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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0 -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가면서 폴란드기병 윙드후사르를 생각하다!
2022년 5월 10일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도착해 바르비칸과 플로리안 문을 지나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 Rynek Gfowny 을 구경하고 프란체스카성당을 거쳐 언덕에 자리한
바벨 성 wawel castle 에 도착하는데 구시가지의 남쪽 끝, 비스와 강에 면한 바벨 언덕 위에 있습니다.
크라쿠프의 첫 마을이 바벨 언덕에 생겼으며 11세기 초에는 왕궁이 생기고 성벽이 둘러쳐져 바벨성의 원형이
되었는데, 1499년 화재후 16세기 초 지그문트 1세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17세기에 바로크 양식
의 궁전도 지어졌으며 그 남쪽에는 유대인들의 구역인 카지미에시 KAZIMIERZ(카지미에르즈) 를 구경합니다.
이제 크라쿠프를 뒤로 하고 바르샤바 로 가기위해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서 생각하니, 시간만
충분하다면 크리쿠프 교외에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상징하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 가 오시비엥침에 있으니 크라쿠프 버스 터미널에서 한시간만 버스를 타면 됩니다.
그외에 크라쿠프 주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 이 있으니 소금광산의 지하에는
암염(巖鹽) 을 깎아 만든 성당 이 있는데.... 여러 부조물과 샹들리에 역시 암염과 소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크라쿠프 교외에 마워폴스카 에는 15~16세기에 지은 동슬라브 지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목재
가톨릭 성당 이 여럿 남아있으니.... 성당에는 폴란드 고딕 양식, 후에는 로코코양식 까지
가미되어 대단히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유네스코는 2003년 다른지역 건축과는
확실히 차별된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서 이들 중 6개 목재 성당을 세계문화유산 에 등재했답니다.
수수하고 담백하면서도 상당히 특징적인 모습을 가진 성당들인데... 몇몇 성당들은 겉모습 과는
달리 내부는 화려하니, 마워폴스카 지역의 여러 작은 마을에 흩어져 있는지라
대중 교통으로 갈수 없고 크라쿠프에서 하루 렌터카 를 이용해 둘러보거나 투어를 해야 합니다.
산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달리다가 생각하니 초원의 나라
폴란드에도 남부 슬로바키아와의 접경지역은 큰 산맥지대 이니, 자코파네 &
하이 타트라 산맥 인데..... 폴란드의 최고봉은 높이 2,503m의 리시(Rysy) 산 입니다.
이 산을 비롯해 폴란드는 2,000m가 넘는 봉우리를 70개 나 가지고 있는데, 전부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타트라 산맥 에 있으니 폴란드는 이 산맥의 30% 를 점유하고 있는데, 자코파네 는
폴란드에서 타트라 산맥으로 들어가는 관문도시이며 또는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에서 들어갈수 있습니다.
크라쿠프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시간 반쯤 가면 도착할수 있다는데, 이 도시에는 알프스
의 마을 처럼 나무 오두막 같이 지어진 건물 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이 지역에서만
파는 특징적인 치즈를 굽는 냄새가 나며 도시 뒤쪽으론 타트라 산맥 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습니다.
매일 평지만 보고 사는 폴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라서 여름에 가면 미어터진다는
데.... "바다의 눈" 이라는 뜻을 가진 모르스키에 오코 (Morskie Oko) 호수가
유명하니 버스를 타고 주차장 까지 간 후 7km 정도 흙길을 트레킹을 해야 하는데
흡사 알프스, 로키산맥의 호수와 같이 무척 아름다운 호수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랍니다.
중~동부 유럽 여행 중에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를 미처 가지 못했다면 자코파네 를 당일치기 하거나 1박
정도도 추천할만 한데, 타트라 산맥은 알프스만큼은 못해도 그 풍광이 충분히 아름다우니, 깎아지른
암벽, 그리고 빽빽히 메운 침엽수림에다가 숲과 봉우리 사이에 놓인 거울처럼 깨끗한 호수 등이 있습니다.
크라쿠프 는 1040년 부터 1596 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는데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유언에 따라
아들들이 폴란드 왕국의 땅을 나누어 가지면서 6국으로 분열되었으니..... 포메른, 대폴란드 공국,
실롱스크공국(큰아들), 산도미에시공국, 마조프셰공국, 웽치차공국, '연장자령' 폴란드로 나뉘어 졌습니다.
1231년부터 실롱스크 공작 수염공 헨리크 1세 (Henryk Brodaty) 가 크라쿠프를 차지해 폴란드
고공이 되었고, 1238년 그의 아들 헨리크 2세 는 실롱스크(슐레지엔) 공국을 중심으로
절반 가까이나 통합되어 있었는데...... 헨리크 2세는 대 폴란드와 소 폴란드에 이어
마조프셰 일부 지역도 차지했고, 폴란드의 나머지 부분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남쪽 슬로바키아와만 빼고 평원에 자리한 나라인지라 외적의 침공 을 많이 받았으니,
1241년 몽골군의 침공을 래그니차 전투 라고 부르는데.... 크라쿠프 인근인 실롱스크
(슐레지엔) 공국의 레그니차에서 바이다르 와 오르다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과
실롱스크공 헨리크 2세가 지휘하는 폴란드 각 공국 및 유럽 기사단 연합군 간의 전투 였습니다.
