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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8일
898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898번째 촛불집회
일요일 저녁 7시 30분 김천역 광장에서 평화촛불집회가 열렸다.
-오늘의 사회자 장재호-
- 의례 및 묵념 -
1. 이동욱 공동위원장 발언
제가 개인적인 일이 있어 한동안 김천역 광장에 못나왔다. 계속되는 집회를 온라인으로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지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현재 나라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어떻게 일본에 강제징용 당한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국내 기업들이 모금을 하여 지급을 하려고 하는가? 당사자들은 지금 그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사죄 후 배상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현재 강제징용한 사실이 없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강제집행 위법성을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통령이 우리 기업들 모금을 추진하고 있다. 말이 안된다. 정상적이지 않는 대통령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대통령 탄핵 집회가 매주 주말에 열리고 있다. 우리도 이 집회에 참석을 해야할 것 같다.
다음주부터 한미일 군사연습한다고 한다. 우리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면 안된다. 어떤일이 있어도 안된다. 정말 많이 답답하다. 우리는 사드빼는 이 집회 계속해야 한다. 성주 소성리도 정말 열심히 한다. 성주는 앞에서 투쟁을 이끌고, 우리 김천은 뒤에서 밀어주는 그런 투쟁 하자.
2. 강현욱 교무 발언
제가 최근 결혼을 했다.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원불교 교무 직업은 남편으로서 매력적이지 않다. 집에 자주가지 못한다. 돈도 많이 벌어주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소성리에서 투쟁을 오랜시간 해왔는데, 이에 아내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처음 만났다. 이 인연은 성주와 김천이 만들어준 것이기에 고맙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축복을 해주어서 감사하고 죄송할 뿐이었다. 축복해준만큼 깊은 투쟁으로 보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천 촛불집회는 자주 올 예정이다. 정말 감사하다.
3. 정진석 파수꾼 노래
오늘도 노래를 준비하여 김천 촛불 시민들을 위로한다.
파수꾼의 노래에는 슬픔과 희망이 교차한다.
4. 박석민 자문위원 발언
오늘 평화이야기는 한반도비핵화 관련 내용이지, 그전에 최근 윤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이 쟁점이 돼서 과 그 얘기를 먼저 해볼까하는데, 지난 목요일 소성리 평화행동때 말씀드려서 이미 들으신분도 계셔요. 그래도 오늘 김천 촛불에서도 현재 주요 현안 얘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진행해볼까요?
지난 3월 6일, 한국에서는 두가지 사고가 있었어요. 하나는 윤석열정부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완전히 무시하는 강제징용 문제 해법을 내놓아서 난리가 난 상태고요. 경칩날이라 개구리들이 나왔다가 도로 들어간거... 윤석열 때문에 한국땅에서는 못살겠다고 도로 땅속으로 들어갔대요. 1년전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뫼시고 사는 게 힘들꺼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힘드네요... 혹시 누구든 개구리 만나거든 사드 철거, 평화투쟁하는 우리를 믿고 같이 살아보자고 전해주세요..
대통령 자리는 하나님이 점지한다고도 하던데, 기독교 신자께는 죄송하지만 하나님이 큰 실수를 하신게 맞습니다. 2300여년전 플라톤은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가장 저질스러운 정치인에게 지배당한다.”고 했고, 루소도 “국민은 투표하는 날만 주인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산다.”고 했습니다. 국민의힘 당대표는 예상대로 김기현이 되고 안철수는 이름과 달리 또 철수, 공천이나 주십사 사정하는 처지가 됐고, 집권여당은 윤석열 직할체제로 바뀐대다 정부 고위직에 검사 출신이 70명이나 돼서 대한민국은 검사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은 시키는대로 안하면 탄압만 남은 기괴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윤석열씨는 주로 해외 나가서 사고를 치셨지요. 유엔에 가서 뜬금없는 자유민주 이야기로 많은 나라 정상이 자리를 뜨게 만드시고, 영국 가서는 제대로 조문도 못하시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처음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때는 국제 현안이 산적한데도 “가서 얼굴이나 익히겠다는 철딱서니 없는 발언으로 천박함을 드러내고, 김건희는 비선을 데리고 가서 부부가 합심해서 지지율 까먹으시더니... 미국에 가서는 그 짧는 정상회담후 윤석열 똘만이들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전국민 청력시험이나 한 것도 모자라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세계 변화에 준비를 안해서 국권 잃고 고통받았다“고 국민들을 야단치시더니 한일간 주요 갈등인 강제징용 문제를 기왕 해결할꺼 속시원하게 환영하게 해결하겠다고 나서, 일본은 물론 바이든에게도 화끈하게 칭찬 받으신 우리 윤대통령을 어찌할끄나요??
