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 상서 / 어머님은 이 불효자의 스승이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길이 없어 길을 찾다 찾아도 없으니 만들며 사신 어머님이셨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의 한 세상을 돌이켜 보니 어머님은 이 불효자에게 가장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어머님이 사시며 손수 보여주신 삶 모두가 이 불효자가 오늘까지 살아온 삶을 인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고(故) 정 주영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말씀 말입니다.
어머님은 스스로 길을 찾아갔고 없으면 만들어 가시며 산 삶이셨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17세에 동갑이신 아버님과 결혼하신 것은 아무리 시대가 그리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만남이셨습니다. 첫째, 너무 어리셨을 때 일이요 둘째, 양가의 격이 너무 맞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큰 댁 정례 누나가 들려 준 말은 어머님 머리를 할머님이 따주셨다 하던데, 그렇다면 어머님이 비록 결혼은
하셨더라도 아기이셨습니다. 그 아기였던 어머님이 결혼 2년 후부터 6 남매 아기를 낳으셨는데, 그 중 네 명
이 2년도 못살고 곁을 떠났을 때 그 아픔 얼마나 컸나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큰 댁에서 함께 사실 때
큰 어머님이 결혼 8년 만에 소천하시자 6살 먹은 형님과 3살이었던 누나를 어머님이 또한 키우셨더군요.
내 자식 떠나보낸 아픔을 달랠 길이 없으셨을 어머님이 큰 댁 형님과 누나마저 키우시며 하실 농사일은 다
하셨으니 얼마나 힘든 삶이었던가요? 그걸 다 참으시고 사랑으로 두 가정을 돌보아 오셨다니 사랑이 아니
었으면 어떻게 가능한 삶이었을까요. 그 사랑으로 이 자식을 키워주셨습니다.
그렇게 13년을 큰 댁에서 사시다가 큰어머니 새로 맞으시고 분가 하셨지요. 그때 나오셔서 처음 사신 집이
동네에서 가장 초라한 빈집이었고, 가지고 나온 것이라 곤 논 서 마지기였다지요. 그런 나눔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머슴으로 살았어도 그리는 못하셨을 일, 그러나 어머님은 참고 모든 삶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올린 길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사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님! 그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새 살림에서 시작한 것이 빈 땅 찾아 밭을 일구시는 일이셨네요. 여기저기서
공터만 있으면 밭을 일구셨고 거기에 곡식을 심어 살림을 꾸려가셨지요. 그 누구에게 원망의 말씀 없이 호미
자루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별 보고 나가서 달 보고 들어오시는 삶을 사셨고 아버지 또한 지게를 업고 사셨
고요.
그렇게 해서 조금씩 늘려 가시면서 살림을 키워갔고 몇 년 만에 그 헌 집에서 새집을 장만하여 옮기셨어요.
10평 스무 평 밭을 일궈 거기에 곡식을 심어 그것으로 밑천 삼아 불려 밭부터 늘려가셨습니다. 어머님이 밭에
일하시면 어머님 체구가 작아 보이지도 않던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때 정말 기억에 깊이 박힌 추억은 수박을
심어 그 무거운 수박을 광주리에 이시고 30 리가 넘는 군산까지 가셔서 팔아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책상을
사 오신 날 “아들, 새 책상 못 사줘 미안해. 나중에 더 좋은 책상 사 주마.” 하시면서 기진맥진 하셨던 어머님이
물 한 사발 떠서 벌컥벌컥 드시던 모습이 눈에 아련합니다. 어디에서 그 장사의 힘이 솟았는지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어머님이 이 불효자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러셨을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논을 샀고 밭을 늘려 가시면서 살았어요. 그러나 그것 만이었으면 모르는데 점차 늘어난 논 밭에
가꾸는 일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호미 자루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고 논에 벼를 심고 김을 매고 잡풀을 뽑으
시고, 가을에는 차디찬 물속에서 벼를 베고 홀태에 벼를 털고 그것을 담을 가마니를 손수 짜셔 담으시고, 밭 일
은 또 얼마나 힘드신 일이었던가요. 철 따라 콩이며 팥, 옥수수, 깨, 수수, 고구마, 참외, 수박 등 돈이 되는 일이
라면 쉼 없이 하셨네요. 그러고도 저녁 늦게 집에 오셔서 절구 통에 벼를 넣고 방아를 찧으셔서 저녁을 하시던
고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날로 늘어가는 살림에 고달픈 줄도 모르시고 하신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님은 바느질에 솜씨가 있으셔서 바느질 주문을 받아 밤을 새우시면서
바느질을 하셨지요. 당시는 하얀 옷을 입던 시절이었고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 차림이었지요. 자다 깨보면
호롱 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시면서 지친 몸에 졸기까지 하시며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어머님이 배우지도
안 하셨어도 어떻게 그처럼 몸에 꼭 맞는 옷을 기워 정해진 날짜에 해주셨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시고 흙탕물이 튀는 시골에 사셔도 항상 깨끗한 차림으로 출타 하시도록 도운 어머님의
지극하신 정성은 어머님을 존경하게 만듭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제가 기하학을 익혔나 싶기도 합
니다.
