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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전도자 바울과 그 복음
사도행전 17:16~34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 사역하던 중에 박해를 받아 또 다시 배를 타고 멀리 아가야의 중심 도시였던 아덴에 배를 타고 도착한 후에 행한 전도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뢰아로부터 이곳 아덴까지의 거리는 약 390킬로미터이니, 서울에서 대구까지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동료들과 떨어져 이곳 아덴에 의사 누가만 함께 하면서 외롭게 동료 사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애초 계획은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에서 합류하면 바로 고린도로 가려고 했던지, 아니면 합류한 후에야 아덴에서 함께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지 둘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그 유서 깊은 도시 아덴 곧 아테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최고 문명을 꽃 피운 아테네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사도 바울 이전에 이미 4백년에 최고의 그리스 문명 곧 건축, 예술, 철학, 정치, 교육의 영역에서 지극히 놀라운 영광을 드러낸 바 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의 수호신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네를 기념하여 섬기는 파르테논 신전이 시의 중앙부 언덕에 웅장하게 세워져 있으며, 토론과 담화를 통하여 고대 민주주의 정치를 꽃피운 아고라 광장이 있고, 그들의 자랑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들이 그곳에서 학문의 전당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는 서양 문명의 한 축을 이루는 거대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발을 디딘 주후 50년 내지 52년도에도 역시 로마 제국에게 그 아테네의 옛 영광을 인정받아 자유시로 인정을 받아 폭넓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문학 곧 시와 연극, 소설, 역사, 조각, 과학, 철학, 부,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 능력, 이 모든 것들은 그 당시 로마 제국 모든 나라, 백성들의 연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도 바울 역시 그곳 아덴에 도착하였을 때에 마음의 설레임이 컸을 것입니다. “내가 드디어 그 유명한 아테네를 내 눈으로 보는구나” 하는 설레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아 놀란 마음도 달래고 동료들 오기 전까지는 좀 쉬면서 아테네 관광을 해볼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렇게 평안히 보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에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테네 시를 구경하러 이곳 저곳 다니는 동안에 그의 마음에 분노감이 치솟아 올랐으니, 그것은 그 도시에 가득찬 우상들 때문이었습니다. 아테네의 언덕에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들이 있습니다. 열두 신들 곧 하늘의 신 제우스, 그 아내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죽음과 음부의 신 하데스 해의 신 아폴론, 달과 미의 신 아르테미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난폭한 전쟁의 신 아레스, 술의 신 디오니수스 등 여러 신들을 수애하는 주상들이 여기 저기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한 제단이 아고라 광장에 여기 저기 있고, 공공 기관인 의사당이나 재판정이나 기록 보관소, 학교 등 어디나 그러한 신들의 우상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우상들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격렬한 거부감과 분노감이 치솟았습니다. 그렇게 지성과 예술혼이 충만하다고 알고 있던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 아테네가 사실은 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우상 숭배의 소굴이었다니 하는 배신감이 그의 마음을 뒤엎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쉴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관광이나 할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두 동료 사역자들을 기다리기도 전에 사도 바울의 마음은 들끓는 거룩한 영적 질투심으로 불타올라서 가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17절과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사도 바울은 영적 질투심에 불타 올라서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거기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 곧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장터에 나갔습니다. 장터란 헬라어 원어로 ‘아고라’로서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홱심되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만나 논쟁하는 광장이며 그곳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기도 하는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회의도 하고 논쟁도 하고 물건도 사고 파는 장터에는 아테네의 일반 시민들이 가장 북적대는 곳이었는데, 이곳에 날마다 나와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변론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아고라 광장에서 만나 논쟁하던 당시의 철학자들이 여기서 나오고 있는데 그 당시에 유명한 두 가지 철학자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요 또 하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이 세상은 우연에 의하여 지배받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고 보았습니다.