윤석열 정부는 1년도 안돼서 나라를 많이도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미국이 시키는대로 우리나라 반도체 미국에 바친 결과 지금 삼성 반도체 재고 쌓인게 1년치 생산량이고, 경제 침체로 국민 모두가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번엔 국민의 최소한의 자존심까지 팔아먹는 강제징용 해결 방안을 냅다 던졌는데, 보수 원로들조차 반대했다는 해결 방안 내용은 한국 기업의 기부금으로 소위 ‘제3자 변제’를 하겠다는 게 주요 골자로, 이는 ‘일제의 강점과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헌법 정신과 전범 기업들은 강제동원과 강제노역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는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윤정부의 입장인데, 대법원 판결을 완전 무시하면서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말하며 국민들을 겁박하는 우리 대통령은 미국 요구과 일본 앞에서는 자꾸만 작아지는 모양입니다. 일본이야 대환영이지요. 아무것도 안해도 한국 윤석열 정부가 징용 문제를 셀프로 해결해주신 덕에 일본 외무장관은 엊그제 중의원 회의에서 ”강제징용“ 표현이 맞냐는 일본 의원들의 질문에 ”강제성은 없었다“고 뻔뻔히 답변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해 2015년 박근혜의 ‘위안부 야합’보다도 더 퇴행으로 한일관계 해결 방안중 역대 최악입니다. 이제 일본은 한국을 더 만만히 보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2014), 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와 행사(2022)에 들어가 군국주의적 팽창과 한반도 재침탈 야욕에 불을 붙여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 나쁜놈은 바이든으로 기다렸다는듯이 곧바로 "가장 가까운 동맹 간 협력·파트너십의 획기적 새 장"이라고 윤석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나 강제징용 문제 해결 모두 미국이 바라는 것으로 한일 과거사 문제의 봉합과 졸속 처리를 통한 한일동맹 구축으로 대중국 대결에 한국을 동원하려는 미국의 속셈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윤석열은 역대 누구보다 확실한 미국의 꼬붕으로 나서 나라를 확실하게 팔아먹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이 독일과 달리 절대 사과하지 않고 피해 배상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미국이 주도해서 전범국 일본 처리를 결정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입니다. 1951년 48개국이 참가, 서명한 이 조약으로 성립된 국제 질서를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부릅니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추동한 미국은 중국 본토에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냉전과 반공의 최전선에 일본을 세우기로 하고 전후 처리 조약을 체결했는데, 전범국 독일이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과 각국에 배상하도록 한 것과 달리 일본은 전쟁범죄 책임을 묻지 않고 배상도 면죄해주었을 뿐 아니라 같은 날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해 일본의전전쟁범죄에 대해 처벌은커녕 갑자기 미국과 동맹국이 되어 전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누리게 되는 이상한 혜택을 누리게 된 겁니다. 전범국 독일은 전쟁후 분단되었는데,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닌 한국이 분단되는 이상한 결과로 한국이 참여하면 북한도 참여한다는 논리와 대만과 본토로 나뉜 중국은 대표성 문제를 제기해 가장 큰 피해국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은 48개국이 서명한 조약에 참여조차 못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동아시아 질서를 규율하는 틀이 돼 일본 지배로 고통 받았던 한국을 오히려 옥죄고 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체결된 1965년 박정희가 맺은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모든 배상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 영토문제 역시 독도가 빠지면서 지금도 일본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조약에 대해 캐나다 워터루대학 일본 학자인 하라 교수는 미국이 냉전 전략에 따라 독도나 중국과 일본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섬들을 의도적으로 일부러 남겨 놓아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을 부채질하고 ‘분할 지배’에 이용했다고 말했습니다.
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시작된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갔던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문제는 단순한 피해 보상의 문제가 아닌 일본의 식민 지배 공식 사과와 전쟁범죄 인정, 나아가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봉쇄했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위상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만든 기형적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동의 질서를 세워갈 투쟁임에도, 박근혜, 윤석열 이 두 인간이 역사를 덮고 미국의 종노릇으로 일본과 손잡고 미래로 가자고 한 것인데 이게 동의가 되시나요? 지금 쟁점인 강제징용 윤석열의 해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살펴봤고, 이제 준비한 영상을 보고, 한반도비핵화 이야기를 오늘은 짧게 이야기하고, 이후 두번에 나누어 이야기 하겠습니다.