같은 무렵 몽골군의 승리로 끝난 헝가리의 모히 전투 와 함께, 몽골의 전투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으며 폴란드와 신성 로마제국 제후국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니....
몽골제국 오고타이 칸은 1235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유럽 쪽으로의
서방 원정을 결의하고 바투가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 에 그리고 부장은 수부타이 였습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측면에서 헝가리에 원병을 보내 올 수 있었던
폴란드 왕국을 미리 쳐부수기로 했으니 1241년 1월 바이다르 (차가타이칸의 차남),
오르다(주치의 장남, 바투의 형), 카단(오고타이 칸의 아들)에게 2개 튜멘(12,000~20,000명)을
붙여 폴란드를 침공하도록 했으니..... 크라쿠프로 진입한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260여년 세월이 흐른후 1503년 ~ 1775년에 폴란드의 기병인 윙드 후사르 는 5 m 짜리 랜스(장창) 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인 날개 장식 을 달고 있는데, 본고장 발칸 반도가 오스만 터키에 점령되자
패망한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국, 왈라키아, 헝가리 왕국 의 후사르들은 국가를 잃고
용병으로 떠돌았는데 일부가 폴란드 왕국에 고용되었으니 3개 부대의 폴란드식 후사르가 생깁니다.
윙드 후사르가 세운 전적을 살펴 보면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2,600명이 기마 돌격을 하여
칼 9세가 지휘하는 스웨덴군 기병 2,500명과 보병 8,300명 중에서 무려 7,800명을
전사시켰으며, 6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해서는 러시아군 2만을 전사 시켰습니다.
또 윙드 후사르 300명 이 오스만 터키(오스만 투르크)군 1만 5천명에 돌격해 오스만 터키군 천여명을
전사시켰고, 그후 다른 전투에서는 윙드 후사르의 돌격으로 오스만터키군 3만 5천명이 붕괴
됐으며 코사크 - 타타르군 14만을 향해 돌격 했는데 폴란드군의 손실은 불과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68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의 제2차 빈 포위전 에서 터키(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20만으로 추정되는 대병력으로 포위하자, 윙드 후사르 1만 8천명 이
후대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병 돌격' 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돌격으로
오스만 터키군을 붕괴시켜 저들이 살기위해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폴란드 지배를 받던 동쪽 카자크 Cossack (러시아 남부 자유농민) 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 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의 피해도 엄청 심한데다가 국력이 소모 되어 대홍수(Potop)
시기에 쇠퇴하게 되는데..... 이 시기 폴란드는 동쪽에서 러시아군의 침입을 받는
중에 북쪽 발트해를 건너 스웨덴군이 침입해와 한때 점령 당해 지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후 농민들이 전국에서 궐기해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폴란드 왕국을 세웠으나.... 이웃 강대국들은
호시탐탐 노리다가 결국 프로이센(독일)과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 가 협정을 맺고는 침공해와서
세 나라가 3차례에 걸쳐 폴란드을 찢어서 나누어 먹으니 폴란드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후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패전한 덕분에 다시 폴란드는 독립을 회복
하지만 2차 대전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가 서로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누어 가지니 또 양분 되는 아픔을 겪었고 2차 대전 후에야 다시 독립을 되찾게 됩니다.
폴란드인들이 바쁜 걸음으로 걷는 것을 보다가 문득 나성웅 한국보육 진흥원장이 동아일보
에 쓴 “내가 만난 名문장 다른이의 실패를 헤아리는 시간”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단다. …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쓴 그 시간 때문이란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
소설 ‘어린 왕자’ 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하는 말 이다. 소중한 마음이 담긴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면서 말이다. 여우의 말 처럼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시간을
들여 노력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잘 헤아리려고 살핀다는 것이고, 즉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가 여유를 잃고 경쟁이 심화 할수록 우리는 타인에게 각박해 진다. 누군가의 실패에 담긴 열정과 땀
은 무시한 채 그저 실패를 비난하고 지적하는 여론도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보는 자극적인 영상 , 피상적인 뉴스, 편파적인 여론에
휩쓸려서 나보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부러워 하고, 나보다 실패했다
고 생각한 누군가를 무시하는 태도와 생각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공을 부러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모두가 성공하고 싶고, 실패하기 싫어
한다. 하지만 실패가 한 사람에게 낙인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 세상에서는 행복을 논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고, 인류가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
하다고 말하면서도 말이다. 어린 왕자와 같은 책은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다.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한 사회 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에 담긴 노력
을 기억해야 한다. 나태주 시인도 ‘풀꽃’ 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라고 했다. 변화가 점점 빨라지는 사회는 공감을 어렵게 한다.
완전한 공감은 힘들더라도, 성공과 실패를 두고 단순한 이분법적 평가보다는 그 사람의
과정을 헤아리고,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애쓰면서, 나와 다른 것들은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 사회가 바른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문득 “여행의 단계” 를 떠올리게 되는데, 여행 작가가 쓴 “하쿠나 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 라는
책에 보면.... “마음의 길을 잃었다면 아프리카로” 라는 부제가 붙었으니...