가마니 짜는 일이며 돗자리 철에는 왕 골 껍질을 벗겨 두었다가 집안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손수 만드시던 재주
등 어머님은 손재주가 참 많으셨지요. 어머님은 모든 일에 온 정성을 다해 무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삶을 사셨
지요. 그러나 이 불효자 어머님에게서 단 한 마디의 불평 원망 탓하시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힘들다고 쉬시는 모습도 한 번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스스로 모든 일을 꿈을 안고 사셨습니다.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시며 사신 삶이 저에게 주신 첫 번째 가르침이십니다.
두 번째 어머님이 저에게 가르친 삶은 결코 궁하게 살지 않으신 삶이었습니다.
어머님!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때였던가요. 당시에는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
가정처럼 함께 이것저것 장만해서 잔치를 치른 후 같이 모처럼 새로운 음식을 나누어 먹던 시절이었지요.
그때 어머님들이 귀한 자식 생각나서 떡이며 국수를 가져와 먹이던 시절이었는데도 어머님은 결코 그러지
안 하셨습니다. 얼마나 가져다 먹이고 싶었겠습니까 만 얻어 먹이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님
이 대신 하셨지요. 큰 댁은 쌀밥을 먹을 때 우리 집은 보리밥도 겨우 먹던 때라 할머님은 항상 이 손주를 더
생각해서 떡 몇 개씩을 주머니에 넣어와 먹이던 생각이 기억납니다. 큰 댁에 저보다 한 살 위인 사촌 형님이
계셨는데 할머님이 저에게만 가져다주시니 큰 어머님이 그러셨다면서요.
“아니 똑 같은 손주인데 어찌 장 영이만 갖다 주느냐고요.” 하시면서 서운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님, 그 뿐인가요? 그렇게 가난하게 사시면서 부잣집 친정에 가서 어려운 말씀 한 번 안 하시고 쌀 한 톨
가져오시지 안 했으니, 그런 강인한 삶의 정신은 어떻게 가지시게 되셨습니까? 그래서 아버지 체면, 시집의
채면까지 지켜주시다니 참으로 장하십니다. 그렇게 배운 이 자식 평생 남의 것 거저 받지 못했습니다. 결코
헛되이 얻고 받지 안 했습니다. 대학교 가정교사로 살 때 용돈이 없어 흑석 동에서 안암동 까지 가야 하면서도
주인에게 차비 좀 달라하지 못한 아들입니다. 걸어서 갔었지요. 융통이 없다 생각도 되지만 결코 거저 받는
일은 안 한 것 같습니다. 가정교사 5년에 7일 정도 쉰 것으로 기억됩니다. 심지어 시험 때도 하루에 꼬박 세
시간씩 가르쳤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어진 환경 이겨
내며 살았습니다. 이 모두 어머님에게서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보따리 장사하신 기억나시지요? 제가 네 다섯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어머님이 농사일 하시
다가 조금 틈이 있을 때면 농촌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서 한 광주리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
니실 때, 그 힘든 어머니를 이 불효자 어머니를 따라 가면서 칭얼대면 어머님이 안고 업고 가시던 생각이 납
니다. 어느 동네에 가니 점심 때였는데 점심을 주며 먹으라던 기억도 납니다. 물끄러미 이 불효자가 먹는 것
보시며 얼마나 어머님 가슴이 아팠을까 생각하면 어머님에 대한 한없는 미안한 마음이 남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사셨습니다. 거기에서 이 자식도 주어진 운명을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이겨내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머님 제가 쇠뭉치란 닉 네임을 가지고 어머님을 생각
하며 결코 굴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세 번째 어머님은 저에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지금 어머님께 드리려는 이 말씀은 어머님이 얼마나 힘든 삶을 이기며 사셨을까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님 결혼 13 년쯤 되었을 때 세상에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아버님이 하셨습니다. 작은 어머님을 보신 것
이었지요. 부잣집 어른들이나 하였던 일을 어떻게 아버님이 그러셨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때 어머님이 6 남매 중 4 남매를 잃고 절망의 심정이었을 때이니,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셨을 겁니다.
