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여행일 : ‘14. 2. 28(금)
특징 : 대마도의 최북단 와니우라(鰐浦)에 위치한 전망대로서 일본에서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이다.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전망대 건물을 아예 한국의 이미지를 본떠 팔각정(八角亭)으로 세워놓았다. 건물은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亭子)를 모델로 하였다고 하며, 전문가 자문 및 자재 구입 등 철저하게 한국풍(韓國風)으로 지어졌다. 건물 안에는 부산, 김해, 진해를 가리키는 지도판(地圖板)이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시의 거리가 보인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 첫 번째 관광지는 한국전망대,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객선이 입항(入港)한 하타카츠항(港)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전망대에서 부산까지는 불과 49.5Km, 날씨가 좋은 날이면 부산항이 또렷이 보인다고 한다. 만일 부산에서 불꽃놀이라도 할라치면 그 휘황찬란한 빛줄기가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 전망대인 팔각정 옆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부산을 떠나 대마도로 오던 역관(譯官) 사절단을 태운 배가 풍랑에 뒤집혀 전원이 숨진 것을 추모하는 빗돌이란다. 참고로 1703년 대마도 제3대 번주(蕃主)의 죽음을 위로하고 제4대 번주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해 떠난 108명의 조선역관들이 탄 배가 대마도 항구를 목전에 두고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전원 몰살당했다. 이 비석(碑石)은 한천석 등 108명의 조선 역관과 안내를 맡은 4명의 쓰시마인들을 애도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112명의 영혼(靈魂)을 상징하는 112개의 초석으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역관사(譯官使)란 당시 일본 선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던 일종의 교수였다.
▼ 이층으로 된 전망대의 위층은 조선통신사 행렬 등의 그림과 여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는 내부(內部)와 전망을 할 수 있는 베란다(veranda)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베란다에는 망원경(望遠鏡)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은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다. 망원경(望遠鏡)을 통해 내다보아도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 주어진 시간이 남아서 맞은 편 언덕으로 올라가본다.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는 산등성이를 넘으니 신사(神社) 하나가 나타난다. ‘금비라신사(金比羅神社)’ 다섯 개의 토리이(神社의 門)을 지나니 아담하게 지어진 신전(神殿)건물이 나온다. 금비라는 바다의 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 바닷가 사람들이 바다의 신에게 안전한 항해(航海)를 비는 곳인 모양이다.
여행지 : 카미자카(上見坂)전망대 여행일 : ‘14. 3. 2(일)
특징 : 정식명칭은 ‘이키-쓰시마국정공원 카미자카원지(?岐?馬國定公園 上見坂園地)로 해발 385m의 구릉(丘陵)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이쵸오토시‘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자이쵸오토시라는 지명은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 시대에 대마도를 차지하기 위한 두 가문의 격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전망대(展望臺) 외에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에서 지어진 군사시설들이 아직까지 남아있기도 하다.
▼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망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의 앞은 잔디광장, 그 너머로 아소만의 정경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전형적인 리아스식해안과 그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작은 섬들이 마치 잘 꾸민 정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다 재수라도 좋은 날이면 대한해협 건너의 한국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잔뜩 흐린 날씨, 거기다 안개까지 자욱한 탓에 섬이 만들어낸다는 정원(庭園)은커녕 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 행여나 안개가 물러날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본다. 그런 내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언뜻 안개가 물러나는 것이 보인다. 흐린 날씨 탓에 선명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섬들이 실루엣으로 처리되며 슬그머니 나타난다. 그리고 잘 그린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를 그려낸다. 한마디로 장관(壯觀)이다. 비록 금방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행운이라 할 수 있다.
▼ 더 이상 안개가 걷힐 것 같지 않아 공원을 둘러보기로 한다. 전망대 뒤쪽으로 난 산책로로 들어서면 울창한 숲길 뒤로 일본군들이 쓰던 옛 진지가 숨겨져 있다. 1902년 긴박하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비하기 위해 세워진 포루(砲樓)라고 한다.
▼ 포대와 탄약고, 병사들의 숙소(兵舍), 군수창고 등 시설들은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지어지고 나서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얼마나 견고하게 지어졌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포대 옆에 작은 빗돌(碑)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평화내비(平和乃碑)’ 쉽게 말해 ‘평화의 비’이다. 일본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을 즐겼던 호전적(好戰的)인 민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평화’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 파업이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그와 뭐가 다르겠는가
♧ 내가 좋아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했던 사람이기에 사진촬영을 안했지만 이곳 카미자카공원에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비석(碑石)이 하나 더 있다.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우 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詩碑)가 바로 그것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다는 그는 야망(野望)도 컸던 모양이다. 그 야망을 이루지 못한 답답함을 시 한수로 표현해 놓았는데, 그 시를 비석에 새겨 놓은 모양이다. 오가는 관광객들이 시비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데도, 거기에 선뜻 동참을 못하는 난 어쩔 수 없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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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