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시학> 2010. 가을호
상처를 끌어안는 네 가지 치유방식 박성민 (시인) -임성구,『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동학사) -박지현,『저물 무렵의 시』(고요아침) -김종빈,『냉이꽃』(도서출판 한맘) -이정원,『39도 5부』(연인 M&B)
1. 시인들의 현실인식, 상처를 찾아 드러내는 시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옛 글을 본받되 새롭게 지어라.”라고 말했던 연암 박지원이 살아 돌아온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에 아직도 조선시대의 시조 형식과 현실인식, 내용, 표현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지 못한 일부 시조시인들에게 큰 호통을 칠 것이다. 어제 능숙하게 표현했던 기법을 오늘은 싫증내고 과감하게 버리면서 새로운 기법을 찾아나서는 무모함 같은 것이 있어야 시가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물며 몇 백 년 전 선배들의 기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면,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시는 한 편 한 편이 따로 숨 쉬는 생명체이고, 서로의 얼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같은 표현방식으로 10여 편 이상의 시를 쓰는 일부시인들은 지금이라도 시 쓰기를 포기하고 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술로 전업해야 할 것이다. 연암의 말을 지금의 상황으로 옮기자면, “지금 네가 현실에서 직면한 문제를 너의 새로운 인식과 기법으로 쓰라.”는 말로 변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어떻게 드러내려 하는가는 시의 창작방법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작품에 반영하는 양상은 시대, 작가의 의식, 개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것이 바로 시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근간된 시집 4권에서 공통적으로 읽혀지는 현실인식과 그 정서는 트라우마(trauma), 혹은 상흔(傷痕)이다. 엠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처럼 내 밖이 나보다 크다. 타자(他者)는 나보다 언제나 크고 높고 나보다 우선하므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또는 타자가 만들어낸 외부세계의 억압적 상황에 의해서 상처받게 마련이다. 상처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상처 스스로가 숨는 것이다. 시인은 자꾸 숨으려 하는 자기 내부의 상처를 찾아내어 그것을 정화시킴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려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치유방식은 시인의 환부와 그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를 독자적인 발성법으로 표현하려는 네 시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골목이 키운 쓸쓸한 시간들 -임성구,『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불안한 밤 추위에 떨며 달력을 뜯어낸다 별자리 더듬는 키 작은 바람 모로 누운 여러 날 가슴 졸이며 쓴 시가 빗물에 번지던 날 번득이던 부호마저 낙뢰로 묻혀 버리고 그런 날 낮도 밤 같아 이정표가 안 보인다 수렁을 빠져나온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물기둥을 보았다 까만 얼굴 환한 웃음도 한 됫박 별 물을 퍼올리면 갈증도 저리 빛난다 -「시작(詩作)」전문 쓸쓸하다. 임성구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너무도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는 첫수 초장은 그를 지배했던 절망적 시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작은 집들의 사이로 뚫린 좁은 길이 골목이다. 골목은 의식적 삶의 균열을 상징한다. 이 균열을 통해 우리는 임성구 시의 개인적 심리의 내적 유형이나 그가 직시하는 세계의 내적 유형을 엿볼 수 있다. 골목은 전망이 차단된 상태다. 따라서 화자에게는 “불안한 밤”과 “추위에 떨”어야 하는 시간, 즉 “달력을 뜯어내”는 시간들만이 존재하는 공간인 것이다. 골목은 또 물이 좁은 골목을 흐르듯이 모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엄마로부터 내쫒긴 아이들이 울면서 오래 서있는 공간과 같이 열등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별자리/ 더듬는 키 작은 바람”처럼 한없이 작고 열등해진 화자는 별자리를 더듬으며 희망을 꿈꾼다. 