1991년 9월27일 오후 8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소련의 상응 조처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세계 각지에 배치된 미국의 지상·해상 발사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북한은 바로 다음날 “미국이 실지로 남조선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게 되면 우리의 핵담보협정 체결의 길도 열리게 될 것”이라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화답했는데, 이같이 부시의 발표는 1990년대초 탈냉전 시기 남-북, 한-미, 북-미 양자관계에 연쇄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부시가 이런 발표를 한 직접적 원인은 3일 천하로 끝난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흑해 연안 크림반도 포로스별장에 50시간 동안 감금한 사건은 휘청이던 소련을 연방 해체의 낭떠러지로 떠민 결정타가 됐는데, 미국은 이런 소련의 정세 불안으로 핵무기가 ‘불량국가’ 등에 흘러드는 악몽을 막기 위해 ‘전술핵무기 일방 철수’ 카드를 꺼내 든 것으로 이에 고르바초프도 10월5일, “전술핵무기 폐기를 포함한 광범위한 감축 조처를 취하겠다”고 화답했습니다.
‘세계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와 별도로 한반도 관련 ‘극비 명령’도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40개 남짓한 포병용 더블유(W)-33 포탄과 함정용 전술핵무기는 물론, 군산 공군기지의 에프(F)-16기에 장착한 60여기의 비(B)-61 핵탄두를 제거·철수가 그 명령인데, 알짜 핵전력까지 철수 명령을 한건 ‘북의 우호적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유인책이었습니다.
북은 1991년 4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긴급제안’이라며,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에 관한 선언(초안)’을 내놨는데, 그 이전 회담에서 북은 핵을 언급하지 않았고, 남도 회담이 깨질까봐 핵 언급은 아예 하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연형묵의 4차 회담 발언은,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회담 전략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은 조금 전 영상에서 본 것처럼 노태우가 밝힌 ‘한반도 비핵화 등에 관한 공동선언(초안)’을 ‘긴급제안’으로 제시해 북의 핵문제 회담 의제화 전략에 적극 호응한 시점은 1991년 12월10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회담 첫날 전체회의였습니다.
노태우 정부가 4차 회담부터 ‘핵문제’를 의제로 다룬 것은 “요청”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미국의 집요한 압박 때문으로 폴 울포위츠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1991년 5월10~12일), 로널드 리먼 국무부 군축처장(1991년 6월4~6일) 등이 잇따라 방한해 ‘재처리시설 포기 확약’ 등 핵문제를 남북고위급회담 의제로 다루라고 압박했습니다. 이렇듯 미국 부시의 ‘전술핵무기 철수’ 명령과 4~5차 고위급회담 때 남북의 회담 등으로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 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반도의 평화, 평화협정 체결 과제는 한반도비핵화와 그 궤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평화이야기는 한겨레 이제훈 기자가 2년여 동안 기고한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고 있는데, 당시 상황을 이제훈 기자는 ‘북핵문제’는 미국이 한반도에 심어놓은 트로이 목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핵"문제로 북은 물론 남도 억압하고 지배하는 기제로 사용해왔기 때문입니다.
남북은 5차 고위급회담 직후 ‘핵문제 협의 대표접촉’(1991년 12월26·28·31일, 판문점)을 벌였고, 12월31일 3차 접촉 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함으로써 91년 유엔 동시·분리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91년은 한반도 평화 정세는 숨가쁘게 몰아쳤습니다. 오늘은 한반도비핵화선언 채택 과정을 말씀드렸는데, 다음에는 한반도비핵화선언 내용 문제와 함께 현재 진행중인 핵 문제를 두 번에 나눠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있었던 역사를 돌아보면, 1948년 3/12 유엔한국위원회 가능지역 선거안 표결(찬성4 반대2 기권2)로 미국이 유엔을 내세워 남북 분단을 밀어붙였고요. 1947년에는 트루먼독트린을 발표, 공산주의 확대를 막고, 경제적 원조 늘리기로 해 이후 마샬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만들어져 미소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이야기로는 1956년 우마차조합에서 우마차 800대 동원해 이승만대통령 재출마 요구 우의마의(牛意馬意)시위를 한날로 그때 나온 말이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건 소하고 말밖에 없다.”였습니다. 3/12 오늘은 1993년 북, 1985년 가입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 준전시상태 돌입, IAEA의 특별핵사찰 요구에 맞서 나라의 최고이익 지키기 위해 탈퇴한다고 주장한날로 다음번 얘기 주제이기도 합니다.
5. 라희와 지희 무대
6. 무대 옆과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