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烏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여러 개 있는데 밀양 금오산(730)과 하동에 있는 금오산(849), 그리고 여수에도 323m의 금오산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구미 금오산이 가장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구미 금오산은 우리나라 최초로 1970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금오산은 전형적인 남성미가 넘치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정상 근처 성안에는 습지를 비롯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부근은 976m의 현월봉 958m의 약사봉 925m의 보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이름의 유래가 이름은 태양속에 산다는 세발달린 황금까마귀(금오)가 노을속에 금빛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大本山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중국황하강 유역 하남성에 있는 중국오악산 가운데 하나인 숭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북한 황해도 해주에는 북숭산이 있다.
금오산은 선산 방향에서 보면 산정이 붓과 닮았다하여 필봉(筆峰)이라고도 불렀는데, 선산지방에는 문인과 명필가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의 문인 성현은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했다.
또 구미시 인동방향에서 보면 마치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하여 와불(臥佛)산이라고도 했단다. 또 한 귀인이 관(冠)을 쓰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귀봉(貴峰)이라고도 했고, 거인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거인(巨人)산이라고도 불렀단다.
김천방향에서 바라보면 부잣집의 노적가리 같다하여 노적봉(露積峰)이라 불렀고 실제로 이 지역에는 큰 부자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또한 김천 개령방향에서 보면 큰 도적이 숨어 노려보는 모습과 닮았다하여 적봉(賊峰), 성주 방향에서 보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모습을 닮았다하여 음봉(淫峰)이라고도 불렀단다.
도선굴 가는 길은 날씨가 좋을 때는 무리가 없지만 숱한 사람들의 발길로 바위가 닳아서 비가 오거나 눈이 쌓이면 무척 미끄럽고 위험한 길이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때면 교행이 어려워 많이 정체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할딱 고개에서 철탑으로 가는 길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할딱 고개는 금오산 등산코스중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해서 예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개는 할딱이라하지 않고 깔딱고개라하는데 특이하다. 창녕의 화황산이나 울산의 문수산에도 깔딱고개가 있듯이 깔딱고개는 산마다 다 있는 듯 하다.
전망 좋은 바위에 부자가 함께 정겹게 앉아 있다.
능선에서 바라본 금오산저수지
노란 단풍이 예쁘기만하다.
위험한 낭떠러지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단풍길 사이로 사람들이 땀흘리면서 올라오는 모습들이 보인다.
'돌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쌓았다는 돌탑들이다.
마애석불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나타난 이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렸다.
덕분에 난 아슬아슬한 절벽 끝자락에 위험하게 매달서 한컷 담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처음으로 물 한모금하고 식사겸 간식으로 가져간 단감을 먹다가 이분께 하나를 드렸다.
전망 좋은 곳에 올라서서 이런저런 여러가지 설명도 해주셨는데 성안까지 동행해 주시겠단다.
더군다나 라면이랑 밥까지 나누어 주시고... 아침eh 먹지 않았던터라 정말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게 먹었다.
나보다는 몇 살 많으신 것 같고 참 선하게 보이는 분이었다. 헤어지는 길에 어디에 살고 어디에 근무하는 누군데 오실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라 이르고 헤어졌다.
이 탑은 탑 좀 특이하다. 가운데 부처가 모셔져 있고, 그 위로 성모마리아상이 있다. 맨 위에는 단군상(? 문무왕릉)을 형상화 해 놓았다고 한다.
특히 가운데 부처의 손에는 최근에 나온 장난감같은 10원짜리 동전이 두개가 놓여 있었는데 정오무렵이면 동전에 반사된 금빛이 부처의 미간을 향한단다.
발상이 이채로운 탑이다.
물개같은 돌을 서로 상하 대칭되게 쌓아놓은 탑으로 조잡하다 할지는 몰라도 거기에 적힌 한마디 문구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돌탑이다.
멀리 약사암 일주문인 동국제일문이 보인다
우측 돌탑이 보이는 곳에서 바라본 약사암 풍경은 애국가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가히 절경이다.
금오산 약사암 일주문인 동국제일문이다.
양쪽의 암벽이 바로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인 일주문이었는데 그 가운데 일주문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이십여년 전에 와 봤을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이다.
정상인 현월봉은 초생달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 한다.
주변에는 온통 군사시설로 인하여 구경거리가 없다. 우회로를 따라 가면 약사암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약사암에서 바라보이는 반대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금오산 정산인 현월봉을 지나가면 돌탑을 쌓아놓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장면인데 가슴이 후련하다.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지겹지 않을 듯하다
약사암 뒤쪽 봉우리가 약사봉(958m)이다
성안이라는 곳이다. 말 그대로 성의 안쪽이란다. 지금은 가물어 말라있었지만 습지도 있었고...
모르긴 몰라도 성안에서 촌락을 이루었을만한 안부로 보였다. 정상부근에 미군들이 상주할 때는 이곳에 일명 양공주들이 머물기도 했었단다.
지나온 능선길과 우측 멀리 칼다봉이 보인다
길재를 기리기 위한 채미정 : <吉再, 1353년~1419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길재는 11세 때 선산에 있는 도리사라는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8세 때인 1370년 박분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고려가 쇠망할 즈음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정종 2년에, 전부터 같은 마을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태종)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듯이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있은 다음 정도전 조준 이성계 등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하자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숙제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며 어머니를 모신다는 이유로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는 회고가를 통하여 인간사 덧없음을 노래했다.
그의 충절과 높은 학덕을 기리 위하여 영조 때인 1768년에 세워진 정자가 채미정이다.
채미(棌嶶)란 다른 왕을 섬기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생겨난 말이다
첫댓글 구경 잘 했습니다....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정말 절경이네요. 저기에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그 원력이 정말 대단하신것 같아요. 다리 아프다고 꼼짝을 못하고 있는데.. 구경 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心 뒤집어야 비운다' *^^ 안밖 위 아래를 알면 쫌 뒤집을 수 있을려나...
가을 제대로 물들었네요. 근대 금오산가려만 맘 단단히 먹어야겠네요.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은것 같아 보기만해도 다리가 후둘후둘.... 맘을 뒤집어야 비운다... 오늘의 화두로 삼아봐야겠네요. ()()()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