새끼고 계집이고 할 것 없이 너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비 내리는 밤거리의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이는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할 때 인간의 역사는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문명 경고적 메시지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성격파 배우의 존재 자체와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에게 영화적인 '보여 주기'의 진수가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영화의 역사에서 할리우드가 낳은 걸작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