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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겨울이 이래? 할 정도입니다. 겨울이야, 봄이야? 겨울도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지만 겨울 맛이 나지 않습니다. 겨울 낚시 축제도 거의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준비들 꽤나 했을 텐데 예산 다 날렸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다가오는 봄여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어 죽어야 할 세군들이 그냥 보존될 테니 행여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지는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는 것입니다. 전쟁만큼 두려운 일 아닌가요? 전쟁불사만 떠들 것이 아닙니다. 은근히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는 이 기후변화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기야 임기 내에 벌어질 위협은 아니니 나 몰라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참! 좀 더 미래를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래 가까운 친지들의 상을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이제 80이 되었고 또 한 친지는 갓 60을 넘었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중간에 껴있는 저 자신도 그리 멀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백세시대라고 하여 한참 멀게만 보였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 건강하여 함께 한 시간도 있었는데 갑작스런 병마는 생명을 너무 쉽게 앗아갔습니다. 이별은 인생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벌어지면 더 아픕니다. 새해 희망찬 출발과 이별의 아픔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게 인생이지요. 산 자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유효합니다. 이를 위해서 역시 건강을 잘 챙겨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추위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건강하게 겨울을 기다립니다. 건강한 한 주를 빕니다. ^)^
2024년 01월 20일 김종우 목사 드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사무엘상 20 : 42)
<클레어의 세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별을 몇 번 경험할까요? 이별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헤어짐은 아픔을 가져옵니다. 일부러 고통을 자처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서서 고행을 하려는 사람도 사실 육체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지 마음의 아픔을 당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것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으로 이겨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픈 것을 몸으로 이겨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키지 않으니 몸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있어야 몸이 따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별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래서 오히려 몸져눕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학창시절 외딴 시골로 하계봉사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3박4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곳 어린이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지냈는지 기간이 끝나고 떠나올 때 아이들도 저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짧지만 우리 모두 정을 흠뻑 쏟았던 것입니다. 이별, 아프지요. 당하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픈 마음을 달래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하지요. 우리 모두 그렇게 아픔을 경험하며 자라갑니다. 다른 많은 마음의 고통이 있지만 이별은 어쩌면 유익한 경험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것 또한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보니 당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가야만 하는 과정이지요.
흔한 일로, 정규과정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졸업입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 그 후에도 여러 가지 과정들을 밟으며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짧게 또는 길게 과정을 지날 것이며 그 기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느끼는 이별의 아픔도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길어도 별 감정 없이 당하기도 하고, 짧아도 가슴 시리게 당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큰 차이를 불러옵니다. 사실 인생이란 것이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어나자 부모의 만남으로 시작해서 관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관계의 시작이고 관계형성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사는 6살 ‘클레어’는 아빠보다는 유모 ‘글로리아’와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아빠는 일해야 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클레어는 거의 대분의 시간을 글로리아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엄마이고 친구입니다. 먹고 자고 입고 노는 일에 글로리아의 돌봄을 받습니다. 아빠도 클레어의 양육이나 집안일을 글로리아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클레어의 세계는 곧 글로리아이고 클레어의 추억도 글로리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깁니다. 글로리아의 고향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렵게 아빠가 집안일을 하며 다시 보모를 구합니다. 다르지요. 다시 처음부터 한다는 것이 낯설고 어렵습니다. 자꾸 글로리아만 생각이 납니다. 생기를 잃은 클레어를 보며 안쓰러워하는 아빠가 방학을 맞아 클레어를 글로리아 고향으로 보내줍니다. 긴 여행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중 나온 글로리아를 부둥켜안고 좋아합니다. 그리웠던 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또 긴 여행을 하며 글로리아의 집에 당도합니다. 처음 당하는 대식구입니다. 글로리아에게도 이미 아들, 딸이 있었지요. 물론 이미 듣고 알고서 선물까지 준비해 갔습니다. 딸은 장성하여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까지 배고 있었습니다. 머무는 기간 중에 새 아기를 봅니다.