하지만 “가슴 졸이며 쓴 시가 빗물에 번지던 날”에는 “번뜩이던 부호마저 낙뢰로 묻혀 버리”는 좌절감이 그를 덮쳐온다. “낮도 밤 같아” 이정표가 안 보이던 날, 화자는 생명력, 또는 재생의지의 수직적 상승을 떠올릴 수 있는 ‘물기둥’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까만 얼굴 환한 웃음”에서와 같은 소멸/ 생성, 어둠/ 빛, 절망/ 희망의 양면성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 어둠속에서 빛난다는 점에서 화자의 정신세계나 다름없는 ‘별’의 물을 한 됫박 퍼올리는 화자의 갈증이 역설적이게도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른 아침 독사 같은 년! 하고 접시 하나 깨졌다 독꽃 제가 꺾어놓고 가시돋힌 말 쏟아내는 그 사내 혀끝에 칼을 꽂는 긴 겨울날 결빙의 말 - 「말의 균열」전문 사랑의 양면성, 혹은 모순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시다. 여기에서 물질적으로 깨지는 것은 하나의 접시지만, 심리적으로 깨지는 것은 부부간의 사랑의 균열이며, 그것은 “가시돋힌 말/ 쏟아내는/ 그 사내”에서처럼 남편의 입에서 나온 서슬 퍼런 말 때문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고 한 제논의 역설처럼 타인의 눈에 마냥 행복해 보이는 부부의 결혼생활도 순간순간을 보면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갈등과 반목이 있을 수 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참으로 상처 줄만큼 위험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고 안도할 순간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다퉈보지 않는 잉꼬부부가 얼마나 있으랴. 그러나 속으로 삼켜야 될 말을 남편이 뱉은 것이다. 이런 말은 둘 사이를 “긴 겨울날”로 만들고 서로의 사이에 “결빙”의 공간을 부여한다. 이것은 하루의 삶을 막 시작하려는 “이른 아침”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희망, 광명, 따뜻함, 새로움, 시작, 생기, 창조 등 아침의 원형적 상징이 절망, 암흑, 차가움, 불안, 갈등, 파괴 등의 개인적 상징으로 변모한다. 그런데 이것은 여자에게만 상처를 주는 말일까? 아니다. 그 말은 오히려 “독꽃 제가 꺾어놓은” 사내에게 더 심각한 후회를 만들어 주는 말이다. 그래서 “결빙의 말”이라는 시구 속에는 사랑의 원초적인 핵심이 결국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사내가 깨뜨린 “접시 하나”는 애초에 없었다. 서로 다른 지점의 점들이 만나 하나의 동심원을 이룬 접시 같은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접시는 외곽일수록 원형을 의지하려고 하는 싸늘한 질서다. 그리고 접시의 동심원 속에는 구속이라는 향기로운 과일을 담는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접시의 완성은 구속의 시작이며 접시의 깨짐은 자유의 완성이다. 사랑의 서구적인 어원은 Amor인데, 즉 사랑이란 ‘죽음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이란 삶을 삶답게 살아가려는 치열한 몸부림과 안간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지만 “긴 겨울날/ 결빙의 말”처럼 좌절과 허무와 미망이라는 더 깊은 고뇌를 안겨주기도 한다. 사랑의 절대성, 사랑의 영원함을 노래하는, 그 많고 많은 시들보다 임성구의 이런 시가 독자들에게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임성구 시인의 시에서는「오디」,「천주산의 봄」,「직박구리」,「산다화 피다 지다」,「달개비」,「야생화」,「질경이」,「탱자꽃」에서와 같이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 나타나기도 하고 「지금, 대숲에는」,「억새꽃」,「단풍무덤」,「삘기에게」,「무화과」에서와 같이 자연물을 통한 처절한 삶의 인식 같은 것이 읽혀진다. “별을 보고 칼을 받으며/ 퍼런 상처를 치유하였다”(「질경이」) , “살과 가죽은 뜯어 굶주린 새 먹이로 주고”(「조장(鳥葬)」), “피멍에 허우적대는/ 외로운 환생일지라도”(「촛불」), “수액 모두 빨아먹고 폐허가 된 공원처럼”(「셔틀콕」), “더 이상 울지 못하는 계절은 너무 슬프다”(「장마 3-매미의 허물」)에서처럼 시적 대상을 자신 위에 앉혀서 발효하려는 고뇌의 모습이 그의 시에서 느껴진다. “불면증 걸린 낮달이/ 울며 지샌 날들”(「퇴고」)의 시간이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한다면, “용암이/ 분출하는 시간/ 만선의 매화가”(「풍경 」) 시인의 가슴 속에, 그리고 독자의 눈에 활짝 피어나는 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3. 