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창5:1-32절) 아담의 후손들
오늘날 현대 의학의 발달은 노인들의 수명을 연장해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육십이 넘으면, 노인이라고 했고, 칠십이 넘으면, 대단히 장수한 편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갑잔치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노인들의 수명이 길어졌고, 노인 문제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될 정도로 노인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육십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사람들이 *한창 때에 정말 안 됐다*고 하면서 안타까워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는 수명은 연장되었는데, 할 일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빨리 변해서 옛날에 배운 지식으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봐주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똑똑해져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묻는 것들은 자기 시대에 듣도 보도 못한 것들입니다. 아직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는 노인들이 많은데, 세탁기는 자꾸 새로운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식들이 용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노인들은 *할 일이 없이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라고 말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노인들은 집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자식들의 집에서 밥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서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건강도 나빠지고, 결국은 집에서도 도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아담의 후손들의 계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이들의 평균 수명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900세입니다.
한 사람이 900세나 산다고 하는 것은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일 뿐 아니라, 모세의 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점은 설사 성경의 기록이 자기들의 머리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부정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역사성을 가장 믿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 곧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엄청난 나이입니다.
한 200세나 300세 살았다고 하면 혹시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나이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평균이 900세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태어나면, 아예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지요. 문제는 노아 홍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노아홍수 이후부터입니다.
여기에서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자연의 격심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노아 홍수 때, 하늘에 있던 엄청난 양의 물이 땅에 쏟아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노아 홍수 이전에는 하늘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수분이 있어서 마치 두터운 이불이 덮고 있는 것처럼. 더위나 추위가 심하지 않도록 막아주고. 몸에 해로운 자외선 같은 것도 차단해서 인간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오래오래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에 나타나는 엄청난 수명이 사실이냐 아니냐*하는 것보다는 *이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입니다.
Ⅰ.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보게 됩니다.
5:1-3절)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형상*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원본으로 삼아 찍어 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대표하거나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일 뿐,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부분은 모두 죽어 버린 채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오직 인간의 형상일 뿐입니다.
아담이 아들을 낳았을 때, 이 아들은 타락하기 전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범죄하고 난 후, 아담의 기질과 성품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행동은 아담 개인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과 행동은 인간 전체를 대표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아담의 후손들도 아담 안에서 함께 그 범죄에 동참한 것이 되었고, 후손들이 태어날 때, 더 이상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범죄한 아담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 주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출생만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인간 전체가 범죄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하게 붙들어 줄 때입니다. 그렇게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그의 후손들은 죄 중에서 잉태되고. 죄 중에서 출생할 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형상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 인간의 형상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원래 바탕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이 고장 나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고장이 났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롬8:7절)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사람의 형상이 지닌 가장 큰 결함은 곧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곧 이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외모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에 태어난 그의 아들들은 모두 기질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가인 같은 자식이 태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 아담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10명은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자기 속에 있는 무서운 죄성을 누르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이 10명이 1,500년이라는 기간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모두 다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적이었고, 죄를 짓는데, 모두 선수들이었습니다. 아담은 한번 일을 저질러 놓고는 자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했습니다.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죄를 짓고 난 후에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 죄의 발전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산에서 산불을 놓고 나서는 그 불을 진화하지 못해서 큰 산불로 번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한번 건드려 놓은 죄는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은 가인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말씀으로 변화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곧 여기에 동장하는 10명의 후손들입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습니다. 이 나이는 노아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시간에 해당됩니다. 아담은 노아가 태어나기 전까지 살면서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가 900세나 살면서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농사를 지었겠습니까? 세탁기를 돌렸겠습니까? 아담은 계속 살면서 후손들을 가르쳤습니다. 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인지. 직접 가르친 것입니다.
아담의 생애는 전기의 아담과 후기의 아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의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의 아담입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인류의 대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생애를 복음전도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전기의 아담보다 후기의 아담이 더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비슷한 사람이 전 미국 대통령 카터입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평화의 전도사로서 전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해내고 있습니다.
