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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4장. 좋아요, 원해요, 필요해요
정책 공약이라고는 인종주의와 편견밖에 없는 듯한 사람들이 정치판의 주요 인물이자 선거와 정책에 막중한 영향력을 미치는 핵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는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얼마나 강한지가 도널드 트럼프 지지 여부를 매우 잘 예측해 주는 변수였다.
(선호 Preference) 선호는 각각의 장단점을 모르는 채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알아야 할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이다. 누군가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잘못된 ‘선호’를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정책적 선택은 선호가 무엇을 반영하는지 또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경제 성장의 한계, 불평등의 고통, 환경 보호의 비용과 편익 등의 주제들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사회가 이러한 욕망들에 어떻게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대체로 주류 경제학자들은 ‘우리는 사람들이 올바른 정보를 가질 수 있도록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지는 오로지 그들 자신만이 결정할 문제’라고 본다.
빈곤층에게 현금 보조를 하기보다 푸드 스탬프를 지급하는 것은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령 정책결정자)가 알고 있다는 가정을 근거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텔레비전이 식품보다 중요하다” 또한 주류 경제학자들은 선호가 ‘합리적’일 뿐 아니라 ‘안정적’이라고 가정함. 즉 그들에 따르면 선호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단순한 집합 순응의 행위(사람 많은 곳에 줄서기)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나보다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각 개인이 합리적으로 내린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 군중 행동은 ‘정보 폭포’현상을 낳는다. 처음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토대가 된 정보가 이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 최근 실험에서 첫 번째 사람 단 한 명의 무작위적 행동으로도 그러한 폭포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줌.
(집합 행동) 사회적 규범을 고수하는 행동의 핵심은 규범을 깨면 공동체의 다른 일원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된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 알프스의 치즈 생산자들은 공동 소유인 목초지에서 소를 방목. 이 경우 집합적 소유권 체제가 사적 소유권 체제보다 모든 사람에게 더 득이됨. 많은 개도국에서 토지의 일부가 늘 공동 소유 형태로 존재했던 이유.
카스트 간의 통합이라는 면에서 보면 인도의 역사는 꽤 성공적. 전통적으로 불리한 처지였던 계층(지정 카스트와 지정 부족)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1983년 35%에서 2004년에는 29%로 줄어듬. 이는 미국에서 비슷한 기간동안 흑인과 백인 사이의 임금 격차가 줄어든 것보다 더 많이 줄어든 것. 원인중 하나인 도시화는 사람들에게 익명성을 제공하고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조밀한 유대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줄여줌으로써 서로 다른 카스트의 사람들이 만나고 섞일 수 있는 여지를 넗혀줌.
그럼에도 여전히 대략 절반의 마을에서는 달리트(최하층 카스트) 사람들이 우유를 팔수 없고 상류 카스트 사람들이 낮은 카스트 사람들의 경제적 성공을 자신의 계층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례도 발생. 전통의 이름으로 법을 위배하는 사례-차티스가르주의 판차야트(마을의 카스트 위원회)에서 14세 소녀에 대한 65세 남성의 강간 사건
(흑인과 이민자) 2019년 인도에서 하층 카스트 출신 대통령과 총리가 나온 것은 45년전의 ‘미국의 흑인 대통령’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 교육수준이 비슷한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 사이의 소득격차는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는 거의 30%에 달함. 이는 인도의 ‘지정 카스트’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임금 격차보다도 큰 것.
2016년 대선 이래 미국에서 지배적인 이슈로 부상한 것은 흑인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흥미로운 사실은 이민자가 적은 주일수록 적대감이 높음(와이오밍, 앨라배마,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아칸소 등) 많이 접해 보지 못하면 자신이 본적이 거의 없는 집단의 사람들을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되기 쉬워서인 듯함. 반이민자 단체에 대한 기부금 실험-비밀 보장vs결정 확인. 2016년 이전에는 54%vs34% 그러나 2016년 이후에는 차이가 없어짐
(통계적 차별) 우리는 과거에 배척했던 ‘적’과 결국에는 화합한 경험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도 왜 늘 새로운 적을 또 찾아내려 하는 것일까? 1.타 집단에 대한 폭력의 기저에 경제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인도에서 1995~2000년 사이에 벌어진 힌두-무슬림 간 폭력사태 2.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불관용과 편견을 겉으로 내보여야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경우 3.통계적 차별의 메커니즘-미국 경찰이 흑인 운전자를 더 자주 세우는 것.