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은 행복을 얻는 것이며 초기에는 정신적 쾌락을 주된 목표로 말했으나 나중에는 육체적 쾌락을 더 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도덕적 가치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인간은 이성을 추구하는 존재요 인간은 최고의 이성 곧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에 합일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만물은 다 신적인 면이 있다고 보았으며,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고 그 괴로움을 다 당하고 견디는 인내가 가장 귀한 덕이라고 보았습니다. 신이 정해준 운명이 있고 그 운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둘 다 무신론적이고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견해입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날마다 광장에 모여 서로 토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만의 토론장에 한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키도 작고 말도 좀 어눌하고 입은 옷도 남루한 한 떠돌이 순회 철학자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논쟁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철학자들의 눈에 볼 때에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엄청난 열정이 내면에 있는 사람이었고 논쟁할 때 절대 물러섬이 없는 불굴의 사람이었지만 이 말 저 말 여기서 저기서 지식을 얻어서 주장하는 말장이처럼 보였습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이방 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는 좀 섬뜻한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주전 399년 전에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죽이는 사형 판결의 죄목이 신성모독죄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방 신을 전하는 죄로 고발되어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종교적으로 위험한 이방 종교를 전하는 자라는 표현 속에는 날카로운 반대의 의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는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고의 말을 들었으나 여전히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다고 18절 후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안식일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평일에는 아고라 광장에서 이렇듯 날마다 논쟁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거룩한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을 대표하여 전도하러 이방 세계에 나온 사도 바울은 이방 세계의 문명의 대표 도성인 아테네 성에서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동료인 실라도 없고 디모데도 없는 중에 오직 의사 친구인 누가 한 사람만 대동한 채 사도 바울은 세계 최고의 지성과 예술과 과학과 고대 민주주의 정치의 꽃을 피운 인간 이성을 자랑하는 아테네서 홀로 그들의 빛나는 인간 문명의 탁월성과 맞서 분전하여 맞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풍차를 향하여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랜 영광을 누려온 아테네의 집단 지성과 싸우고자 이렇게 용기 있게 돌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 목을 잘라버리고 표효했던 소년 다윗처럼 과연 이참에 아테네의 그 대단한 명성에 조금이나마 흠을 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겂 없이 덤벼드는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은 마침내 극적인 무대에 오르게 되는 날이 찾아 왔습니다. 19절로부터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도 바울이 얼마나 물러섬이 없이 열렬하게 날마다 그 아테네의 시민들과 철학자들과 논쟁하며 복음을 전하며 그들에게 우상 숭배를 버리고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며 진리의 하나님을 증거했는지 마침내 그들은 이제 사도 바울을 아테네 시의 최고 재판소가 있는 아레오바고로 데려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한쪽 언덕에 있는데 재판정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재판정에는 열두 명의 최고 재판관들이 모여서 사안을 듣고 재판을 내립니다. 이 열두 명의 재판관들은 아테네의 최고의 지성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이 아레오바고 재판정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고 사형 언도를 받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런 서슬퍼런 법정에 서서 그가 믿는 복음 진리를 공식적으로 설명하고 판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을 끌고 갔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그 아테네 사람들의 대표자들 앞에서 복음을 공식적으로 제출하여 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이제 아레오바고의 12인의 재판장들과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그 동안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감화를 입어 그를 따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재판정의 방청석에 배석한 가운데 어떻게 자기가 믿고 전하는 진리를 전했을까요? 요약하자면, 22절로부터 시작된 사도 바울의 증언 설교는 한 마디로 ‘온전한 복음 진리’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한 온전한 복음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신이라는 것입니다.