클레어의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봅니다. 아빠와 보모인 글로리아 그리고 자기만 알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갑니다. 글로리아가 대하는 사람들이 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느껴야 합니다. 글로리아의 친 자녀들이 있습니다. 결혼한 딸보다는 특히 어린 아들이 클레어를 대하는 태도가 처음에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낯선 어린 녀석이 나타나더니 마치 딸처럼 행세합니다. 자기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빼앗고 있는 것이지요. 함께 놀며 어울리며 이겨나갈 무렵 이제는 글로리아의 손녀가 태어납니다. 글로리아는 그 어린 것에 빠져 삽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상태니까요. 왠지 버려진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질 때가 되자 이제는 글로리아의 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학이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습니다. 잃은 듯 다시 찾고는 이제 또 잃습니다. 남는 것은 추억뿐. 내가 사랑하는 건 알지? 고개는 끄덕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로 향하는 발걸음이 올 때처럼 가볍지는 않습니다. 아픈 것은 글로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에 나이가 상관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고받은 사랑을 품고 그 아픔을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세상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 마음은 같습니다. 피부가 검든 희든 피는 붉은 색이니까요. 영화 ‘클레어의 세계’(Ama Gloria)를 보았습니다.
두 이스라엘
사오정이 드디어 보청기를 장만하여 학교에 갔습니다. 자습시간을 마치고 수업이 시작됐는데 맨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선생님이 지적합니다. ‘야! 거기 맨 뒤! 너 필기 안 하고 뭐 해?’ 오정이 대답합니다. ‘안 보여서요.’ ‘그래? 니 눈 몇인데?’ 오정이의 대답, ‘제 눈은 둘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니 눈이 얼마냐고?’ 그러자 오정이 왈, ‘제 눈은 안 파는데요.’ 선생님 열 받기 시작합니다. ‘얌마! 니 눈이 얼마나 나쁘냐고?’ 오정이의 대답, ‘제 눈은 나쁘고 착하고 그런 거 없는데요.’ 사오정 이놈 잘 들어도 문제지요. 왜요? 들어도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에 이야기했던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 족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지요. 말은 우리말인 듯한데 알아듣지를 못하고 글은 우리글인데 그 뜻을 모릅니다.
사오정 이야기는 우스갯소리로 나누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종종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심한 경우를 예로 하여 우스갯소리를 시리즈로 만든 것이 ‘사오정 이야기’입니다. 저도 나이가 드는 탓인지 가는귀가 먹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그럽니다. ‘당신 사오정이야?’ 자기가 질문하는 것과 영 딴판으로 대답을 하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겁니다. 아무튼 서로 이야기하는데 한쪽에서는 사과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복숭아 이야기로 듣는다면 웃기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오해와 다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르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듣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주제를 벗어나고 엉뚱한 오해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들 사이의 이야기는 그렇다 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생을 거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일이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이 잘못하실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하는 걸까요? 하나님 말씀에 오류가 없다면 그건 보나마나 바로 우리 잘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엉뚱하게 듣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엉뚱하게 전하는 것이지요. 말씀 전하는 목자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나 잘못하고 끝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을 하나님 맡기신 양떼에게 전하니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소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는 겁니다. 함께 구덩이에 빠집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오늘은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시는 대로 아멘! 하고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잘못이 생깁니까? 전하는 자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왜요?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지요. 잘못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 뜻대로 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 백성’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 어떻다고요? 예,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겁니다. 하나님 뜻과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지요. 예수님 초림 때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 15 : 3 - 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너희 유전으로’ 즉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치니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거스른다, 그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범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두렵지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왜곡 첫 번째 경우가 역사 왜곡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야 하는 상대방이 있겠지요. 하나님이 당신 혼자서 독백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들어야 하는가?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누가 듣습니까? 자식들이 듣지요.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듣는 게 아닙니다. 또 그러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상대는 바로 당신의 자식들입니다. 또 설령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그 소리가 들린다 해도 그 아이들이 그 말씀에 주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상대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출 19 : 3절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 누구에게 말하라고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입니다. 세상에 많은 나라 많은 족속이 있지만 하나님은 유독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5 - 6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렇습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행해서 온 세상 모든 나라들 가운데 제사장 나라를 만드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오직 레위 지파가 하나님 성전을 봉사하도록 선택되었고 또 그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 만민에게 모두 한꺼번에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령 영자에게 쓴 편지를 순자가 자기에게 쓴 것으로 알고 읽는다면 그 뜻이 온전히 전해지겠습니까? 웃기는 일이지요. 하나님 말씀 성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합니다. 신 10 : 14 - 15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렇지요. 그렇게 만민 중에서 택하여 낸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속에 누구의 이야기가 들어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넣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영자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는데 순자의 이야기를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거기에 순자는 어디가 예쁘다는 둥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영자가 그 편지를 읽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물론 지나가는 이야기로 곁들여 나올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오로지 주제는 영자이고 목표도 영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관심은 오로지 당신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성경을 주셨다고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앞서 본 성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어도 하나님이 영생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 4 : 39 - 40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여기 말씀하시는 ‘너’가 누구입니까? 