이력서에 범죄 이력을 적는 칸을 없애게 한 밴더박스Ban the Box BTB 정책이 흑인 남성 실업률에 미치는 영향-BTB 정책 전후에 가짜 온라인 지원서 1만5천장에 전형적인 백인 이름과 흑인 이름 사용. BTB 정책 전에 범죄 이력이 없는 지원자가 통과 가능성이 62% 높음. 이는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비슷. BTB 정책 후에 통과하는 사람의 비중이 인종별로 더 큰 격차를 나타냄. BTB 도입전 백인 지원자가 흑인지원자 보다 7% 높았는데 BTB 도입후 이 격차가 43%로 증가함. 개개인의 범죄 이력에 대한 실제 정보를 얻을수 없게 되자 고용주들이 (통계적 사실에 기초해서) 모든 흑인 지원자가 범죄 이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하게 된 것.
(자기 차별) 스스로가 자신의 집단을 차별하는 현상. 흑인학생과 백인학생 사이의 ‘실험용 문제풀기 과제’vs ‘지능 테스트’ 많은 경우에 자기 차별은 자기 강화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고 다시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더 의심하게 만든다. 반대로 자기실현적 예언이 강력한 효과를 발한다는 점도 수많은 다른 실험에서 드러남.
자기실현적 예언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은 언제나 전통적으로 불리한 사회집단이었던 사람들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흑인과 백인의 골프 실험-첫 실험에서 “일반적인 스포츠 능력” 인종을 표시한 집단vs표시하지 않은 집단 두번째 실험에선 “타고난 운동 신경”vs “스포츠 지능”
이러한 실증 근거들은 베커와 스티글러가 말한 ‘일관되고 안정적인 선호 체계’라는 개념과 합치시키는 쉽지 않다. 또한 선호에는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서 물건을 살까에 대한 선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어울릴까’에 대한 선호도 있다. 비우수반 학생들은 자신들이 학원에 다니는 걸 비밀에 부칠경우 공개될 경우보다 11% 높아짐. 비우수반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친구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것으로 보임.
(사회적 맥락) 은행가들을 대상으로한 실험. 각자 집에서 동전 10회 던지고 앞면이 일정 횟수 이상시 횟수당 20스위스 프랑 제공. 참가자들이 결과를 속이고자 하는 강한 경제적 인센티브. 실험전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 vs “은행가로서 하는 업무” 질문 제시. 전자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후자는 ‘은행가’로서의 정체성을 상기. 실험 결과 은행가로서의 정체성을 상기했던 사람들의 동전의 앞면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나왔다는 답변. 속임수를 쓴 사람의 비율이 전자의 경우 3%, 후자의 경우 16% 정도로 추산됨
사람은 각각 다른 선호체계를 가진 여러 개의 인성을 가지고 있고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인성이 선택되는지는 맥락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수 있음.
(동기부여된 믿음)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감정적인 ‘필요’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믿음에 감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왜곡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가령 우리는 이민자 수용 시설에서 아이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한 뉴스를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한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정부를 내가 지지했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싫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싫기 때문에 타 집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 들때면 그들에게서 비난거리를 찾아내서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적 반응으로 시작된 생각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탄탄한 논리와 근거로 뒷받침된 주장처럼 재구성된다. 이 시점이 되면 내 견해와 불일치하는 어떤 의견에 대해서도 내 견해의 도덕적, 지적 타당성을 의심하는 도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믿기에는 내 견해가 매우 탄탄하게 뒷받침된 것이니만큼 마음 놓고 상대에 대해 폭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사실 확인’이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는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왜 그렇게 영향력이 없는지 설명해준다.
(일관된 자의성) 사람들은 자신의 핵심가치를 바꾸도록 압박하는 증거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매우 노력한다. 그러한 핵심가치가 자아에 대한 견해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핵심가치가 애초에 그리 사려 깊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대니얼 카너먼의 머그컵과 펜에 대한 실험. 팔고 싶은 가격이 사고 싶은 가격보다 훨씬 높음. 와인과 책을 살수 있는 경매 실험. 사회보장번호 끝두자리가 그 상품 가격이라 상상. 사회보장번호가 80 이상으로 끝나는 학생들이 20 이하로 학생보다 200~350% 더 비싸게 응찰.