사백 년 썩지 않는 사랑의 상처 -박지현,『저물 무렵의 시』 조선중기 한 사내가 삽질 소리에 깨어났다 육척 장신 서른 한 해 사백 년에 둘러싸여서 망자의 가슴을 덮은 저, 혼절의 그 편지가 머리칼로 삼은 미투리 머리맡에 고이 얹고 속바지 치마, 장옷이며, 서러움도 함께 묻힌 손대면 화들짝 깰까, 저 오래된 선잠이 한갓 필부의 못 다 이룬 백년의 그 약속 어둠 뚫고 수줍은 듯 머리 조아리며 일어서는 허기진 저 삶의 기슭 배 한 척 띄워본다 이조백자 둥근 달이 첨탑 끝에 외로 뜨면 소한 대한 다 보낸 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 또한 잠든 사랑을 자분자분 깨워본다 - 「오래된 잠」전문 1998년 12월, 고성 이씨 문중 묘를 이장하던 중 미이라에 가까운 시신이 발견되었다. “육척 장신”의 건장한 체격에 턱수염이 단정한, 준수한 얼굴의 젊은이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말없이 누워 있었다. “손대면 화들짝 깰” 것만 같은, “저 오래된 선잠”을 자고 있는 청년은 조선 성종 때 안동의 무반가문의 이응태(李應台,1556~1586), 그의 나이는 31살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에게는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었고 아내의 뱃속에는 또 하나의 아기가 있었다. 건장한 젊은이는 갑자기 병이 들었고 아내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늘 천지신명께 기도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삼과 섞어 미투리(신발)를 삼았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속바지 치마, 장옷이며, 서러움도 함께 묻”은 아내는 “머리칼로 삼은 미투리 머리맡에 고이 얹”고 나서 천천히 붓을 움직여 “혼절의 편지”를 눈물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워니 아바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새도록 같이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 내 먼저 가시니잇고...이런 슬픔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꿈속에서 다시 보기를 바랍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나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 고 끝도 없어 대강만 적습니다...당신은 나의 마음 어떻게 가져갔나요. 또 나는 당신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1~2수가 서경이라면 3~4수는 후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3수의 종장, “허기진 저 삶의 기슭”에 띄워보는 “배 한 척”에서의 배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육체를 운반하는 것으로써 차안에서 피안, 즉 이승에서 저승으로 향하는 죽음의 배다. 따라서 화자가 띄워보려는 배는 실존을 초월하려는 욕망, 강이나 바다를 건너 다른 공간으로 가 닿으려는 욕망이고 금슬 좋기로 소문났다던 부부의 사랑에게로 가닿으려는 욕망이다. 이는 “나 또한 잠든 사랑을 자분자분 깨워본다”라는 마지막 수 종장에서 드러난다. 3수가 배를 통해 저 편으로 가 닿으려는 수평적 공간 지향이라면, 4수는 탑을 통한 수직적 공간 지향이다. 이조백자처럼 둥글게 뜬 달은 첨탑 끝에 외롭게 걸려있다. 첨탑은 정신적 고양이나 상승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사다리와 비슷한 의미로 읽혀진다. 화자는 이조시대 절절했던 사랑을 동경하면서 바라보는 “겨울의 끝자락”에 자신의 잠든 사랑도 조용히 깨워보는 것이다. 따라서 박지현의 이 시는 리얼리즘 시조의 역사성을 통해 독자와 기억의 공유를 지향하려는 시조로서 그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재개발 아파트 단지 반쯤 무너진 벽들 분홍색 색지들만 바람에 나부낍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곰팡이꽃만 피웠습니다 한땐 등 기대고 울타리가 되었던 비바람 눈보라를 묵묵히 끌어안고 쩍쩍쩍 금이 갑니다, 침묵의 오랜 날들이 대못에 박힌 자국 아직은 그대로인데 부서져 가루가 된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금가고 틈이 벌어져 벌레 하나 키웁니다 그때 마음속에 집 한 채 지었던 날 숱한 밤 허물고 또 세웠던 그 벽들이 못 박혀 벌어진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벽 2」전문 이 시에서의 공간은 “재개발 아파트 단지”이며 시인이 보여주는 상황은 “곰팡이꽃만” 피어있고 “쩍쩍쩍 금이” 가서 “반쯤 무너진 벽들”이다. 