22절로부터 2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열망이 많은지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위한 우상을 만들고 수많은 제단들을 만들어 놓고 위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한 제단의 제목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하여”라는 제단도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아테네 사람들은 혹시라도 몰라서 위하여 섬기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신의 노여움을 받을까 하여 그렇게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놓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을 가진 종교성을 가졌지만 인간은 여전히 신에 대하여 불확실하고 무지함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열심 있는 종교인들이었지만 정작 알아야 할 참 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영적 무지에 휩싸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단 아테네 사람들만이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 아니요 아담 이래로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개인이 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요 길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진리를 깨달을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밝히 선언합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온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전도의 핵심이지만 그 전도의 핵심을 전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이 창주주시라는 사실을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거나 하나님의 다스림 없이 우연에 의하여 굴러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진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조차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연성이 없고,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그는 온 세상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 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졌음도 반드시 증거야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온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으로 봅니다. 유일한 신, 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니, 삶을 다스리는 일관된 원리도 없습니다. 그저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게 봅니다. 스토아 학파도 신은 없고 인간의 고도화된 이성을 이상으로 여깁니다. 인격이 없는 고도의 이성을 따라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저 숙명처럼 인내하면서 절제하면서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무로 돌아가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비관론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수많은 인생의 불확실성과 오해와 비관론 등 잘못된 세계관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
둘째로, 하나님은 완전히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당시 아테네의 철학자들이나 시민들은 섬기는 신들이 사람들의 경배를 받고 제물을 받아야만 그 신이 힘이 세지고 세력이 커지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들의 섬김이 없으면 신들이 힘이 없고 버림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을 선택을 하여 자기들의 수호자가 되어달라고 청하고 그 신에게 많은 제물을 갖다 바쳐서 그 신이 그것을 인하여 자기를 섬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해주는 것으로 알고 믿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늘 인간에게 의존적 존재입니다. 인간에 의하여 때로 버림당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들은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믿고 섬기는 신들과 달리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바치는 것을 얻어 먹고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친히 먹이고 살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고 생명을 계속하여 베풀어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생명을 한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이 일개 사람들이 지어놓은 신전 안에 가두어둘 수 있겠습니까? 어떤 특정한 장소에 매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크고 광대하시고 생명을 베푸시는 그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갖다 드린들 족하겠습니까? 어떤 성전을 지어드린들 그분의 발이나 올려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을 위하여 신전을 지어놓고 그 신전에 그 신을 모시고 그 신전에다가 각종 제물을 갖다 바침으로써 그 신의 원기를 불러일으키어 자기들을 돕도록 하겠다고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설교를 하는 아레오바고 재판소 바로 위쪽 언덕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신전입니다. 그 신전의 넓이는 30미터요 길이는 70미터입니다. 그 신전에는 직경 2미터, 높이 10미터의 돌기둥이 69개나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크다고 자랑하는 그 신전일지라도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날마다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그 안에 모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신전에 가두어둘 수 있는 작은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신전 안에 신들을 가두어 놓고 섬길 수 있고 자기들이 드리는 제물을 먹고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보다 크시고 모든 만물을 살리는 참 생명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나 수많은 세상 사람들은 무력한 우상과 잡신을 헛되이 경배하는 영적 무지 속에 살아갑니다.
셋째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대주재이십니다.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든 인간은 다 한 형제 한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지었으니, 황인종이나 흑인종이나 백인종이 모양을 조금씩 달라도 다 한 혈통에서 나온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그렇게 지은 인간들을 온 땅에 흩어져 살도록 섭리하셨는데, 그들에게 번성하는 그 연대도 다 정해놓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앗수르 제국의 기한도 정해놓으셨고 바벨론 제국의 연대도 정해놓으셨고, 알렉산더 제국의 연대도 정하였고, 로마 제국의 연대도 정해놓은 것입니다. 대영 제국의 번성 기한도 정해놓았으며, 미국의 패권 기간도 다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누가 그 다음 패권을 쥘 지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패권 국가가 말세의 하나님의 역사 경륜 속에 적 그리스도의 국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세월이 흘러가서 또 다른 패권 국가가 등장할 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거주하는 경계도 다 한정해놓으셨습니다. 우리 한 민족의 거주 경계가 어떠한지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고, 일본의 거주 경계도, 중국의 거주 경계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습니다. 만일 그 거주 경계의 지계표를 함부로 인위적으로 옮기려고 덤비다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의하여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도 하십니다.