세상 만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역사는 누구의 역사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전에 우리가 알았듯이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래야 세상 과학과 충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아무리 계산해 봐도 4천 년 그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류의 조상이라고 극구 우긴다면 세상에서 과학자들이 증거하는 인류의 역사와 충돌합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는 과학을 무시하는 비이성적인 존재들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 무지를 우길 필요가 없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도 6천 년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이것 가지고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창 4 :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살인자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성경에 아직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기가 죽인 아벨 외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구를 두려워하는 겁니까? 상상으로 만들어낼 것이 없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 외에도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 가운데 아담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하셨지요.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영생의 기회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영생의 기회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손들을 이어가며 당신의 백성을 일으키십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어서 그 열두 아들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십니다. 약속하신 메시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고 그 후에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하나님의 도(말씀)를 떠나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던 영생과는 딴판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신 바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신 30 : 19 - 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아멘!
그러나 땅의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메시야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주셨지만 그마저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 안에 있던 구약시대 육적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눅 16 :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역하고 영생의 길을 포기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을 요약해서 요 1 : 11 - 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멘!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혈통 중심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지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 혈통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 3 :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바로 그 덕인 줄 압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영적 이스라엘을 시작하셨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으로 시작하여 세례 요한까지 대충 4천 년입니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영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금까지 약 2천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이스라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다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지요. 육적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구원의 여정을 밟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영적 이스라엘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으로의 구원의 여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도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기 쉽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잘못했던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 : 1 - 6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신령한 식물, 신령한 음료를 먹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던 육적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요?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희가 악을 즐겨했다고 하는데 ‘저희’가 누구입니까? 바로 구약시대 육적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누구이겠습니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바로 우리 아닌가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준은 이 세상에서의 도덕적 윤리적 수준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럴 것이면 예수님이 율법을 그렇게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으라 저주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윤리적 수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즉 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악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저주를 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영적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범하였던 그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행하여 구원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우리의 바람과 다르게 우리 또한 육적인 이스라엘이 범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을 등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옛 언약(구약)을 어긴 것처럼 우리는 새 언약(신약)을 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또한 심판하고 끝을 내실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그런 예언이 있으니 귀 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 8 : 11 - 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나라의 본 자손들이 누구입니까? 초림 때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재림 때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말씀을 초림 때에만 적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초림 때의 육적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영적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 아닙니까?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과연 심판의 때가 오고 있으니 말이지요.
주님 재림의 때가 어떤 때입니까?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이 언제 일어날 것을 말씀하심입니까?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입니다. 분명 재림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구약시대의 열두 지파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영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열두 지파라는 말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는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신약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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