‘사회적 선호’ 즉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갖는 선호에서도 위와 비슷한 자의성을 볼수있다. 자의적으로 집단을 나누고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발생한다. 르완다가 벨기에 식민지이던 시절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은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우월하다는 신화를 만들었다. 이는 식민통치에 협력할 현지인 지배 계층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식민 통치가 끝난 후에도 투치족은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믿음을 계속 유지했고 이에 후투족은 분노했으며 이는 1994년 끔찍한 인종 학살로 이어졌다.(50만명 학살)
(동종 선호) 우리가 누구와 어울리는지가 우리의 선호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사회적 분열은 특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이 분열을 가로지르는 혼합이 매우 드물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동종 선호는 규모가 큰 집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자신의 집단에 대한 ‘온건한 선호’만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집단을 넘어서서 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게 된다. 온건한 선호는 외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서 나오는 것도 아님. 인도 출신이 아비지트와 파키스탄 출신 사람들과의 교류
미국에서 타 인종간에 결혼하는 경우는 여섯 쌍중 한쌍에 불과함. 인도 최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4%가 결혼은 동일한 카스트 내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우리도 결혼은 비슷한 집안 끼리?)
(반향실과 홀로그램) 이러한 행동은 의도치 않게, 그리고 대체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명백하게 기이한 선호나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가 더 강화되기 쉽다. 자신과 비슷한 견해에만 고착되는 것의 분명한 단점 하나는 다른 견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차단된다는 것이다. 백신이 자폐를 유발하는지, 오바마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처럼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심지어 명백하게 각자의 취향 문제인 것도 그렇다. 이를 반향실echo chamber이라 표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메아리가 되어서 자기들끼리의 말만 듣는 와중에 견해가 점점 더 극단적인 쪽으로 고착되는 것을 일컫는다.
반향실 효과의 악영향중 하나는 객관적인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주제에서마저 견해가 양극화된다는 것이다. 미국인중 41%가 인간행위가 기후 온난화의 원인이라고 믿지만 기후 온난화가 자연적인 순환과정이라거나(21%) 기후 온난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20%) 사람도 그만큼 많다. GMO 식품이 건강엔 해롭지 않다는 사실은 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합의된 바이지만 민주당 지지자의 대부분은 GMO가 해롭다고 생각하고 GMO 함유 식품 표기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건강에 해롭지 않다는게 충분히 검토된 것일까?)
이러한 패쇄성은 노련한 정치인들이 집단마다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내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2014년 선거에서 압승해 인도 총리가 된 나렌드라 모디는 실물 크기의 3차원 홀로그램을 이용해 여러 유세장에서 동시다발로 연설했는데 많은 유권자들이 그것을 실제로 여겼음.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도 하나 이상의 장소에서 동시다발로 존재할 수 있었다. 도시 젊은 층, 중산층, 상류 카스트, 이 세집단은 충분히 분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미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와 이미지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공론장?) 1960년에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서로 다른 정당 사람과 결혼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라는 비율이 약 5%. 2010년에는 공화당 지지자의 약 50%, 민주당 지지자의 30% 이상으로 변화됨. 이러한 양극화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가 경험한 가장 중요한 변화중 하나는 인터넷의 팽창과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인 확산이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처음 등장했을 때 다양한 연결을 촉진시켜 동류의식의 고착화를 줄여 줄 새로운 공론장이 될 것으로 각광받음.
하지만 현재로서 소셜 네트워크는 분열된 이슈에 대해 사용자들을 통합하는데 실패했다. 트위터 사용자중 정치 고관여층(2012년 선거기간중 미국 하원위원 후보중 적어도 한명과 연결된 사람으로 정의)인 220만명에 대한 9,000만건 연결 분석 결과, 보수적인 사용자는 팔로워의 84%가 보수적인 사용자이고 진보적인 사용자는 69% 즉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반향실 노릇을 한다. 낚시에 대해 수다를 떨때도 사람들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신문 또한 늘 매우 당파적이다. 르완다의 인종 학살 직전과 인종 학살 도중에 한 방송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면서 박멸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 방송의 프로파간다는 투치족 학살의 약 10% 5만명 목숨에 해당하는 책임이 있는것으로 추산.
온라인 사용자들 사이에서 견해의 극단화가 증가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극단화는 1996년 이래 모든 인구 집단에서 증가했지만 온라인을 가장 덜 사용할 법한 65세 이상에서 가장 크게 증가했고 젊은층(18~39세) 사이에서 가장 적게 증가했다. 2008년 폭스 뉴스 시청자중 60% 정도가 공화당 지지자 이 수치는 2008~2012년 사이 70%로 증가.