벽은 일정한 공간을 감싼다는 의미에서 보호를 의미하며 정신분석학의 경우 마을이나 집이 그렇듯이 보호의 존재, 즉 어머니를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벽이 금가고 무너진 상황은 서민들의 거주지, 그 삶의 근거지가 훼손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그들의 삶이 제약과 한계에 다다랐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숱한 밤 허물고 또 세웠던 그 벽들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너진 벽은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그때 마음속에 집 한 채 지었던 날”에서 암시되듯이 화자 자신의 힘겨운 삶을 동시에 드러내는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소멸해가는 것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는 화자 자신도 결국은 소멸해 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못 박혀 벌어진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는 일견 단순한 것 같지만, 삶을 통찰하는 예지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팔십 년 숱하게 새운 밤, 밤, 밤, 그 첫 밤이네”(「밤 까는 저녁」)와 같이 재치 있는 언어유희, “꾹 눌린, 그대 성감대 불뚝불뚝 서고 있다”(「힘- 꽃보기 7」)에서 볼 수 있는 과감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의 힘은 그의 시가 젊은 피로 들끓고 있음을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하다. “목덜미 물어뜯긴 얼룩말 거친 숨결/ 지하도 바닥 엎딘 노숙자 소매 끝이/ 끝없는 사바나 초원 구름 아래 잦아든다”(「세링게티 초원」), “병실 창가 몸 뉘이고 링거 줄에 내걸린 생/ 어머니 끝물 인생 하루해가 버거웠던/ 누군가 얼른 사갈까 꼭 붙들었던 그날처럼”(「떨이, 떨이」), “얼룩진/ 저 꽃핀 자리,/ 툭툭, 떨어져 눕는 오후”(「적막-꽃보기 6」)에서처럼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존재에 대한 따스한 시선, 소멸해 가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의 눈빛,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을 감싸 안으려는 모성성은 박지현의 시가 갖는 미덕이라고 하겠다. 4. 서정과 역사의 만남 -김종빈,『냉이꽃』 하루를 살라 하면 5월 한 날이 좋으리 한 줌의 맑은 눈물 유서로 쓴 시를 들고 은장도 가시를 품은 장미꽃으로 피어서 하루를 더 살라 하면 5월 그 날이 좋으리 달도 저는 망월동 남도의 힘줄로 열두 줄 가락을 매어 마디마디 뜯으며 -「5월」전문 김종빈의 시집에서는 가족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갈망과 함께 시대의식이 엿보인다. 이는 얼핏 보면 상반되는 시세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1980년 5월, 서슬 푸른 신군부의 군홧발에 무참하게 짓밟혀진 광주사람들, 그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5월 이전에 향유했던 것이 바로 따뜻한 가족공동체의 삶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두 가지의 세계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길이 양수리에서 합류되듯이 하나의 물줄기임을 알 수 있다. 그 두 세계가 융합하는 지점에 그의 시는 서있다. “문학의 본질은 사회 참여”라고 했던 샤르트르의 말처럼, 우리에게 1980년대만큼은 사회의식 없는 예술이 예술로서의 존재기반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빈의 이 시는 1980년대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 5월- 유서- 장미로 이어지는 1연에 이어 2연에서는 5월-망월동-가야금(열두 줄 가락)의 이미저리가 읽혀진다. “하루를 살라 하면” 5월 한 날을 택하겠다는 화자는 하루를 더 살라 해도 “5월 그 날”이 좋겠다고 한다. “유서로 쓴 시”와 함께 “가시를 품은/ 장미꽃”으로 피겠다고 한다. ‘은장도’는 호신용 칼로 자기 방어용이나 자결용의 칼이다. 바로 광주의 상황을 드러낸 시어가 바로 은장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가시를 품은/ 장미꽃”은 붉은 빛이 암시하는 정열, 심장, 희생 등을 의미한다. 즉, 광주의 민주화에 대한 정열과 꽃다운 희생을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시적 의미로 볼 때 “핏방울 지면/ 꽃잎이 먹고/...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고 노래했던 송욱의 시(「장미」)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달도 저는 망월동”은 망월동 공동묘지에 뜬 창백한 달빛이 떠올려지는 이미지다. “남도의 힘줄로” 화자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듯이 가야금 “열두 줄/ 가락을 매어 마디마디 뜯”겠다고 나직하게 토로한다. 그의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확인된다. 