막내아들 네 번째로 보냈을 때 작은 어머님이 같은 나이의 동생을 낳았으니 그 배신의 아픔은 상상이 되지 않는
아픔이었겠지요. 어떻게 용서하고 사셨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자라면서 아버지 어머님이 단 한 번도 다툼이
없이 사셨는데 딱 하나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작은 어머니 얻은 그때 아니면 막내아들 보내고 어머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동네 미나리 꽝 앞길에서 어머님이 다투셨던 기억 외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나요? 그렇게 참고 용서하며 사신 어머니 나중에는 그러셨지요. “너의 작은 어머님도
불쌍한 사람이다. 네가 잘 해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머님은 용서의 화신이셨나요?
그렇게 늙어 가신 어머니. 아버님이 환갑 지난 이듬 해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7년 간 치매로
고생하셨으며 마지막 두 해는 식물인간으로 모든 것 다 잊으시고 사실 때, 어머님은 아버님 살리시려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아버님께 좋다는 모든 약 다 해드리시느라 험준한 산이며 들판을 헤매시면서 온갖 약 다 해
드렸지요. 어쩌다 이 불효자 찾아가서 약값에 보태라며 돈을 드리면 “너희가 쓸 돈 많은데 왜 주느냐? 가져다
써라.” 하시며 돌려주시려 하셨지요. 몰래 장판 아래에 넣고 올라와 “어머님, 장판 밑에 돈 놓고 왔으니 쓰세요.”
하고 연락 드리면 미안해 하시던 어머님. 자식인데 자식에게서 받는 돈인데 왜 그것마저 미안해 하셨나요?
그런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소천하신 후 동네 어른들이 어머님 열녀 문 세워드리라 까지 하셨지요.
그러고도 남으실 어머님이셨습니다.
지금 부모님께 용돈 제대로 드리지 못한 일이 이 불효자 평생의 한이 되었고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어머님 아버님께 이 보다 큰 죄 없거늘 어떻게 용서 빌어야 하나요. 아니 어떻게 그 큰 불효를 용서하셨
나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못하는 아픔에 이 불효자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가 겨우 목숨 구했을 때 병원에
있으면서 지향(芝香))이 보고 싶다는 말에, 아버님 단숨에 찾아가 내 아들 살려 달라 하시며 한 번 와 달라고 하
셨을 때, 거절하고 부잣집에 시집 간 지 향이를 7년 후 아내로 맞이했을 때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부모님.
그런 부모님께 효를 통해 속죄해도 모자랄 그 며느리가 부모님 저 그리고 세 자식을 버리고 배신하고 나가버린
그 지향이로 인해 이 불효자가 짊어진 천추의 한을 갚을 길도 없이 가신 부모님. 그 용서를 언제 어디에서 갚아
드릴까요. 이 불효는 이 자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이고 속죄할 뿐입니다.
생각하면 부모님께 지은 불효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그저 ‘불효자는 웁니다.’ 하고 속죄할 뿐입니다.
어머님! 누가 그랬습니다.
“중단 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요,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이렇게 어머님 아버님께 한없는 불효만 안겨드린 이 불효자도 이제 세월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서 주신 사랑을 누구에게 갚아드리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왔습니다. 왜 일까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모님께 잘 못해드린 불효지심 만 가슴을 눌러 잠을 자지도 못하는 이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하나 하나
부모님이 무언의 모범으로 가르치신 배움은 이 불효자의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부모님께 돌려
드리고 어머님 아버님을 뵈올 수 있을까요?
이 말씀 하나만 남기렵니다.
“어머님 아버님은 모든 아픔을 스스로 몸으로 실천 극복하시며 모범의 마음으로 이 불효자를 키우셨습니다.”
라고요.
어머님! 보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영전에 엎드리려 일어납니다.
거기에 함께 있는 추억의 솔방울도 잘 있었느냐 물어 보기도 하려고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