또 리처드 닉슨 같은 사람도 예(禮)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재임 기간을 마치지 못하고. 물러난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 미국의 외교 문제 등에 그 나름대로 많이 헌신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담의 후기 생애가 이와 비슷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초기에 인류의 대표로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이 곧 *선악과 스캔들*인데, 아담은 이 한 번의 범죄로 인류 전체를 죽음과 멸망의 도가니 안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직을 상실한 후,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10명의 이름들은 아담이 목회했던 교회의 장로들의 이름입니다.
무려 1,000년에 걸쳐서 아담이 가르쳐온 말씀의 자녀들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은 자기가 저지른 죄 값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방황하거나 낙심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즉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뱀의 머리를 깨뜨려서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후, 새 아들을 주셨을 때,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습니다. 셋은 *씨* 곧
*약속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Ⅱ.구악의 부활 장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신약의 부활 장*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미, 그리고 앞으로 성도들이 어떻게 부활할지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창세기 5장을 *구약의 부활 장*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장은 믿음으로 산. 성도들이 거의 영원에 가깝게 살고 있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은 912세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아들 에노스는 905세를 살다가 죽었고. 그 아들 게난은 910세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아들 마할랄렐은 수명이 좀 짧아서 895세를 살았습니다.
말이 900세이지 900세는 거의 영원에 가까운 삶입니다. 아마 이들에게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노화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자식들도 100세가 넘어서 낳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아담은 셋을 130세에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105세에 낳았습니다. 물론 여기에 기록된 아들들이 첫 아들은 아닙니다. 100세 정도이면, 그 사이에 자식을 수십 명은 낳았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한 사람당 수십 명씩 자식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아들들은 모두 영적으로 중요한 아들들입니다. 믿음의 자식들은 대개 100세가 넘어서 난 아들들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 줍니다. 구원은 당대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만들어진 믿음의 아들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단순히 사람 수가 많다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10명의 장로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긴 세월을 통하여 믿음의 아들을 하나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삶을 통하여 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믿음의 장로들은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거의 영원에 가까운 기간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의 영원에 가깝게 살 수 있는 길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진짜 영생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영생의 길을 보여 주고 있는 사람은 아담의 칠대손인 에녹입니다. 에녹은 없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 일은 무엇을 보여 줍니까? 이 일은 믿음의 장로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죽지 않고. 기다렸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보여 줍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커튼으로 가려진 것처럼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단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연단의 장소에 불과합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는 아주 얇은 커튼이 드리워 있습니다. 그 커튼의 이름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해야 저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 세계에 대한 말을 많이 들으면서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은 *천국이 어디있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들면 천국이지*라면서 성경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그 나라로 옮겨짐으로써 그 나라의 실제성을 보여 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즉 에녹의 *영광스러운 실종*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산 증거였습니다.
이 10명의 장로들이 긴 생애를 통하여 증거 한 것이 무엇입니까? 곧 *이 세상 밖에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난히도 긴 생애를 살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인간이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녹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저 나라로 옮겨짐으로써 그 나라의 실재성을 증명 했습니다. 에녹은 분명히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딘가에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아무 곳에도 없었습니다. 가능성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산 채로 다른 나라로 옮겨진 것이요. 그것은 영광의 실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여기에서 모든 것을 가져야 하고, 모든 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1.2년 앞서 가면 *그렇게 좋아하고* 남보다 1,2년 늦으면 또 *그렇게 실망합니다.* 여러분, 에녹이 보여 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옆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위에 영원한 또 하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마치 옆에 있는 나라로 이사 가듯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예비군 훈련장과 같습니다. 훈련이 끝나면, 모두 다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진짜 영원한 집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죽고 난 후의 삶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혼만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영혼만 가지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생활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여기와는 비할 수도 없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나의 소유가 있고. 생활이 있습니다. 즉 *그 나라를 한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북한과 남한은 경제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 60년대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북한에 가보니까 거기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티브이나 냉장고 같은 것이 있다고 합시다.
남한 사람들이 그것을 탐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나라에 오면, 모두 고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한번이라도 *저 세상을 맛본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일절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성가 1946장 *죄 많은 이 세상은*
그냥 여기에서는 하루 세끼 밥만 먹고 살고, 모든 것은 저기 가서 누리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이곳에서 아무리 좋은 것도 그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아무리 아름다웠던 관계도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부부 관계까지도 그곳에서는 진부한 사랑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곳의 학문도 그곳에서는 완전한 무식입니다. 이곳의 부귀(富貴)도 그곳에서는 배설물(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Ⅲ.영생의 길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영원한 세계로 옮겨진 에녹의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의 삶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5:21-24절)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아니하였더라.”