늘 먹는 밥 대신 슈퍼에서 빵을 샀다 유통기한 살피다 ‘0000. 5. 18.까지’ 주먹밥 소금반찬에 눈물 말아 먹었을 먹다가 목이 메어 생수 한 병 다 마셨다 물마저 얹혔는지 오후 내내 들끓는 속 빵 안에 으깨진 단팥, 탈이 난 그 핏빛 그렇게 나는 또 기호식품 하나 잃고 별이나 헤어볼까 이중의 창을 연다 물 어린 부연 별빛에 도로 눈을 감는다. -「빵」전문 슈퍼에 단팥빵을 사러간 화자는 그 빵의 유통기한이 우연하게도 ‘0000. 5. 18.까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빵에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화자가 떠올리는 그 날의 쓰라린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화자의 머릿속에는 “주먹밥 소금반찬에 눈물 말아 먹었을” 1980년이 떠오르고 “먹다가 목이 메어 생수 한 병 다 마”시고 만다. 그리고는 “빵 안에 으깨진 단팥”을 보며 그날의 핏빛 거리를 떠올리고 으깨져야만 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화자는 별을 보기 위해 “이중의 창”을 여는데, 여기서 ‘창’은 4각형의 형태임을 전제로 할 때 지상적 삶의 한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바깥세계를 뚫고 보는 개방적 의미와 일종의 벽이라는 차단적인 의미의 측면에서 이중의 창이란, 화자의 의식을 겹겹이 둘러싼 세계와의 소통 불가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화자는 이중의 창을 열지만, 끝내는 “물 어린 부연 별빛에 도로 눈을 감”아 버리고 만다. 세계와의 소통 불가능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화자가 즐겨먹는 단팥빵은 이렇게 화자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식품이 되어 버리는 데에서 그날의 상처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아직까지 존재하는지를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첫 남자로 오롯이 쌍떡잎 틔우고 싶다”(「냉이꽃」), “신음도 노래가 되는 조그만 돌이고 싶다”(「조약돌」)와 같은 시에서는 빛나는 서정이 돋보이며 “빈집 홀로 지키듯/ 신발 놓였던 자리”(「태종대-자살바위」), “잔자갈 밟히는 소리/ 이가는 소리/ 곱게 물든 산자락/강물에 뜬 거기”(「경호강에서」)와 같은 시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치열한 인식, 그리고 역사적 현장에 대한 증언이 읽혀진다. 김종빈의 시는 역사인식이나 치열한 삶의 인식에 도달했을 때 그 시가 스스로의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경적인 것으로 보이는 시에서도 그의 이러한 인식들은 돌산의 곳곳에 화약이 내장되어 있듯이 숨겨져 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더욱 심화, 확장하여 자신의 시가 닿아있는 도화선에 확실히 점화하기를 즐겁게 기다려본다. 5. 발열의 시간, 해열제의 시 -이정원,『39도 5부』 노을 진 땅거미에 낙타 울음 잦아드니 뒤척이는 나그네 맘 초승달이 비끼는데 명사산(鳴砂山) 숨어 우는 소리 이명으로 떠돈다. 바람에 베인 상처 밤만 되면 다시 도져 알알이 맺힌 슬픔 명치끝에 시려온다 새도록 글썽이던 눈물 못[沼]으로 고인 월아천. -「숨어 우는 모래 소리-돈황 명사산에서」 남북 5km, 면적이 25㎢에 이른다는 모래산인 명사산(鳴砂山)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래가 우는 산이다. 이곳에서 화자는 “낙타 울음”을 듣고 “초승달”을 본다. 실상 이 시에서 낙타와 화자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사막을 걷는 낙타에서 연상되듯이 낙타는 이 세계에서 소외된 존재로 문명의 이기를 벗어난 화자의 고단한 여행길을 드러내 주며. 기댈 곳 없는 고달픈 삶과 고난, 쇠약함과 불모의 삶을 암시한다. 그래서 명사산이 밤이면 “숨어 우는 소리”는 화자의 귀에 이명(耳鳴)이 되어 떠돌고 “바람에 베인 상처”가 “밤만 되면 다시 도져”오는 쓰라림을 느끼게 된다. 바람에 휩쓸린 모래구릉들이 스스로의 가슴에 패인 곳을 만들듯이 화자는 “알알이 맺힌 슬픔”에 명치끝이 시려오는 것이다. “뒤척이는 나그네 맘”에 비끼는 초승달은 실제 하늘에 뜬 초승달일 수도 있겠지만, ‘월아천(月牙泉)’이라는 호수의 모양이 초승달 모양임을 생각해보면 화자가 월아천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초승달에 대한 애절한 인식은 “다 못한 내 한 마디가 눈썹달로 뜨는 밤”(「초승달」)에서도 확인되지만, 명사산에 와서 보는 초승달은 더 절절한 생각을 낳게 했을 것이다. 사막에 호수라니. 물빛이 무척 맑아 마치 거울 같다는 월아천의 물은 둔황 남쪽에 솟아 있는 쿤룬산맥의 눈이 녹아 흘러내린 것이라고 한다. 사막에 있는 샘, 월아천은 사막이 “샘물을 가지고 우리 종교를 삼는 것이다.”