쳉헤르 온천의 태양이 떠올랐다. 동이 트자 마자 온천욕을 즐겼다. ‘쳉헤르’는 ‘푸른, 하늘색의’라는 뜻으로, 온천수 성분 때문에 물이 푸르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곳 하늘이 유독 푸르다는 뜻일까? 쳉헤르라는 이름을 가져서인지 일출 또한 푸르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쳉헤르에서 어기노르로 향하기 위해 출발, 어제 온 만큼 산을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밤 늦게까지 내린 비 덕분에 길이 미끄러워 버스가 올 때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온천수가 터지는 곳이고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니 우리 같으면 도로를 냈을 법한데, 아무래도 국가의 경제적인 상황이나 지리적 환경 때문이든, 무슨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있는지도.
‘어기노르’에서 ’어기‘는 ’손 위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자 ’내어준다‘는 뜻이고 ’노르‘는 ’호수‘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호수‘다. 관광객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이 비포장된 산을 넘어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유가, 주변에 큰 호수가 없고, 바다와는 단절된 상태이기에, 어기 호수를 찾아와 쉬고 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의 일정은 어기 호수를 잠깐 보고 전날 묵었던 엘승 타사르해까지 가는 것이 전부다. 어기 호수에서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하루 종일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에게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말했더니, 몽골은 몇 시간을 달려야만 풍경이 바뀌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어기호수를 떠나 산을 넘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오전을 보내고 점심식사를 위해 어제 들린 같은 식당을 찾았다. 그리고 식사 마치자마자 다시 엘승 타사르해를 향해 출발.
어기 호수에서 엘승 타사르해까지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내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무엇을 보러 온 거지? 온 종일 버스에서, 차창으로 보는 끝없는 들판을 보러 온 건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했다. 가이드에게 답을 찾으려 했고, 실제로 그 답의 일부를 찾기도 했다. 그러다 불현듯 시 한 구절이 어렴풋 떠올랐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 시 전문을 찾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곱씹었다.
먼 길 /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한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신을 신고 이 먼 길을, 이곳까지 걸어 온 사람은, 어느 누구나 ‘신’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험난한 이 길, 정말 머나 먼 이 길을, 터벅터벅 걷고, 때로는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수 백, 수 천 킬로미터를 걸어온 사람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따라서 신을 신은 신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길을 알아서 걷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한치 앞도 예상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알 수 없음에도 주어진 길을 걸어간 사람은 그 자체로 칭송 받고 찬양 받을 만하다. 신이란 전능하고 전지하기 때문에 위대하지만, 신-인, 신을 신고 주어진 먼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중에도 살아낸 사람은, 더욱 위대한 존재다. 다 알고 걷는 자, 모든 것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자가 걷는 길과, 내일 일을 모른 채, 안개 속에서도 더듬거리면서, 비포장 산길을 넘어가는 자 중 누가 더 위대한 것일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걷는 폼이 볼품 없다. 한걸음에 수 백, 수 천 킬로미터를 달릴 능력도 없다. 온 종일 달려서 온 곳이 대청호보다 작은 이 호수를 보기 위해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호수까지 내려가 사진 몇 장 찍고 다시 오후 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때로는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고, 바람이나 강물처럼 자유롭게 원하는 곳으로 흘러 가고 싶다. 하지만 인간은 신을 신고 뒤뚱거리면서 살아가야 한다. 땅 위에 두 발 딛고 중력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유한한 인간이다.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를 고민하지만,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신은 신을 신고 있지 않겠지만, 인간이기에, 신을 신고 살아가야 한다. 신을 벗는 순간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는 시도이며, 신에 대한 도전이고, 자기 부정이다.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 없을까”를 궁리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를 배울 수 있을 수 있겠지만,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새들처럼 가벼운 신을 신고 하늘을 유영할 수 없다. “삶이란 비상을 거부한/ 가파른 계단”이며, 이를 인정하는 자만이 신을 신고 살아가는 신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주어진 생을 즐길 줄 아는 존재가 된다.
“나 오늘 이 먼곳에 와 비로서/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쳉헤르 온천에서 어기 호수까지 3시간 30분, 120여 km를 달려 오면서, 그리고 어기 호수에서 엘승 타사르해까지 2시간 40분, 160여 km를 달려오면서, 나 자신이 한갓 신을 신은 신일 뿐이며, 한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고, 광활한 초원에서 한점 점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 또는 비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 본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천상을 자유로이 유영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비효율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향유하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신 속에 신“이 아닐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유명한 한마디 “인간은 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1. 쳉헤르에서 어기호수, 2. 어기호수에서 엘승 타사르해, 3. 몽골 전체 지도에서 하루 종일 이동한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