에녹의 삶은 지극히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가인처럼 좋은 성(城)을 쌓은 것도 아니고, 라멕의 아들들처럼 기술이나 음악의 대가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하나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표현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 생활은 므두셀라를 낳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아들의 출생이 에녹에게 어떤 확신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들을 낳고 난 후. 에녹의 삶의 목표가 변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서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여러 가지 선(善)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이제부터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 에녹의 삶의 목표였고, 하나님께서는 *이 에녹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죽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 계신 곳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어떤 교리(敎理)를 머리로 배우고,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듣지 않고는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듣고 이해하는 것은 믿음을 위하여 필요한 요소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생각하고 살아온 길을 버리고. 생명의 말씀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이 듣고 많이 배우면, 믿음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을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단하는 것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결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조건 새로운 사람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엘리사는 엘리야를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을 포기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하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이끄는 새로운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까지 논문을 어떻게 쓰고 학위를 어떻게 받겠다는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또 사업하는 사람은 기업을 어디까지 확장하고. 이윤(利潤)은 어느 정도 확보한다는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성취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목표를 성취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목표는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표정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고,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며,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다.
처음에 신앙을 가졌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곧 인생의 목표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어떤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런 목표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얼마나 나타냈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가 특히 에녹의 삶을 통하여 배운 것은 곧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먼 목표는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루하루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땅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이윤(利潤)을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입니다. 우리의 걸음을 하나님께 맞출 때, 어떤 일이 나타납니까? 내가 죽습니다.
나의 목표나 야망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없어져야 합니다. 즉 *나의 자존심, 나의 목표, 나의 필요 같은 것이 있는 한 나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조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미쳐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미치고,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나의 *걸음을 하나님께 맞출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는 걷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나를 사랑하셔서 그의 성령을 퍼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능력과 힘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내 속에서 한없는 영감과 능력이 솟아납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9:22절)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되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세상에 구걸하지는 않았습니다.오히려 연약한 그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강할 때보다 더 큰 능력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비결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강해지거나 온전해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에녹에게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 어떤 일을 계기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죽음을 통과시키지 않고, 곧바로 영광의 나라로 옮기심으로써 그를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존귀해지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루하루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믿음의 장로들의 삶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온전히 하나님만 소망하는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지치고, 힘든 삶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28-29절)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우리는 이 사람들의 생활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적절한 농기구를 개발하지 못해서 농사 짓기 힘들어 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이들을 위하여 어떤 농기구를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또 어떤 유대인 학자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라멕의 말은 *죄악이 너무나도 이 세상에 가득해서 믿음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악해졌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죄의 횡포를 멸하시고. 다시 의로운 세상을 세우실 것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때 믿음의 장로들이 소망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아들 중에서 *약속된 믿음의 용사가 나와서 사탄의 머리를 깨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는 부족하지만 내 아들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여 할 수 없지만 당신은 주님의 온전한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사탄의 머리를 깨서 이 죄악의 횡포를 잠재우고 의의 나라를 세워주시오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요.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삶은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 어느 일정 기간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900세가 넘도록 산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장수(長壽)이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그가 원하시면, 얼마든지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는 것과 우리 인간들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결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오래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영광스럽게 만드셨지만, 아담이 낳은 아들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습이 아니라, 타락 이후 변해 버린 지금의 모습을 닮은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은 변질된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의 긴 족보는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 세상을 밝혔던 교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특히 아담은 범죄하고 난 후, 오히려 더 믿음을 가지고 말씀으로 식구들을 붙들어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가장 빛나는 일은 역시 에녹의 *영광스러운 실종입니다. 그는 죽지 않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에녹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본문은 구약의 부활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혼자서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아무 하나님이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오래 살기는 했지만. 결코 영광스려운 상태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 죄가 더욱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할 일 없이 오래 사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오래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셔서 오래 살게 하십니다. 아-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절)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5월 8일(주일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주 중 감동받은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