이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은 유럽 전체를 다 삼키려고 모든 경계선을 무력화하면서 거의 유럽을 석권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끝내 정복하지 못한 채 서부 전선이 교착되고 남부 아프리카 북부를 점령하는 중에 동부 지역인 러시아까지 정복하려고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러시아를 향하여 무섭게 진군하였다가 레닌그라드 시에서 900일 동안 서로 공방전을 벌이면서 소련군은 백 만 명이 죽고 독일군도 60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결국 독일군은 서서히 몰락하고 히틀러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일본도 동양에서 자기들의 거대한 제국을 만들겠다고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무너지고 처참하게 원자폭탄세례를 받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세상 만사를 다스리고 계시고 그 나라와 제국의 연대를 정하셨고 거주의 경계도 다 정해놓으신 대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교만과 욕심은 금물이며 전쟁을 즐기는 자들과 포악을 자행하는 자들 역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나 가문이나 모든 사람은 이처럼 세상 만사를 다스리고 계시고 그 그 분량을 그 뜻대로 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며 자기를 찾는 자들과 교제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27절로부터 2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당시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학파의 신관은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하더라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멀리 계시며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신은 신들의 세계에 있으며 신들끼리 상대하고 인간의 부름에 응답하거나 인간의 삶을 인도한다고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고자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며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와 함께 살며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돕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밝히 알려줍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그리스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다 신의 소생, 신의 아들이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존재인 인간이 돌이나 나무나 금은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일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지극히 복스러운 신분을 가진 인간이 도리어 금은 돌 철과 나무를 가지고 인간이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 피로써 값을 지불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성령을 보내어 그 몸에 거주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소생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여전히 우상으로 신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엎드려 복을 구하는 아덴 사람들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그 당시에 최고의 문명인이라 자처하는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21세기의 최고의 지성인, 예술인, 과학자, 기술인, 철학자를 자처하는 세상 사람들 역시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자기 앞길을 몰라서 무당에게 묻고 그 말에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미련한 행동을 하며, 우상 앞에 복을 빌며, 명치대가리를 실로 싸서 가게 문에 걸어놓고 무당이 그려놓은 부적을 돈 주고 사서 붙여놓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아무리 배워도 헛됩니다. 또한 자기 앞길을 한치 앞도 모르면서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교만한 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당대 아테네의 수많은 철학자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나 최고의 지성들이나 지금 2천년이 지나 달이나 화성에 인공위성을 보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고 영적인 무지와 혼돈과 교만 속에서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뫼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0절로부터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제 그렇게 하나님을 모른 채 금은동철로 만든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면서 살아온 모든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이전에는 그냥 놔두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회개하라고 명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악이기에 회개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판하는 날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지 않았지만 언젠가 분명히 일어날 일이고 그 심판하시는 자는 분명히 누구인지 계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부활의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라고 사도는 증언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자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장이라고 하나님께서 그의 부활로써 온 천하에 확실히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은 모든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지막 종말 심판이 장차 있을 것이며 그 때에 심판장의 자리에서 만민을 심판하실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해준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셨으니, 그 때가 곧 다가올 것이요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이요 내세가 있고 그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점도 확실한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만물의 창주자시며 만민과 만물의 생명의 수여자시며 온 세상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 거주의 경계도 정하시는 세상의 통치자시며 그를 믿는 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들의 참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여러 명의 신도 아니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고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그를 만민의 심판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장래의 심판 날에는 세상에 살아갈 때에 우상을 섬기거나 잡신을 섬기거나 자기를 믿고 살아온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온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이렇게 확실하게 증거해주었는데도 아예 무시하고 들으려 하지 않고 여전히 잡신과 우상을 섬기고 고집을 피우면서 자기의 철학, 자기의 편견, 자기의 종교에 