(생떽쥐베리)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여 화자는 “새도록/ 글썽이던 눈물”이 고인 것 같은 월아천을 보며 “숨어 우는 모래소리”가 실은 명사산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이 모래처럼 부드럽게 허물어지면서 들려오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들숨도 열에 들떠 잉잉 귀에 울고 먼 별빛 한 끝을 따라 초야에서 숨죽이면 눈금은 한계선을 넘어 갈림길을 오간다. 가슴을 저며놓는 그렁이는 눈물 받아 소름처럼 돋아나는 그리움 너는 알까 사랑니 덧나는 밤을 몰래 품어 앓는가. -「39° 5′」 화자 자신의 실제체험일 가능성이 많고 “소름처럼 돋아나는 그리움”의 비유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 시는 이정원이 두 번째 시집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서정적 기류를 확실히 관통하고 있는 시다. 그의 발성법은 대화보다 독백이 더 어울리고, 내용에서도 타자와의 소통이나 외부세계와의 대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내면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데에 더 익숙한 듯하고 그것이 또 더 어울려 보인다. 39도 5부의 고열에 시달려 온몸이 불덩이 같을 때, 오히려 화자는 “먼 별빛 한 끝을 따라”가게 된다. 별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점에서 화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즉 별빛은 어둠의 힘과 맞서서 투쟁하는 정신의 힘이다. 이렇게 고열과 맞서 싸우려는 화자의 정신은 몇 번이고 “한계선을 넘어 갈림길을” 오가고, 화자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이 열병과 맞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맞서려는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한계선에서는 화자의 정신과 열병, 둘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다. 조지훈의 시(「병에게」)에서처럼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병은 떠나간다. 그래서 화자는 그리움마저 소름처럼 돋아나고 몰래 품어 앓았던 “사랑니 덧나는 밤”, 그 고열의 밤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홀로 붉어지는/ 목숨을 배운 후에// 단단히 빗장 거는 법/ 이렇게 익힙니다.// 수줍은 하현달 뒤로 점점이 지는 꽃잎”(「노을」), “가슴뼈 하나 잘라/ 명주실 매어 걸고// 마음에 촉(矢)을 달아/ 시위 크게 당기고 보니// 과녁이/ 내 심장임을/ 손 떠난 뒤 알았다.”(「욕심」)에서는 치열한 자기 응시를 단수로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이정원 시의 미학은 내면세계의 들여다봄에 의한 고백적 발성법이다. 6. 자신의 상처를 자가진단 하는 시
이상으로 네 시인들의 상처와 그들의 치유방식을 살펴보았으나 역시 그들의 숨어있는 상처를 찾아보려 했을 뿐 병명은 물론 환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 주체인 나와 객체인 나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체인 나는 물론 객체인 나조차 파악하려 하지 않고 오직 타인과의 상호성에만 몰두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내어 치유하려는 위 시인들의 시편들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아르튀르 랭보가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말했지만, 외부세계, 혹은 자기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를 찾아내어 자가진단하고 시를 통해 치유하려는 방식은 생채기에 대한 비망록이다. 위 네 시인들은 각자의 발성법으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 다시 랭보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이제 상처라는 “아름다움에게 인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첫댓글 이송희 시인이나 박성민 시인이 아니 더라도 어느 누구라나 임성구시인님의 시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감동을 안 받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5/30일 시집을 처음 선물 받고 오늘 3번째 읽고 이 댓글 올림니다. 왠만 하면 몇 페이지 읽고 덮어 버리는데, 읽을 수록 시 속으로 빠저드는 묘한 기분입니다. 사물을 보는 에리한 관찰력, 짧고 적절한 시어로 잘 숙성된 한 편의 시가 화자의 삶과 경험을 상상해 봅니다. 아무턴 나의 짧은 글로는 잘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건필 하세요. 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