(반사회적인 소셜(사회적) 네트워킹) 종종 인터넷은 전통 매체가 곧 이어 받아서 보도할 루머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원천 노릇을 한다. 노년층이 폭스 뉴스에서 루머 기사를 볼 때 사실 그것의 원천은 인터넷일 수 있다. 젊은층은 인터넷에 오류와 과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감안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반면 노인층은 TV 앵커의 권위를 신뢰하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루머를 더 잘 믿을수 있다.
뉴스가 유통되는 주된 장의 기능을 소셜 미디어가 하게 되면 신뢰할 만한 기사와 논평의 생산이 크게 위축될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의 경우 온라인 뉴스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콘텐츠의 55%가 ‘오려다 붙인cut and paste’ 콘텐츠이며 출처가 명기된 것은 그중 5% 미만. 미국에서 저널리스트 수가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님(2007년 5만7천명에서 2015년 3만3천으로)
인터넷이 무한한 반복을 허용한다는 점도 견해가 극단화 양극화되는데 일조함. 반향실의 문제는 단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콘텐츠에만 노출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에 하루종일 무한히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점도 문제다. 무한한 반복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으며 기사의 진위를 확인하거나 확산을 멈추기가 어려워진다.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이미 사안이 단순화 선명화되고 극단적인 견해가 고착화된 것을 교정하지 못한다.(멕시코 이민자들의 비난 이야기만 기억나지 실제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태어난 현지인들보다 범죄자 비중이 훨씬 적다는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
자동 맞춤화(알고리즘) 또한 우려스러운데 사용자가 자신이 읽을 것을 직접 선택할 때는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만 자동 맟춤화에서는 그 인식마저 사라진다. 입맛에 맞는 기사를 직접 골라서 읽을 때는 비록 편향적으로 고르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읽고 있는 기사가 편향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실험. 원하는 뉴스매체 선택vs무작위로 선택된 기사 받음. 흥미롭게도 매체를 직접 선택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더 많이 중도적으로 조정함. 선호에 따라 매체를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 사람들은 당파적 편향을 덜 갖게 되었음. 자신이 택한 매체가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 편향을 교정했고 사실정보에 대해서는 기사내용을 더 잘 받아들였다.(맞는 해석인가?)
(함께 섞이기) 상대편이 집권할 가능성을 지지자들이 몹시 우려하는 한, 승리자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경제적 사회적 혜택을 가져다줄 필요가 없다. 정치인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서 공포심에 불을 지피는데 매진한다. 극단적으로 분열된 현재의 분위기에서 노골적인 매도와 비난의 표현이 특히 지도자들의 입에서 완화되지 않고 쏟아져 나오면서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 유대인에 대한, 인도에서는 무슬림과 낮은 카스트 계층에 대한, 유럽에서는 이민자에 대해 폭력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의 자존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개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만이 평범한 사람들이 관용적인 생각에 더 많이 열려 있게 해 줄수 있을 것이다. 인종주의, 반이민자 정서, 정당 간의 소통 부족은 상대방과 접해 본 경험이 부족한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1954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적절한 여건하에서 타 집단 사람들과의 접촉을 늘리면 편견을 줄이는데 매우 효과가 있다는 접촉 가설의 제시.
인도 델리는 2007년부터 명문 사립학교들이 입학생 중 일정비율을 가난한 가정 학생에게 할당하도록 의무화함. 다양성을 높이는 것은 사회를 더 관용적이고 포용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쓸수 있는 매우 강력한 수단이다. 그럼에도 다양성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학교가 아시아계 학생의 입학을 인위적으로 제한하거나 인도에서는 학교와 공직에 적용된 할당제의 혜택이 차별받은 사람들에게 정말 돌아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음.
이 싸움의 핵심에는 ‘능력’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다. 적극적 우대조치는 능력 있는 지원자에 대한 차별이 된다. 그러나 능력은 단순한 점수가 아닐수 있다. 낮은 카스트 출신의 학생은 아비지트와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서 동일한 점수를 받았더라도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장애물을 훨씬 더 많이 넘어야 했을 것이고 따라서 아비지트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편견에 기반한 선호가 표출되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증상이기도 하다. 때로 편견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제적 고통에 대한, 우리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 데 대한 방어적인 반응이다. 편견은 ‘절대적인’ 선호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공화당이 우세한 지역에서의 오바마 메디케이드 확대)
인종주의적인 혹은 그밖의 편견에 기반한 투표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무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이는 이 선거에 정말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면 그들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인종주의와 편견을 버리고 견해를 바꿀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편견과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직접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책엔 대해 신뢰할 수 있는 공공담론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