잡혀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핑계댈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복음 진리의 말씀을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12인의 재판관들과 방청석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을 때에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32절로부터 34절까지 세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첫째 반응자들은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그들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급하게 제동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사도 바울의 말을 제지하여 그치게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조롱은 복음이 증거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어느 시대나 반드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할 때 지금도 우리는 반드시 조롱자들을 만날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반응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더 자세히 알고 믿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 말한 사람들 중에 태반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후일에 다시 들을 기회가 있으면 듣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이나 사도의 서신서를 종합해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에는 다시는 재차 들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이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의 진수를 들을 절호의 기회로서 다시 그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언제든지 기회가 또 올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미루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그 기회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기회, 말씀을 들을 기회, 진리에 대하여 조용히 깊이 묵상할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꼭 붙들고 진리의 말씀에 착념하여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반응자들은 그 즉시 사도 바울을 붙든 자들입니다. 34절을 보면,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하여 믿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가까이 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콜라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아교풀로 딱 붙인다는 말입니다. 강력 접착제처럼 붙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아레오바고 재판정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그 후 사도 바울에게 딱 들러붙어 다니면서 놓아주지 않고 계속 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의 이름이 여기 나옵니다. 바로 아레오바고 관리 곧 아레오바오 12명의 재판관 중 한 사람이었던 디오누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보면 이 디오누시오는 훗날 아테네의 감독 곧 아테네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마리라는 여자 성도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사람들도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결국 믿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의 아테네 시의 복음 전도는 이처럼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귀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늘날 사도 바울처럼 전도할 때에 이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증거하는 전도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믿는 결실을 맺는 경우는 정말 희귀할 것입니다. 최고의 석학 사도 바울, 성령의 사로잡힌 사도 바울도 그 중에서 몇 사람을 건지는 것으로 만족할 정도였을진대 우리가 열심히 전도할지라도 수천 명 전도하여 한 영혼을 건진다면 대단한 성과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보이는 우상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더 강력한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물, 명예, 쾌락, 사람들의 인정, 각종 스포츠, 매스미디어, 정치, 건강까지도 거의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애정과 열심들을 쏟아놓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당시에 최고의 지성의 도시, 문명의 도시 아테네에서 그 즐비한 보이는 우상들을 보면서 거룩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이름과 그에게만 돌아가야 할 영광이 도적질당하는 것을 보면서 견딜 수 없어 날마다 광장에 나가 전도하고 재판정에까지 가서 전도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거룩한 질투심이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진리가 무엇인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장차의 부활과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하여 열렬하게 증거할 열정이 우리에게 충만해지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도 바울의 심령 속에 불탔던 그 거룩한 질투심으로 시작된 그 바울의 복음은 오랫동안 세상을 뒤덮었던 아테네의 잘못된 영향력의 물줄기를 바꾸었고, 훗날 저 어둠과 혼돈과 우상 숭배와 미신에 사로잡힌 유럽에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이 온 세상 복음화를 위하여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선교 운동에 앞장서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이 거룩한 도전은 결코 무의미한 패배의 도전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서도 아테네의 사도 바울처럼 한 집안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면서 조롱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성도가 있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홀로 영적 싸움을 싸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홀로 싸움을 싸워갈 때에 아무런 성과가 없고 지지부진 열매가 없을지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의 아테네의 이 고독한 영적 싸움이 먼 훗날 큰 울림이 되어 온 세상을 변화시켜갔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씨름도 헛되지 않고 훗날 영혼이 돌아오고 영적 기상도가 바뀌고 주님이 영광을 거두게 될 그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우상들이 사람들의 심령 속에 시퍼렇게 살아서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지극히 광대하심과 세상 만사를 친히 다스리심과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심과 장차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과 장차 반드시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대한 심판과 상급이 있다는 온전한 복음 진리를 만나는 이들마다 어느 때든지 불굴의 용기와 인내로 전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