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6권, 42년(1905 을사 / 대한 광무(光武) 9년) 11월 30일(양력)
민영환이 한일조약에 분개하여 자살하다
시종부 무관장(侍從府武官長)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이 새로운 한일 조약(韓日條約)에 분개하여 칼로 자살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 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괴로운 심정이 절절하여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졸(卒)한 육군 부장 민영환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궁내부(宮內府)에서 1등급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사(匠事)는 영선사(營繕司)에서 거행하게 하라.
의정 대신(議政大臣)의 직임을 추증하고, 예식원(禮式院)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정문을 세우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 정경(正卿)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모든 관리들은 나아가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육군 부장 민영환의 노모(老母)의 정리가 가련하니 중사(中使)를 보내 위문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육군 부장 민영환의 자식에게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위문하고 구휼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졸한 육군 부장 민영환의 상에 각종 비단 10필(疋), 무명과 베 각 5동(同), 돈 1,000환(圜), 쌀 30석(石), 전칠(全漆) 1두(斗)를 특별히 수송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주영 서리 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이 명을 받든 지 여러 해 동안 성과가 많았는데 이국땅에서 죽었으니 매우 가엾다. 증직(贈職)하는 은전을 베풀고 지방관을 보내 장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이한응 역시 새로운 한일 조약으로 인해서 비분강개하여 자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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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6권, 42년(1905 을사 / 대한 광무(光武) 9년) 11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민영환과 이한응에게 벼슬을 추증하다
졸(卒)한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은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을 추증하고, 졸한 주영 서리 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은 가선 대부(嘉善大夫) 내부 협판(內部協辦)을 추증하였다.
민영환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61년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다.
민태호는 음직인 참봉을 지내다가 민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출세가도를 달렸던 인물이다.
1877년(고종 14) 5세의 어린 순종을 가르치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1878년 대과에 민씨 척족의 후광을 입고 장원급제하여 초고속 승진을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21세에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 때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런 이유로 후일 그는 동학농민군의 척결 대상이 되었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조선 최초의 신식해군인 해방영(海防營)을 설치하였고 1886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였으나 친청(親淸)세력인 민영익(閔泳翊)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고종의 특명을 받아 청나라와 일본을 견재하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맺기 위한 목적이었다.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를 만나 협상을 벌였지만 미미한 성과를 얻는데 그쳤다.
이 때 민영환은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해천추범 海天秋帆》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민영환 | 두산백과
이한응
본관 전의(全義). 호 국은(菊隱). 본명 경천(敬天). 경기 용인 출생.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 189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897년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되었다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駐箚公使館) 3등 참사관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주영공사(駐英公使)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署理公使)가 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 나라의 형세가 위축되고 대외적으로는 영 ·일동맹으로 한국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죽은 뒤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이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되고,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이한응 | 두산백과