그러니까 문명의 세례를 받지않은 원시적인 곳 에서 순수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보라는 뜻일까요?
바르샤바 시가지를 걷다가 보니 문득 영국인 번역가인 폴 카버 한국 블로거가 동아일보에
올린 “다방커피에 삐삐, 카세트 테이프... 30년전 한국의 추억” 이 떠오릅니다.
외국인으로 한국에 살면서 처음 한국분들을 만나 소개를 받으면 대화의 처음 몇 분은 거의 같은 패턴으로 진행
된다. 질문들의 순서가 다소 다를수는 있지만 열의 아홉 중 처음으로 등장하는 4가지 필수 질문은 “어느
나라에서 왔소?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시오? 한국에는 얼마나 오래 살았소? 한국에 온 계기가 무엇이오?” 이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이후 한국은 빠른 발전과 사회 변혁 을 이뤄 왔는데 아직도
많은 한국분들이 ‘한국에 살고 싶다’ 는 외국인들을 보면 적잖이 놀라시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외국인들의 배경 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좀 복잡하다. 왜냐하면 완전히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한국과 영국을 계속
왕복했던 시기가 꽤 길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꾸준히 살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난 한국 생활 16년 차다. 그러나 한편으로 2002 월드컵 전에도 이미 2, 3년 정도를
한국에서 살았으니 대강 반올림해서 보면 한국 생활 19년 차 라고 말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또 따지고 들어가 보면 이미 그전에도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적 있었으니 1992년 내가 처음 한국
을 방문한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음 주쯤이 나의 31주년 ‘한국 방문 기념일’ 이 된다. 처음
한국에 왔을때는 아버지 친구분이 호주대사관에서 일을 하고 계신 때라 여름휴가 로 한국을 방문했었다.
*** 바르샤바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청 높은 건물이 보이니 학생문화궁전 입니다 ***
성북동 멋있는 산등성이에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커다랗게 서있던 호주대사관저에서 생활하시던 아버지
친구분 덕분에 한국 생활에 대한 비현실적인 인상 을 받아 갔던 것 같다. 오늘 이렇게 깊은 회상에 잠겨
내가 처음 한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한국의 모습에 대해서 ‘라떼는 말이야’ 회고록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라떼는 말이야, 한국엔 인천이 아니고 지금 국내선 위주로 사용되는 김포공항이 국제공항 이었다.
그 당시에 비행기에서 내리면 검은 제복을 입은 무섭게 생긴 출입국 관리관 을 거쳐서 입국
심사를 했었다. 지금이야 해외에서 상도 많이 받고 최첨단 자동출입국 심사 관리 시스템을
갖춘 인천공항에서 아무한테도 심문받을 필요 없이 출입국이 자유자재로 가능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라떼는 말이야, 스마트폰이라고 불리는 이 휴대전화란 게 없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친구나 지인들의 전화번호
를 빽빽이 적은 작은 수첩 을 들고 다니면서 ‘삐삐’ 라고 불리는 작은 기계에서 신호음이 울리면 메시지를
확인하러 공중전화기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서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라떼는 말이야, 다방
(현재의 커피숍)을 가면 사람들이 삐삐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게 각 테이블에 전화가 비치 되어 있기도 했었다.
그 당시 커피숍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처럼 컵 사이즈가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지도, 각각 다른 종류의 맛과
향을 지닌 다양한 커피를 마실 수 있지도 않았고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약자인 ‘아아’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커피숍에서 팔던 헤이즐넛 커피, 밀크셰이크, 파르페 등이 기억에 아른거린다.
BTS나 블랙핑크는 없었지만 핫한 20대였던 7080이 신나게 듣고 춤추던 최신곡 들이 있었다. 스마트폰
앱에서 플레이리스트에 신곡을 내려받아 듣지는 못했어도 최신곡 믹스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 해
리어카 한가득 팔던 아줌마 아저씨들한테 구매했던 이력이 있다. 그리고 재밌게도 그 카세트
테이프들이 아직도 영국 부모님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지난번에 영국에 갔을 때 발견했다.
청계천도, 서울로7017도 자동차로 빽빽한 고가차도로 덮여 있었고 버스 전용차선도 없던 때라 버스로
서울 여행을 하려면 몇시간이 지나도 모자랐다. 지하철이 없는 이태원 이라도 가려면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불편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았으며 기차로 서울에서 부산 가는 데 6시간 이나
걸렸기 때문에 시간보다 돈이 더 많은 분들은 기차 보다 비행기로 서울∼부산을 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기나긴 세월을 서울에서 살면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면 30년전 서울은 지금 서울과는 완전 다른 동네
처럼 느껴진다. 서울도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 되면서 피맛길을 포함해서 여러 유명하고
아기자기했던 예쁜 장소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 너무 안타깝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서울은 지금, 최소한 나 같은 30년차 베테랑 외국인이 살기에는 더 좋은 삶의 터전 이 되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