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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1978) - 현기영 - |
[줄거리] |
서울 큰 회사의 부장 자리에 있는 나는 8년 만에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여하러 비행기로 고향 제주도 서촌으로 간다. 나는 일곱 살 때 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4 · 3 사건 전에 아버지는 경찰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버렸기에, 큰아버지 밑에서 사촌과 함께 자랐으며, 뭍으로 건너와 공부하고 직장을 얻고 그럭저럭 15여 년을 보냈다. 8년 만에 찾아간 고향, 제삿날이기에 친척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쉽게 확보된다. 그런데 그 친척 중에서 꼭 있어야 할 순이 삼촌이 눈에 띄질 않았다. 이 고장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풍속이 있는데, 순이 삼촌은 나이 많은 여인으로 불과 두 달 전까지 1년 간 나의 서울 집에서 식모처럼 밥을 짓고 집을 봐주다가 어느 날 문득 내려간 터인데 그새 죽었던 것이다. 순이 삼촌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야기는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나의 집에 와 있을 적의 순이 삼촌의 여러 기행(奇行)이 차례차례 밝혀진다. 아무도 탓하지 않는데도 밥을 많이 먹는 식모라고 하여 자기를 흉본다고 화를 내고, 심지어는 생선 구운 석쇠까지 방 안으로 가져와 생선 부서진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님을 하나 하나 입증하는 결벽증을 보이는데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이었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출가한 딸이 있으나 순이 삼촌은 혼자 살았다)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이런 기행이 모두 환청 때문임이 판명된다. 있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우기는 이런 신경 장애의 원인을 차곡차곡 살펴 나가면, 1948년의 제주도 4 · 3사건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여 년 전 그 해 음력 섣달 열드렛날, 그날은 유달리 바람 끝이 맵고 시린 날이었다. 별안간 밖에서 연설 들으러 나오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보통 때와 달리 군인들의 수십 명 퍼져 다니면서 재촉하였다. 군인들 가족과 순경 가족, 이어서 공무원 가족이 나머지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별안간 불이 났다고 소리쳤다. 마을엔 삽시간에 무서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요하는 마을 사람들을 군인들은 총으로 위협했다.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돼지 몰듯 하여 우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차례 차례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작전 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대부분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제주도 부락민들이 5 · 10선거 때 몇몇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부화뇌동되어 선거를 보이콧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밤에는 폭도에 쫓기고 낮에는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 결국은 할 수 없이 굴 속으로 도피를 했던 것이다. 순이 삼촌도 행방을 알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도피자들 틈에 끼어 있다가 우리 할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오누이 자식을 데리러 내려 왔다가 그만 화를 당한 것이다. 군경측의 무리한 작전과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마을을 태우는 불빛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 사람들은 한길을 피해 모두 교실로 몰려 들어가 불안한 밤을 새웠는데, 밤중에 우리들은 두 번 크게 놀란다. 한 번은 대밭이 타면서 터지는 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 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 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총살을 당하기 전에 기절을 한 상태여서 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 사건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순이 삼촌 만큼 그날의 상처가 깊은 사람은 없었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달 전에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 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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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성격] |
순이 삼촌 → 섣달 열드렛날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신경 쇠약과 환청에 시달리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소박한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 고모부 →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섣달 열드렛날의 비극을 시국 탓으로 돌리고 숨기려 함. 현재는 도청 주사로 있으면서 밀감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물. 길수형 →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섣달 열드렛날의 비극을 겪은 인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인물. 나 → 작중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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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단계] |
발단 : 나의 귀향과 순이 삼촌의 죽음을 알게 됨. 전개 : 순이 삼촌의 평탄치 못했던 서울 생활 위기 : 섣달 열드렛날의 일을 회상함. 절정 :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순이 삼촌 결말 : 순이 삼촌의 고통의 세월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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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감상] |
◈ 이 작품은 1949년 1월 16일 제주도의 동쪽 마을 북촌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군인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된 소위 '북촌리 사건'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 작가의 체험을 함께 섞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이다.
◈ 이 작품에서 현기영은 군인의 대양민 학살의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여 그 참혹상을 고발함과 동시에, 이 학살의 와중에 극적으로 생존한 순이 삼촌의 정신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4 · 3 사건'의 여파가 지금까지 제주도민에게 어떠한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름없는 다수의 사람들, 짓밟히면서도 왜 짓밟히고 있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작가가 대신 아파하고 분노의 목소리로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에서 마을 사람들은 밤에는 폭도들에게 입산하지 않는 자는 빨갱이라는 논리하에 대창에 찔려 죽고, 낮에는 약탈당하지 않은 집은 좌익 동조자라고 해서 취조를 당했다. 이런 흑백 논리 속에서 마을 소각이라는 참상이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비극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4 · 3 사건의 고발이라는 작품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4 · 3 사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보여 주지 않고 있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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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사항 정리] |
▶ 갈래 : 중편소설, 액자소설, 사실주의 소설 ▶ 배경 : 시간적 → 액자 내부(1949년 겨울), 액자 외부(30년이 지난 현재) 공간적 → 제주도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특징 : 사투리를 사용하여 사실성을 확보함. 4 · 3 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잘못된 역사에 대한 고발정신이 반영됨. 내용상 액자소설로, 내부 액자와 외부 액자의 교차로 구성됨. ▶ 주제 ⇒ 섣달 열드렛날의 비극과 순이 삼촌의 황폐화된 삶 ▶ 출전 : 창작과 비평 가을호(1979. 9) |
[생각해 볼 문제] |
1. 이 작품은 제주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4 · 3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소설화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말해 보자. ⇒ 한 3백 명 되는 좌익의 '무장 폭도'를 사냥한다는 목적으로 5만여 명의 양민까지 학살한 그 엄청난 사건을 기나긴 은폐의 장막을 걷어내고 폭로, 고발해 낸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미친 역사'에 의해, 좌익 폭도와 토벌대 양자의 틈새에 끼여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양민'들, 그 억울한 사연을 고발해 낸 정신은 문학이 중요하게 짊어져야 할 의무 중 하나이다.
2.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역사 이해에 대해 비판해 보자 ⇒ 이 작품 속에는 '고발 정신' 속에는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려는 정신만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양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은 토벌대만이 아니라, 그 계기를 제공한 '폭도'들에게도 돌려지고 있으며, 섬사람과 육지사람들 간의 감정 대립을 그 원인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야말로 지방 간의 대립 관계로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배후에 또 다른 사회관계가 가로 놓여 있는지는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는 그 작업이 결여된 가운데 지역 간 대립을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 작품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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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 봅시다] |
[ 4 · 3 사건에 대해 ] 1948년 4월 3일 제주 전역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 8 · 15 광복 직후의 혼란기를 틈타 남조선 노동당은 제주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제주인민해방군은 일본군이 숨겨놓은 무기와 화약을 찾아내어 무장을 하고 유격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 투쟁을 벌이던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 및 우익단체의 무차별한 테러가 극심하여 도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 출신의 경찰관들이 제주에 파견되자 이를 계기로 좌익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반미 · 반경찰 · 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 봉기를 주도하며,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군정청은 경찰병력을 제주에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약 9만 명의 이재민과 엄청난 재산 피해 ·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도에서는 5 · 10선거를 치르지 못하였다. 비록 이 사건은 발발 1년 만인 1949년 5월 일단 종결되었으나, 봉기의 여파로 인한 완전 진압은 6 · 25전쟁을 거쳐 1954년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